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장편소설 디누 1부 38회 디누의 베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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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만년필이 멈추었다. 잉크가 다 말라버린 것이다. 움푹 들어간 나의 중지 첫째 마디는 조금씩 흘러나온 잉크가 묻었는지 마치 자동차 문틀에 찍혀 멍든 것처럼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정우가 손가락을 다쳤을 때 느낌이 이랬을까? 나는 버썩 겁이 나 더 이상 글자를 쓸 수 없었다.
펜을 내려놓고 글씨로 가득한 공책을 거꾸로 넘겨보았다. 벌써 스무 쪽이 넘는 종이가 문자의 세례를 받아 검게 얼룩져 있었다. 앉은 자리에서 펜 글씨로 스무 쪽을 그대로 휘갈긴 것이다. 잉크가 다 떨어졌는지 모를 정도로, 손가락이 패여 아플 정도로.
정우가 세상을 떠난 것이 서른 다섯, 아녜스와 공연이 재앙이 되어버린 것이 열 여섯 때의 일이다. 그러니 내가 방금 쓴 부분은 그의 삶의 절반 지점에 해당된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는데 거기서 다시 반을 갔다면 이제 다 간 것일까?
문제는 여기서부터 정우의 인생이 그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바뀌었다는 것이다. 나의 기억만으로도 상당부분 채워 넣을 수 있었던 어린 시절과 달리 내가 정우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형편없이 줄어들어 버렸다.
그래도 일단 공책을 펼쳐 놓고 열 여섯 이후 정우의 삶을 일단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정리해 보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써야 할지, 그리고 어느 시기를 집중적으로 조명해야 할지 판단해야 했다.
1984년을 계기로 내가 정우 인생에서 그리 중요한 인물이 아니게 되었다는 한계가 자꾸 발목을 잡았다. 결국 나는 어린 시절의 증인으로서나 가치가 있을 뿐,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이라는 것은 그저 명목뿐인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이후 정우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누구보다도 지네트의 입을 열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나는 초조함에 사로잡혔다.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벌써 3년이 지났다. 내 나이도 어느새 마흔을 넘었다. 그런데 아직도 나는 깜박이는 커서만 바라보며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초고 뭉터기나 남기고 있었다.
만약 이후로도 10년 넘는 시간을 더 바쳐야 겨우 완성할 줄 알았더라면 마음이 훨씬 편하거나 바로 그 때 접어 버리던가 했겠지만 나는 설마 정우 일대기 쓰는 일에 내 장년기를 모두 바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1년에 책 두 세 권 정도는 쉽게 써내는 내가 3년이 지나도록 얼개조차 제대로 못 잡고 있다는 사실에 그저 화가 날 뿐이었다.
여기서 더 늦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에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타이페이에서 만났을 때 지네트는 정우 인생의 중요한 전기가 로마에서 일어났고, 로마 이야기는 로마에서 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차일 피일 미루다 3년이 지났다. 나는 로마에 가야 했고, 지네트와 로마에서 만나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런던에서 유선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 사이에 유선은 디누 재단 이사장 자리를 정우의 애제자 최수민에게 넘기고 로사, 마리 교육에 전념하느라 한국에 거의 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쓴 소설 초고를 두 사람에게 모두 보내 먼저 읽어보게 하였다. 기왕 로마 가는 김에 앞으로 로마에 올 기회가 또 있을까 싶어, 아내와 예니도 함께 갔다.
여름 방학기간에 로마를 여행한다는 것은 줄서기 연습에 불과하다는 교훈을 얻었지만, 모처럼 휴가를 즐기는 아내는 기분이 좋아 보였고, 예니는 친구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생겨서 더욱 즐거워했다. 다만 햇빛을 싫어하고, 미술에도 별 관심이 없는 나는 머리와 등판이 뜨거워 생각보다 괴로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래도 판테온은 인상적이었다. 비록 어마어마한 인파에 밀려 다녀야 했지만, 문자 그대로 모든 신, 어떤 신이라도 거할 것 같은 그런 장소, 시간만 된다면 며칠이고 머무르고 싶은 그런 장소였다.
마침 지네트와 만나기로 한 곳이 판테온에서 멀지 않은 나보나 광장이라 가족들 먼저 숙소로 보내고 느긋하게 걸어 가기로 했다. 여덟 시가 넘은 시간이라 그런지 뜨거운 여름이었지만 바람만 불어도 제법 서늘했다.
곳곳에 등불이 켜지면서 나보나 광장이 낮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넵튠 분수가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레스토랑 야외석에 먼저 자리 잡은 지네트의 모습이 보였다.
로마의 유명 관광지 레스토랑의 테라스 자리는 나 같은 서민은 메뉴판도 감피 펼쳐 볼 엄두도 나지 않는 곳이지만 지네트는 부자니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지네트는 검소하고 편안한 단색의 원피스와 굽 없는 샌들 차림으로 보는 사람마저 편안하게 느껴지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절반쯤 마신 와인 잔, 그리고 내가 먼저 보내주었던 초고가 놓여 있었다.
“어서 오세요. 좀 먼저 왔어요. 이거 좀 읽느라.”
지네트가 살짝 손을 들어 나를 맞이했다. 이것이야 말로 이 소설을 쓰면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이었다. 이렇게 로마의 레스토랑 테라스 석에서 지네트와 마주 앉는 일은 예전 같으면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이니 말이다.
“조금 더 기다려 주실래요? 얼마 안 남았는데 마저 읽게?”
“물론입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지네트가 마저 다 읽기 기다렸다.
“아, 이랬던 거군요. 이제야 모든 게 다 이해되네요.”
마침내 지네트가 꼼꼼히 읽고 있던 내 초고를 덮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보나 광장의 시원한 바람이 낮 동안 더웠던 로마의 낮을 씻어 내며 지나갔고, 지네트와 머리칼과 내 원고 뭉치도 흩날리게 만들었다.
“제 원고를 너무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시지는 마세요.”
“충분히 감안하고 봤답니다. 아녜스는 너무 매력적이라 만나면 다 아녜스 편이 되는 거.”
“그런데 뭐가 이제야 이해되신다는 거죠?”
“디누가 아녜스랑 듀오 결성하고 활동하던 시절의 프로그램 선곡 말이죠. 사람들은 아녜스가 가볍고 밝은 곡이나 연주할 수 있는 기교쟁이라고 폄하했지만, 난 아녜스를 고작 그 정도로 보지 않았거든요.”
“뜻밖이네요? 아녜스 무시하는 줄 알았는데.”
“나랑 아녜스를 자꾸 비교하고 싸움 붙이려 한 건 다른 사람들이죠. 우린 친구사이였다고요. 우리가 캘러니안 선생님 클래스에서 같이 공부했던 거 아시죠?”
“아녜스한테 들었습니다.”
“그때 서로 자극도 되고 도움도 되고 하면서 친하게 지냈어요. 나중에 사이가 좀 틀어져서 그렇지.”
“어쩌다 사이가 틀어졌나요?”
“다 디누 때문이죠. 미우&디누가 해체된다는 소식을 듣고 디누와 파트너가 되고 싶었던 건 아녜스 뿐이 아니었거든요. 당연히 저도 눈독(?) 들이고 있었죠. 그런데 아녜스가 나한테 말도 안하고 너무 여우같이 쏙 빼가서 빈정이 좀 상했거든요. 친구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리고 정작 디누를 가로채고 나서 연주하는 프로그램 때문에 더 화가 났죠.”
“프로그램이 좀 그랬죠?”
“그러게요? 이런 가벼운 곡들 반주하는데 무슨 디누 씩이나 필요해요? 화가 났죠. 그래서 좀 심한 말로 쏘아붙였어요. 그래도 아녜스가 저 보다 언닌데, 너무 심하긴 했죠. 그러다 그 말 한 마디가 일파만파가 되고, 결국 원수가 되더라고요. 이거 읽어보니 내가 오해했네요. 두 사람 이미 사귀고 있었어. 브뤼셀에서 둘이 춤추고 키스하고. 호호. 어린 것들이. 어쩜 난 그것도 모르고. 게다가 디누 손가락이 그때부터 벌써 아팠네요. 그래서 다 나을 때까지 그냥 건반 뚱, 뚱 두드리는 수준의 연주만 하면서 버텼던 거네요. 그걸 아녜스가 화려한 곡 연주해서 커버해주고. 어떻게 해. 눈물 나오려 해. 아녜스한테 너무 미안해요.”
“유선이는 아녜스를 마냥 착하게만 해석하지는 않던데요?”
“유선이는 아녜스를 나만큼 알지 못해요. 그저 예쁘고, 영리하고 영악하고, 이기적이다 이렇게만 알고 있겠죠.”
“맞아요. 딱 그렇게 말했어요.”
“아녜스한테 그런 면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아녜스한테 유선이에 대해 설명하라고 하면 똑 같이 대답할 걸요?”
“음. 그 부분은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아녜스도 유선이도 아무리 디누를 사랑해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걸고 완전히 헌신할 그런 순정파는 아니죠. 특히 아녜스는. 그건 아녜스답지 않죠. 그게 문제였을 거에요. 자기 답지 않은 시간이 너무 오래갔다는 것. 디누가 회복되길 기다리다 아녜스 커리어에 문제가 생긴 거죠.
디누를 파트너로 맞이하고 저런 곡 밖에 연주 안하는 것 보니, 아녜스가 성장 한계에 부딪쳤다, 신동에서 어른이 되려 하지 않는다, 음악성이 모자란다, 차라리 연예인이 되어라, 그럴 거면 디누는 미우에게 돌아줘라 등등의 소리가 들렸겠죠.”
“맞아요. 그때 정우가 재능을 낭비하지 말고 독주로 나서던가 아니면 아녜스와 결별하고 지네트와 같이 연주해야 한다는 얘기도 막 나왔어요.”
“아녜스가 얼마나 억울하고 속상했겠어요? 안 먹을 욕도 먹고, 성장할 타이밍도 놓치고. 욕심 많은 아녜스가 그걸 그냥 두고 볼 리 없죠. 디누가 회복되었다 싶으니 제대로 된 프로그램으로 연주하자고 압박했겠죠. 그 결과는 이미 쓰신 바와 같고요. 둘 다 준비가 부족했어요. 디누는 미우와 전혀 스타일이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와 앙상블을 맞춰본 경험이 많지 않았고, 아녜스는 아녜스 대로 무겁고 진지한 곡을 연주한 경험이 많지 않았고. 한 사람은 미우의 기억에 사로잡혀, 한 사람은 미우 스타일을 너무 의식하다 완전히 망친 거죠.”
“듣고 보니 망칠 만했네요. 그런데 이해 안 되는 건, 어째서 아녜스가 단 한 번 실패로 은퇴해 버렸나 하는 거죠.”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네요. 그냥 아녜스 혼자 간직할 사적인 미스테리로 남겨두심 안 될까요? 어쨌든 지금 잘 나가고 있잖아요? 그 좋은 머리를 꼭 무대에서만 쓰란 법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