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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장편소설 디누 1부 37화 디누의 베일 2

by 권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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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미 교수는 두 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2만원씩이나 하는 비싼 입장권을 샀기 때문에 2층 제일 앞 명당자리였다.

“아니, 박철순 월급이 250만원인데 무슨 어린 애들 연주하는 거 듣자고 2만원씩을 내냐?”

남편의 핀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남편을 떼어 놓고 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세 모녀가 박철순 하루 일당만큼을 털어서 이곳에 온 것이다.

사실 기획사 바가지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대 위에 피아노 한 대만 덩그마니 세워져 있는 것을 보니 더 그랬다.

이윽고 무대 좌측 문이 열리더니 소년과 소녀가 손을 잡고 입장했고, 우레 같은 박수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미 한국에 건너오기 전부터 바이올린을 든 요정이니, 헤베니 하는 말을 들었고, 화장품 광고에까지 출연했던 아녜스인지라 남성 팬들이 적잖이 몰려든 모양, 굵은 목소리의 환성이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하지만 김정미 교수에게 아녜스는 예쁜 소녀라기 보다는 파가니니, 비에냐프스키, 사라사테의 난곡들을 방실방실 웃어가며 너무도 쉽게 연주하는 어린 괴물이었다.

다만 아녜스가 머리에 맨 리본이 마음에 걸렸다. 어린아이로 계속 남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주는 리본. 17세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전형적인 신동 신드롬의 표지 같았다. 어리다는 이유만으로도 주목받았던 신동의 시기가 끝날 때의 초조함, 이제는 성인 예술가로서 주목을 받아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불안에 사로잡혀버리는 신동 신드롬. 얼마나 많은 신동들이 이 시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찬란했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는 평범한 예술가로 전락했던가?

귀여운 악세사리가 신동으로 머무르고 싶은 소망의 반영이라면, 공연 프로그램은 더 이상 신동이 아니라 어른 연주자로서 평가받아야 한다는 초조함의 반영이었다. 그 동안 아녜스가 공연이나 레코딩에서 보여주었던 주요 레파토리와 너무 거리가 먼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생상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

모차르트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B플랫 장조 k454번’

휴식

베토벤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9번 A장조 작품 47

김교수가 기억하고 있는 아녜스의 프로그램은 기교적으로는 어려우면서 정서적으로는 단순하고 경쾌한 곡들이었다. 파가니니, 비에냐프스키, 그리고 비외탕이 주요 레파토리였고, 앵콜곡으로는 어렵기로 유명한 에른스트의 ‘슈베르트 마왕 주제에 의한 카프리치오’를 즐겨 연주했다.

2년 전, 김교수는 아녜스가 이 곡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들고 있던 프로그램을 떨어뜨릴 정도로 놀랐다. 자기도 쩔쩔매는 그 어려운 곡을 마치 스즈끼 연습곡 1번 연주하듯이 스르륵 해치웠던 것이다. 그것도 어린 소녀가 사슴 눈을 뜨고 방실방실 웃으면서.

그런데 오늘 프로그램은 전혀 달랐다. 첫 곡인 생상의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야 딱히 새로울 것도 없었지만, 모차르트나 베토벤은 영 생소했다. 김교수는 그 동안 아녜스가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고전적인 작품을 연주하는 것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요것 봐라. 당돌한 걸?”

김교수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누가 봐도 이 프로그램은 미우를 겨냥한 것이 분명했다. 같은 곡을 같은 피아니스트와 연주할테니, 객관적으로 미우와 비교해 달라는 선언, 아이돌이 아니라 미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진지한 음악가로 봐 달라는 항의.

누가 이 선곡을 주도했을까? 두 사람 모두 그럴 동기가 있었다. 디누에게는 자신이 누나의 후광 때문에 명성을 얻은 것이 아님을 증명할 동기가 있었다. 그래서 음악성에서 미우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아녜스와 함께 연주함으로써 당당하게 자신의 역할을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선배, 이거 좀 봐요, 미우랑 붙어 보겠다는데요, 아녜스가?”

김교수 뒷자리에 앉아있던 Y예술 고등학교 바이올린 주임이자 김교수의 대학 후배인 이남진 선생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용감하긴 하네요. 이렇게 뻔하게 알려진 곡들 연주해서 잘한다 말 듣기 어려울텐데. 명반도 많고, 대가도 많으니, 두드러진 연주가 정말 어렵죠. 그만큼 연구도 많이 해야 하고.”

이남진 선생의 말에 김교수 역시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널리 알려져 있으면서, 비전문가의 귀에도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그런 이른바 명곡들을 연주할 때의 부담을 잘 알기 때문이다.

복잡한 곡일수록 대중에게 잘하는 것처럼 들리게 하기 쉽다. 반면 진정한 대가의 성취는 단순한 곡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그뤼미오는 단지 ‘A’ 소리 하나 내는 것으로도 자신의 내공을 드러낼 수 있었다고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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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형편없는 연주회였어. 2만원씩이나 내고 온 사람들 정말 화 날 거야. 아, 그게 나네.”

김정미 교수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차선생에게 한 마디 던졌다.

“자, 차선생도 화났으면 맥주나 한잔해. 내가 낼게. 이런 날 그냥 들어가기 아쉽잖아?”

“아유, 교수님도 참. 애들은요?”

“뭐, 별 문제없어. 얘 나경아.”

김교수가 나경의 손에 만원짜리 지폐를 들려주었다.

“동생 데리고 택시타고 집에 가.”

“이 밤중에 과년한 딸 둘더러 알아서 집에 가라고?”

“어머머, 순진한척 하긴. 너, 보충 수업한다, 독서실 간다 거짓말하면서 밤에 시내 쏴돌아 다니는 거 모를 줄 아니?”

“아니, 엄마는 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하고 있었던 거야? 이럴 때 써먹으려고? 정말 치사하다.”

“아니, 이 녀석이?”

“둘 다 그만.”

어느새 나타난 유선이 말했다.

“아빠가 차 가지고 곧 오실거야.”

“어머, 어떻게 알고?”

“내가 집에서 나올 때 아빠한테 공연 끝나는 시간 알려주고 차 가지고 나와 달라고 했어.”

“어휴, 이 여우.”

김교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자, 언니.” 유선이 엄마를 노려보고 있는 나경의 팔을 잡아 끌었다. “어른들은 놀게 두고 청소년은 일찍 귀가하자. 웬디스에 가 있으면 아빠 올 거야. 이미 받은 택시비는 환불 불가. 이걸로 맛있는 거 사먹자.”

“그래. 좋아.”

나경이 얼굴을 풀고, 동생을 따라 광화문 사거리쪽으로 갔다. 딸들이 웬디스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김교수가 차선생의 팔을 잡았다.

“자, 그럼 우리도 한잔하러 가지?”

“선배, 지금 나 따돌린거야?”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두 여성이 뒤를 돌아보다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이남진 선생이 투덜거리며 서 있었던 것이다.

“어머,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 학교 출신인 차선생이 황급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래. 남진아. 가자. 그런데, 야, 이거 차선생 오늘 술 맛 나겠어? 고등학교 때 선생, 대학교 때 선생 다 모시고?”

“무슨 말씀이세요? 오히려 제가 모셔야죠.”

그들은 이런저런 영양가 없는 인사말을 주고받은 뒤 코리아나 호텔에 있는 라운지 바로 들어갔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네.”

김교수가 말문을 열었다.

“아녜스 실체가 드러난 거죠.”

차선생이 가볍게 대답했다.

“실체?”

“예쁜 얼굴, 캘러니언의 후광, 그리고 델 제수라는 껍질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적나라한 모습.”

확실히 아직 젊어서 그런지 차선생의 말은 거침없었다. 그러나 세월이라는 약을 충분히 먹은 두 스승은 말을 아꼈다.

“공연 한 번 망쳤다고 단적으로 평가하긴 어렵지 않을까? 어쨌든 아녜스가 기술적으로 거의 완벽한 것은 분명하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김교수의 말을 이선생이 받았다.

“아녜스는 테크닉이 완벽해. 문제는 해석인데, 그건 선생한테 배워야 하는 거야. 그 동안은 전에 배웠던 곡들 가지고 공연 해서 문제가 없었지만, 오늘은 그런 준비 없이 연주했지. 모차르트, 베토벤은 공부가 많이 필요한데 악보대로 연주한다고 될 일이 아니지. 흔히 음악성, 음악성 하지만, 그건 재능이 아니야. 심사숙고와 치밀한 분석의 결과지.”

“그럼 선생님은 아녜스 장래가 아직 있다고 보시는거네요?”

“물론이지. 곡 분석, 해석은 우리도 얼마나 많이 해? 그런데 문제는 해석을 아무리 잘 해도 손가락이 못 따라가는 거 아니겠어? 아녜스는 아주 정밀하게 악기를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있어. 어떤 해석도 다 실제 소리로 만들어낼 수 있단 뜻이지. 기술이 있으면 해석은 나중에 배워서 얹을 수 있지만, 해석이 아무리 훌륭해도 기술이 안되어 있으면 그냥 꽝이라고.”

“그건 그렇지가 않아.”

김교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선생 말대로라면 아녜스는 평생 남 해석한대로 연주하는 로봇이게? 미우는 어땠어? 이 선생은 그 학교 학생이라고 작품 해석을 미우한테 가르쳐 준 적 있나? 아 있겠지. 수업시간에. 하지만 미우가 가르쳐 준대로 연주했나? 이선생은 미우가 연습하는 악보 본 적 있지? 거기에 수업시간에 가르쳐준 게 기록되어 있던가?”

“수업은 무슨. 미우는 고등학교 때 학교 나온 날 보다 안 나온 날이 더 많았는데. 2학년 1학기 까지는 내내 콩쿠르 돌아다니거나 연주회 하러 다니고, 2학년 2학기 땐 프랑스 가서 헨릭 셰링 문하에서 생활했고, 3학년 땐 또 연주회 다니고. 얼굴도 몇 번 못 봤다니까. 그래도 미우가 연습할 때 악보가 아주 깨끗했다는 건 기억나네. 정말 악보에 아무런 표시도, 글자도 안 적혀 있었으니.”

“어머, 정말요? 하지만 미우 연주는 작품 해석이 독특하고 나이에 비해 아주 심오하다고들 했잖아요? 그런데 악보 공부한 흔적이 없다고요?”

“그러니까” 김교수가 결론을 내렸다. “작품 해석 능력이니 음악성이니 하는 것 역시 공부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거야. 기술이야 연습을 죽도록 하면 도달할 수 있지만, 음악성은 타고 나는 거야. 그러니 아녜스는 여기까지가 전부야. 이제 스무 살, 서른 살 나이 먹어 가면 그 전에는 한참 쳐져 있던 또래 연주자들도 기술이 완성될 것이고, 그럼 아녜스의 장점은 두드러지지 않고, 단점만 두드러지는 거지. 한 5년은 가겠지. 워낙 예쁘니까. 하지만 더 지나면 사람들이 그럴 거야. 저 나이에 저 정도 곡 연주 못해서야 어디 프로야? 또 5년이 지나면 아니, 델 제수까지 가지고서 겨우 그 정도야? 그러다 예쁜 얼굴에 주름 생기면 그걸로 끝이야.”

“그럼 오늘 연주는” 차선생이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을 하며물었다. “아녜스가 악보 공부가 부족한 상태에서 고전 작품에 너무 쉽게 달려들어서 밑천이 드러난 결과인가요?”

“그것보다. 더 나빠.” 김교수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차라리 공부 없는 상태에서 연주하면 망치지는 않아. 문제는 공부가 훌륭하게 된 사람하고 같이 연주해서 공부 안된 티가 너무 났다는 거지. 차라리 적당한 반주자를 골랐으면 적당히 끝났을 텐데, 하필 디누야. 명색이 바이올린 소나타인데, 피아노에 방해되니까 바이올린 좀 치웠으면 좋겠다고 느껴지더라고.”

“아,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 피아노 소리밖에 안 들리네, 바이올린은 어디 갔지? 이런 생각.”

“디누가 원래 모차르트, 베토벤 같은 고전 곡들에 대해서는 공부가 엄청나게 잘되어 있는 아이야.”

“그런데 김 선배” 이 선생이 무릎을 탁쳤다. “디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난 미우의 깨끗한 악보 비밀을 알아.”

“어머, 정말요?”

“나도 궁금한 걸?”

“새까맸어.”

“뭐가? 스무고개 하지 마.”

“디누 악보가 새까맸다고.”

“아, 디누 악보가!”

“음표랑 메모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새까맸다고.”

“아, 그렇구나.”

김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가 디누와 제대로 된 2중주를 할 수 있을까요? 기성 바이올리니스트 말고, 신세대 중에서?”

“그거야, 아무래도, 미우는 디누랑 듀엣 안한다고 했으니까. 역시...지네트.”

“아무래도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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