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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교사 May 02. 2020

교사 소진을 설명하는 세가지 모형

교사 소진(번아웃)은 “교사들이 스트레스에 스스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증상으로 신체적으로 지치고 직무에 대해 무능감과 냉담을 느끼는 것”이다. 소진은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더 심각한 상태, 즉 우울증이나 자살로 넘어가는 과정이자 매개변수다. 스트레스가 번아웃으로 번아웃이 우울증으로 우울증이 자살로 간다고 거칠게 정리할 수 있다. 우울증의 가능성이 큰 교사가 정서적으로 민감한 아동, 청소년에게 노출되는 것은 교사에게나 학생에게나 불행한 일이다.


교사소진에 대한 조작적 정의에는 통상 MBI-ES(educator survey)의 정서적 탈진(emotional exhaustion), 비인간화(depersonalization), 개인적 성취감의 결여(lack of personal accomplishment)라는 세 차원이 사용된다. “선생하기 힘들다"라는 막연한 호소와 불만을 보다 구체적으로 진단할 수 있게 정의한 것이다.


이 세 차원은 교사소진의 양태이며, 교사소진의 원인에는 요구-통제모형(DCM; Demand-Control Model), 노력-보상 불균형 모형(ERIM; Effort-Reward Imbalance Model), 직무요구자원(JD-R: Job Demands-Resources)모형 등이 설명력을 가지고 있다. 이 중에서 특히 직무자원모형(JD-R)은 교사가 전문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교사소진을 설명할 수 있는 보다 효과적인 도구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교사가 소진의 수동적인 대상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주어진 업무의 강도를 줄이고, 본인의 자원을 높여 업무를 의미 있는 활동으로 바꾸는 잡크래프팅(Job crafting)을 통한 교사소진 대책 마련에도 새로운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교사소진을 설명하는 기존의 모형들은 모두 비례적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가령 교사에 대한 요구에 비해 너무 적게 주어지는 통제권, 교사가 투입하는 노력에 비해 너무 적게 주어지는 보상, 그리고 교사가 수행해야 하는 직무에 비해 너무 적게 주어지는 직무자원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교사 소진의 원인이 되는 스트레스가 이런 상대적인 비례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적인 문제일수도 있다. 가령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가는 업무의 과다나 다른 사람들과의 대인관계 트러블(선배교사, 학부모 등) 같은 것들은 비례적이 아니라 절대적이다.


물론 업무수행 능력 대 업무의 양, 정서적 견고성 대 대인관계 스트레스 등으로 비례화 할 수는 있겠지만, 인간의 능력이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때, 비례로 설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업무량과 대인관계 스트레스의 정도가 있다. 또 아무리 보상이 많더라도 업무 그 자체가 과도하다면, 노력보다 보상이 더 많다 하더라도 소진현상이 일어날수 밖에 없다.


실제로 초등학교, 중학교 교사의 경우는 절대적으로 업무시간이 부족하다. 교사는 전문직이다. 따라서 실제로 일하는 시간 뿐 아니라 그 일을 하기 위한 도구를 준비하는 시간, 그 일을 하기 위한 능력을 유지 발전시키는 시간까지 모두 업무에 해당된다. 이 시간은 당연히 업무시간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하루 노동일은 이 시간들을 포함하여 책정되어야 한다.


수치상으로는 우리나라 교사들은 이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고 있다. 중학교 기준으로 교사들은 하루 여덟시간 중 4-5시간 정도의 실제 수업을 하기 때문에 하루 3-4시간 정도를 수업 준비, 전문성 개발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전체 시간을 100으로 볼때 60% 정도의 가동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도는 전문직에게 적당한 수준이다. 나머지 40%가 노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 피드백 하는 시간으로 활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에 따르면 실제 우리나라 교사들의 가동률은 85%를 넘어가고 있다. 저 3-4시간 중 대부분을 다른 일을 하는데 쓰고 있다는 뜻이다. 그 다른 일이란 쏟아지는 공문, 정책사업, 그리고 구두점 하나 하나까지 따져야 하는 까다로운 각종 문서 작성 등 주로 행정적인 업무다.


이런 교육외적인 행정업무에 시간을 다 쓰고 나면 수업재료 제작, 평가문항 출제, 수업 지도안 작성, 수업자료 수집, 교수학습방법론 조사 및 수련과 같은 일들을 할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을 하지 않고서는 다음 수업을 할 수 없다. 결국 교사들은 근무시간이 아니라 밤시간이나 주말을 이용하여 이런 일들을 하게 된다. 방학기간이 있기는 하나, 한학기 분량의 수업준비를 한꺼번에 하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기존의 교사 소진 모형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각종 행정업무는 교사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요구와 거리가 멀다. 그런데 정작 각종 보상은 사회적 요구인 교육이 아니라 이런 행정업무를 중심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는 공식적인 사회적 요구와 실제 요구되는 가치 사이의 불일치로, 로버트 머튼이 말한 아노미 상황에 해당된다. 그리고 뒤르켐이 지적했듯 아노미 상황은 인간을 파편화, 원자화 함으로써 심한 우울증과 자살 위험으로 내모는 원인이다.


대인관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비례대상이 필요없는 절대적인 스트레스 요인이다. 교사는 지식노동자일 뿐 아니라 감정노동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감정에너지의 과도한 지출로 인한 소진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흔히 생각하는 것 처럼 교사의 감정에너지를 방전시키는 존재는 학생들이 아니다. 학생의 잘못은 교사의 잘못이기 때문에 교사들은 이를 자신에 대한 피드백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다른 어른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는 교사를 지치게 할 뿐 아니라 직무 자체에 대해 회의감을 들게 만든다. 특히 학교장 등 관리자와 학부모가 문제다.


우리나라 초중등 교육법의 거의 모든 조항은 주어가 “학교장”으로 되어 있다. 모성보호를 위해 심지어 당연한 권리라고 할 수 있는 출산휴가조차 부모가 아니라 학교장이 주어가 되면서, “학교장은 ~휴가를 명할 수 있다.”로 되어있다. 이런 조항들은 상식 밖의 것들이기 때문에 실제로 문제 상황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학교장이 악용하기로 마음먹으면 교사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며, 자녀가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을 해도 학교장이 휴가를 명해주지 않아 가 볼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할수도 있다. 실제로 이런 교장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이런 경험은 누적되는게 아니라 단 한번 만으로도 교사의 자존감을 무너뜨릴 수 있다. 업무의 통제는 커녕,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권조차 거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교장의 직무만족도가 세계 최고수준인데, 교사의 직무만족도가 최하권이라는 사실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통제감의 제로섬 게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맥빠지는 일은 일부 관리자들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라 교장에게 거의 전권이 주어지고, 교사를 철저히 수동적인 위치로 두고 있는 법령의 문제다.


학부모의 문제는 2000년대 들어 급격하게 심각도가 높아졌다. 이른바 교육수요자론이 도입되면서 학부모들이 공동의 교육자, 양육자 마인드 보다는 고객, 민원인의 마인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관공서에서 문제가 되는 악성 민원인들의 문제가 이제는 학부모라는 탈을 쓰고 학교에서도 재연된다. 더구나 교사는 그 신상과 연락처가 외부에 훨씬 쉽게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일반 공무원보다 훨씬 불리한 상황에 처해있다. 교사는 의사와 더불어 불만을 가진 의뢰인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노출된 전문직이다. 그나마 병원에는 보안이라도 있지만, 학교는 무방비 상태다. 10년간 수백명의 학부모로부터 좋은 이야기를 들어도, 단 한명의 학부모가 학교에 난입하여 욕설과 행패를 부리면, 10년 적공은 도로아미타불이 되며, 교사는 심각한 트라우마 상황에 처한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교육과 관련한 거의 모든 조치에서 친권이 교권을 압도하고 있다. 이는 아동의 교육과 복지를 위해 친권을 과감하게 제한할 수 있는 다른 선진국들과 매우 다르다. 대체로 악성 민원인으로 돌변하는 학부모들은 학생에게도 좋은 부모가 아니며, 신체적 정서적으로 학대하거나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는 친권 앞에서 어떤 교육적 조치를 할 수 없으며, 만약 조치를 하려고 시도하면 악성 민원인으로 돌변한 학부모로부터 상당한 정서적 신체적 타격을 받을 수 있다. 학생들에 대한 애착이 큰 교사일수록 이런 경우 상당한 무력감을 느낀다.


이러한 문제들은 비례적인 것이 아니다. 단 한 번의 사례만으로도 교사의 심신을 무너뜨릴수 있는 것이다. 소진은 서서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단 한번에 불타 없어지기도(번 아웃)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손상된 교사의 신체와 정서 회복에 대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후적인 지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없도록 법과 제도를 제대로 정비하는 것이다.


2000년대 이후, 교사들에게 주어지는 권한(empowerment)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바람직 하든 아니든 간에 체벌이나 상벌점 등은 분명히 권한의 기능을 했다), 교원능력개발평가, 성과급 등과 같이 높아지는 책무성에 대한 요구는 이미 그 종착역이 교사소진임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기존 관리자들과 관료들의 권한은 전혀 줄어들지 않은 상황에서 학교운영위원회 등을 통해 점점 가중되는 학부모의 압력은 교사들의 요구-권한 불균형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는 교사의 권한을 구성하던 낡은 도구들이 정당하게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신할 정당한 방편이 구성되지 않아서 비롯된 아노미 상황에 해당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들은 수동적으로 소진되고 있지만은 않았다. 혁신학교 운동이 그 사례다. 혁신학교는 진보교육감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교사들의 자발적인 운동을 제도화 한 것이다. 이들 혁신학교 선도자들은 승진과 보수 등의 구체적인 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인 혁신학교 운동을 일으켰다. 이는 직무자원 모형으로 설명할수 있는데, 혁신적이고 선도적인 교사들의 열정이라기 보다는 소진되어버리지 않으려는 교사들의 절규라고 할 수 있다. 즉 교사들이 소진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직무와 자원을 재구성한 잡 크래프팅이라고 할 수 있다.


혁신학교 운동이 일어난 학교는 한시적으로 학교의 주도권을 학교장이 아니라 혁신에 나선 교사들이 쥘 수 있으며, 요구와 권한의 균형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이는 요구권한 모형에서 소진요인을 저감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리하여 혁신학교 교사들은 오히려 일반학교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진 대신 재생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사례들은 교사소진과 그 해결이 개인적,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 제도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오늘날 교사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줄어들 수는 없다. 그렇다면 교사의 정당한 권한과 보상을 확대하고, 교사들이 늘어난 요구에 부응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직무 자원을 늘리거나 직무를 재구성하지 않으면 그 어떤 심리적인 치료도 무용지물일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교사가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되는 교육개혁, 학교 개조, 그리고 그 바탕을 이루는 학교의 민주적 공동체화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다.


유튜브 권교사 채널의 열린 연수원에서 이 내용에 대한 강의 영상을 찾아보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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