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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소설 디누 1부 35화

by 권재원

“선배, 혹시 아녜스 사랑해?”

최유선의 직설법. 설마 이 정도로 훅 들어올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최유선의 단도직입보다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자신에 대해 놀랐다. 그 기세에 눌린 것인지 아니면 정말 내 마음에 그런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었기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왜 그런 식으로 물어?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는데?”

“지금까지 써 놓은 걸 읽어보니 앞의 절반은 미우 언니 이야기, 뒤의 절반은 아녜스 이야기네. 그리고 이 이야기의 결론은 미우 언니는 자기 동생의 어려운 처지도 못 알아채고 화만 내는 답답한 누나, 아녜스는 자기를 희생해가며 디누를 보살펴 준 천사네?”

유선이 계속 내 원고를 넘겨가며 말했다.

“아녜스 몇 번 만나더니 이거 순 페어리 테일이잖아? 천재 소년 디누는 나쁜 마법에 걸려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푸른 요정 아녜스가 그를 보살펴 주었고 마침내 일 년 뒤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푸른 요정은 자기 일을 다 마치자 홀연히 바다 건너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페어리 테일?”

유선의 냉소적인 빈정거림에 나도 화가 치밀어 올라 똑같이 응수했다.

“그럼 이렇게 쓸까? 요정은 떠나고 디누는 지네트 여신을 만났지만 참된 행복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 디누는 최유선을 만나 결혼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해필리 에버 애프터. 이렇게? 그걸 원해?”

“아스퍼거스라도 걸렸어?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잖아?”

“네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니까 그러잖아? 정우의 어린 시절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게 나, 누나 다음으로는 아녜스인 게 사실이잖아? 취리히에서 정우 손가락 다쳤다는 것만 봐도, 오직 아녜스와 지히발만 알고 있었지.”

“그건 인정. 아녜스만 알고 있었네. 한 동안 아녜스와 가벼운 곡 연주하고 다닌 까닭도 이제야 알았네.”

직설적이고 당돌하지만 아닌 것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물러설 줄 아는 시원한 성격의 최유선답게 이내 말투가 누그러졌다.

“하지만 내가 의심하는 건.”

유선이 다시 눈꼬리를 치켜 올렸다. 머리 좋기로 유명한 아녜스의 말을 의심하는 역시 머리 좋기로 유명한 최유선이라.

내 입장이 참 애매했다. 그저 바라볼 수밖에.

“선배도 알지만 디누가 자기 아프고 힘든 거 안 드러내잖아. 자존심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 걱정할까 봐 배려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건재하다고 허세를 부렸으면 부렸지.”

“그건 그래. 엠티 가서 과열된 전기 장판에 발뒤꿈치 데었는데, 같이 산에 올라갔다 내려올 때까지도 전혀 몰랐으니까. 하산하고 사우나 가자고 하니까 말하더군. 화상 입어서 못 간다고. 정말 지독한 녀석이었지.”

“그렇죠? 그렇다면 피아니스트한테 손가락 아픈 건 발에 화상 입은 거랑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심각한 건데, 더더욱 숨기려 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상대가 사랑하는 여자였다면.”

유선의 말이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자 유선이 마치 마지막에 추리 결과를 발표하는 명탐정처럼 조목조목 추론을 늘어놓았다.

“일단 디누가 취리히에서 손가락 다친 건 사실. 이후 1년간 공식적인 독주회를 하지 않은 까닭을 설명해 주니까. 아녜스가 베른과 취리히 두 곳에 숙소를 마련하고 디누와 만난 것도, 같이 스파 가서 놀았던 것도 사실일 거고.

다만 아녜스가 아픈 디누를 생각해서 가자고 한 게 아니라 디누가 아픈 걸 감추기 위해 허장성세로 갔을 거야. ‘결선은 무슨 결선? 리조트에서 릴랙스 하면서 푹 쉬다가 상큼한 마음으로 가서 연주하는 거야’ 이러면서. 무슨 손가락을 꼭 쥐고 밤을 지새우고 어쩌구 하는 건 너무 유치한 소설이고.

아녜스가 냉담하게 악보만 보는 디누 때문에 실망해서 펑펑 울었다는 것, 그건 틀림없는 사실. 나도 그렇게 펑펑 울었으니까.”

“맙소사, 네가 울었다고?”

“왜 놀래? 내가 울어서 아니면 그 사람이 나를 울려서?”

“정우가 매정한 놈이란 건 나도 잘 알지만, 그렇다고 천하의 최유선까지 울렸을 줄은 몰랐거든.”

“선배. 나도 여자랍니다.”

“하지만 아주 강한 여자지.”

“뭐, 그렇죠. 그래요. 쉽게 울진 않아. 그럴 줄 알고 결혼한 거였고. 디누는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음악 생각만 했고, 음악 이야기만 했지. 연애할 때는 그게 멋있어 보였는데, 결혼하고 나서도 그 사람의 중심이 되지 못하는 상황은 정말 힘들더라. 자존심도 망가지고.

디누가 남편으로서 할 일을 안한 건 아니야. 굳이 따지면 보통 남편들 보다는 훨씬 잘해 준 편이지. 하지만 모든 게 계획적이라, 하루에 두 시간 정도를 아내를 위해 썼으니 나머지 시간은 음악을 위해 쓰겠다, 이런 식. 나한테 할당된 시간이 끝나면 타이머처럼 일 초도 어기지 않고 음악을 향해 가버려.

작곡을 하거나 새 악곡 연구할 때는 비상계엄. 근처에 부시럭 소리만 내도 불같이 화를 내거나 조용한 장소를 찾는다며 확 나가 버리니까. 빨래 소리도 설거지 소리도 심지어는 양치질 소리에도 화를 냈어. 어떨 때는 근처 호텔 사우나에 가서 화장실 가고 샤워도, 양치도 다 해야 했어. 안 그러면 디누가 나가버리니까.”

“그렇게까지나?”

“어디 그 뿐인 줄 알아? 나는 디누와 같이 자지도 못했어.”

“무슨 소리야? 그럼 쌍둥이는 어떻게 만들었어?”

“아, 잠자리에 같이 눕긴 했지. 하지만 늘 나만 잤어. 자는 모습을 못 봤으니까. 밤늦게까지 악보를 쓰거나 읽거나 아니면 음악을 듣거나 하다 내가 잠들고 한참 뒤에야 누웠고, 내가 깨기 한참 전에 일어나 밤에 하고 있던 작업을 계속하고. 나는 디누 일하는 모습 보고 잠들었다가, 일하고 있는 모습 보며 일어났어. 심지어 섹스 후에도 잠시 누워있다 벌떡 일어나 책상이나 피아노로 달려갔다니까. 권태기 부부가 아니라 신혼 첫 석 달의 풍경이 이랬다고. 눈물 안 나게 생겼어?”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그럴 거면 결혼은 왜 했대?”

“나도 딱 그렇게 따졌죠. 그럼 돌아오는 대답은 ‘뭐 저런 속물이 다 있나, 나는 네가 예술가라고 생각해서 함께 한 건데, 뭇 여인네에 불과했단 말인가?’ 라고 말하는 듯한 경멸에 가득한 눈빛이었어. 그 눈빛 지금도 소름 끼쳐.”

“그 정도였을 줄은 몰랐어.”

나는 노동자, 빈민, 청소년, 그리고 내전으로 황폐해진 보스니아와 아프리카 주민들에게까지 아낌없이 펼쳐졌던 그의 자비심이 정작 바로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싸늘하게 막혀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는 타임지에서 붙여 준 별명, ‘건반 위의 체 게바라’ 이름에 걸 맞는 것이 아니었다. 집에서 정우는 변덕스러운 폭군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체 게바라도 자기 가족에겐 그랬을지 모를 일이지만.

“워낙 젊어서 결혼 했잖아? 나중에 좀 나아지지 않았어?”

도리어 내가 유선을 위로해 주었다. 그러나 유선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웬걸? 로사, 마리 낳고 나서는 애들 울고 시끄럽다면서 아예 마스터클래스에서 살다시피 했는 걸? 그래도 가족 챙겨준다는 의무감은 있어서 수요일하고 금요일 저녁에 꼭 일찍 들어와서 같이 외식도 하고 놀이동산도 가고 그랬죠. 그 대신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은 음악을 위해 완전히 할애했고, 화요일은 이런 저런 시민운동단체들과 약속으로 늦고. 나중에는 눈물도 안 나왔어. 어차피 나도 내 활동하면 되는 거니까.”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하듯 덤덤하게 말 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내 마음은 마치 내가 그런 처지의 신부라도 되는 것처럼 화가 났다. 이런 건 적어도 내 관점에서는 정상적인 결혼생활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나는 지금 내 이야기 상대가 언제나 직설적이고 뒤가 없는 최유선임을 믿고 과감한 질문을 던져 보았다.

“정우도 정우지만 너도 참 그렇다. 어떻게 그런 식으로 10년을 살아? 로사, 마리 때문에 견디고 버틴 거야?”

“쌍둥이야 뭐, 시어머니가 거의 다 키우셨는걸. 이혼 생각? 당연히 했지. 너무 밉고, 화도 나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고. 하지만 그 사람 연주를 들으면, 또 그 사람이 써 놓은 악보를 보면 도저히 미워할 수 없어. 아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

너무 역설적이죠? 그 사람은 온통 음악에만 마음을 주었고, 그 때문에 나는 상처받았지만, 음악 때문에 미워할 수가 없고. 이러니 도리 없죠.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게다가 아, 정말 이런 말 하는 거 솔직히 너무 부끄럽지만, 이것도 컸는데, 나는 디누의 아내라는 지위를 놓고 싶지 않았어.”

유선은 여기까지 말하고 딱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 정도로 충분했다. 역시 핵심은 마지막 줄에 있었던 것이다.

20대에 교수가 되고, 30대에 런던 로열 오페라의 음악 부감독이 되고,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고음악 학회의 교수를 역임한 최유선의 화려한 경력. 물론 유선이 오르간, 하프시코드, 포르테피아노 연주나 음악 문헌학에서나 탁월하기도 했지만, 디누의 아내라는 지위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유선에게 두 번 놀랐다. 그 오랜 세월 깊숙하게 숨겨두었던 마음을 이렇게까지 드러내 보인 것에 놀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상심을 유지한 체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이 속물적이었다고 냉정한 평가까지 내리는 것에 더더욱 놀랐다.

나는 일단 입은 벌렸지만 뭔가 나오려던 소리를 목구멍 위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불규칙한 호흡 소리만 몇 번 그르릉거리며 내고 말았다. 그때 유선이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선배 솔직히 말해. 내가 아녜스 질투한다고 생각했죠?”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나는 얼떨결에 손을 내저으며 부인했다. 물론 그런 식의 부인은 차라리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만 못했다. 유선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피식 웃고 말았으니 말이다.

“숨기지 마. 괜찮으니까.”

“숨기는 게 아니라...”

유선이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대며 더 이상의 변명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엄한 얼굴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내 입이 완전히 다물어지기를 확인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내 입술을 한동안 더 노려보더니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기왕 얘기 나왔으니까 분명히 할 게. 나는 아녜스 상대로 질투한 적 없어. 내가 아녜스 싫어한 건 싫어한 거고, 질투는 달라. 나는 디누가 아녜스 아닌 그 어떤 여성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더라도 질투하지 않았을 거야. 진짜 질투해야 할 대상은 다른 여자가 아니라 음악이었고, 민주주의니, 민중이니, 평화니, 그런 것들이었으니까. 나중에는 예수까지. 그러니 아녜스야 뭐.”

“충분히 이해해. 그래도 내가 아녜스 인터뷰하는 걸 너무 신경쓰는 것 같아서 좀 이상하긴 했어. 왜 아녜스에 대해서만 저렇게 신경쓸까?”

“내가 선배보다 아녜스를 잘 아니까. 아녜스와 지네트가 그 사람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건 분명해. 그런데 두 사람 다 솔직하지 않아. 지네트는 디누와의 관계를 감추고 아녜스는 과장하거든. 그런데 선배는 감추려는 지네트는 추궁해서 털어놓게 만들면서 과장하는 아녜스가 하는 말은 그대로 옮겨 적었어. 그래서 혹시 선배가 아녜스한테 빠져든 게 아닐까 의심했어. 선배 탓은 아니야. 아녜스가 남자한테 얼마나 매혹적인지 나도 알거든. 자, 이거 좀 봐. 이 사진 한 장에 아녜스와 디누 관계의 본질이 나와 있어.”

유선이 컬러로 출력된 종이 한 장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20년도 더 지난 TV광고 스틸 컷을 확대 인쇄한 사진이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상투적인 장면들의 조잡한 조합이었다. 물안개가 펼쳐진 호수, 안개 너머로 산봉우리들이 은근하게 실루엣을 보여주는 수묵화 풍의 풍경, 심지어 그 풍경을 배경으로 여유롭게 떠가는 배 한 척까지. 게다가 그 배도 베네치아에 있어야 어울릴 것 같은 곤돌라였다. 엉뚱하게 웬 곤돌라?

곤돌라 위에서는 델피의 여신관, 아니면 이사도라 덩컨 같은 차림의 아녜스가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고, 일리아드 삽화의 파리스 같은 복장을 한 정우가 노를 저으면서 기쁨에 가득 찬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진은 뭘 보여주려는 것이었을까? 헬레나와 파리스? 다프니스와 클로에?

그 알량한 신화적 상상력을 깨뜨리기라도 하려는 듯 정우가 젓고 있는 곤돌라가 만들어 낸 물결을 따라 굼실굼실 인쇄된 ‘피부, 부드럽게 감싸주고, 상큼하게 깨워주세요. 아이바 투웨이 케이크’ 라는 카피 문구가 눈에 확 들어왔다. 카피 문구 못지않게 그 문구가 인쇄된 글꼴도 촌스럽기 그지없어, 우리나라가 1980년대에는 개발도상국에 불과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촌스러운 광고가 내 눈을 붙잡았다. 단종은 물론이려니와 제조사마저 오래 전에 파산한 그 화장품을 사고 싶다는 욕구까지 불러 일으켰다. 이건 순전히 아녜스와 정우 커플의 매력 때문이었다.

비록 오래된 자료라 가로줄, 세로줄이 죽죽 나 있었지만 그들에게서는 갓 피어난 꽃봉오리, 갓 빚어낸 생과일 무스 같은 촉촉함이 느껴졌다. 그들을 사진 속에서 끌어내어 곁에 두고 싶다는 욕망이 일어났고, 그 욕망은 곤돌라 물결을 따라 흐르는 아이바 투에이 케이크라는 화장품까지 욕망하게 했다.

나는 기량은 훌륭했지만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보기 어려웠던 아녜스가 10대 소녀 시절에 전 세계 여성 바이올리니스트 중 가장 많은 개런티를 받으며 일 년에 50번 이상 세계 순회공연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이 사진에서 분명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확실히 아녜스는 아이돌이었다.

그런데 이 사진에서 내 눈을 잡아 끄는 쪽은 아녜스가 아니라 정우였다. 사진으로 다시 만나니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흡입력이 느껴졌다. 신체의 아름다움이 아닌 다른 원천에서 오는 흡입력. 열정의 바람, 자유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 바람과 향기가 이 곤돌라를 따라 저 수평선 너머, 흐릿한 안개 너머로, 속박 없는 세상으로 훨훨 떠나가자고 유혹하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 사람을 유혹하는 존재는 두 종류다. 천사도 유혹하고 악마도 유혹한다.

천사인지 악마인지는 일단 유혹당해 봐야 알겠지. 그래서일까? 사진 속 정우의 얼굴은 보는 각도에 따라 천진난만해 보이기도 영악해보이기도 했다.

나는 정우의 얼굴을 가리고 아녜스만 보이도록 해서 사진을 보았다. 예쁜 사진이긴 하지만 마냥 눈을 붙잡아 두진 않았다. 아녜스는 예쁘고 귀여웠지만 바라보면 흐뭇할 뿐이었다. 이번에는 아녜스를 가리고 사진을 보았다. 정우가 불러일으키는 바람과 향기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아름답거나 매혹적이지는 않았지만 차마 눈길을 떼어놓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사진 속의 정우가 나한테 소리까지 지르고 있었다.

“사표를 내. 그까짓 국가 공무원직에 매여서 작가질을 어떻게 해? 자유를 찾아. 자유를! 너만의 세계를 가져.”

나는 더 이상 그 사진을 보지 못하고 종이를 뒤집었다. 하지만 종이를 뒤집어도 사진 속의 정우는 계속 나를 노려보면서 철밥통을 포기하고 앞날이 불안한 예술가의 길을 선택하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최유선과 헤어지고 집에 들어와서도, 그리고 잠자리에 누워서도 정우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상을 떠난 친구가 그것도 20년 전 모습을 하고 계속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것은 가히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합리주의자인 내가 잠시나마 악령의 존재를 믿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모든 악령은 기억의 억압되어 있던 특정 부분이 왜곡된 형식으로 드러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 악령은 결코 정우가 아니며, 정우와 관련된 어떤 기억일 뿐이다.

그 악령이 타임 워프 스위치라도 눌렀다 보다. 나를 둘러싼 풍경들이 순식간에 24년 전으로 바뀌었다. 정우가 다시 살아나 내 앞에 앉아 있었다. 30대의 정우가 아니라 열다섯 살의 정우. 그 싱싱한 중학교 2학년의 정우. 여기가 대체 어딜까? 국제공항 입국장으로 보이는데 내가 늘 드나들던 인천공항 입국장과는 달랐다.

이제야 기억났다. 아직 더위가 여전했던 9월의 어느 날, 정우는 당시 우리나라의 유일한 국제공항이었던 김포공항으로 나를 끌고 갔다. 왜 가는지, 누굴 마중 나가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지하철 9호선은커녕 3호선도 완공되지 않았고, 삼성동의 도심공항터미널도 공사 중이던 시절이라 역삼동에서 김포공항까지 가는 길은 정말 머나먼 여정이었다.

그 머나먼 여정이 뿜어내는 가벼운 모험의 향기가 없었다면 난 정우가 아무리 애원하고 협박해도 따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인들의 해외여행이 금지되어 있던 시절이라 비행장이 풍기는 신비감과 동경이 너무 매혹적이었던 것이다.

그 신비감은 공항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참혹하게 무너졌다. 매장을 다 들어 낸 백화점 같은 휑한 로비에 전광판 몇 개가 번쩍이고 있었고, 환전을 위한 은행 창구, 음식점 몇 개, 제복 입은 사람들이 삼엄하게 지키는 항공사 카운터가 전부였다.

커다란 고속버스 터미널 같았다. 이만저만한 실망이 아니었다. 전광판들을 한참 쳐다보던 정우마저 눈살을 찌푸리며 뭔가 욕지거리를 내 뱉았다.

“비행기가 두 시간이나 늦게 떴대. 많이 기다려야겠는 걸?”

“그게 뭔 소리야?”

“로스엔젤레스에서 비행기가 두 시간 늦게 출발했으니 김포에도 그 만큼 늦게 도착하겠지. 우린 그 만큼 기다려야 하고.”

느닷없는 이야기지만 덕분에 나는 정우가 여기까지 나를 다짜고짜 끌고 온 까닭이 로스엔젤레스에서 오는 누군가를 마중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두 시간이라고?”

나는 정우의 제멋대로인 행동에 대한 짜증을 비행기한테 털어 넣었다.

“고속버스도 10분만 늦으면 욕을 먹는데, 그 비싼 비행기가 두 시간씩 늦는 게 어딨어?”

순진하게도 나는 교통수단 중 가장 비싼 비행기가 시간도 가장 정확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 비싼 돈을 받고 이렇게 두 시간씩이나 늦어 버리다니, 미국 항공사는 정말 안하무인이군, 아무리 힘이 세도 근본이 오랑캐인 나라라 어쩔 수 없어 따위로 생각이 마구 가지 쳐 나갔다.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시간 맞춰 나갔다가 골탕을 먹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거기 우리가 딱 걸린 것이었다. 우리는 근처 패스트 푸드점으로 들어갔고, 미안했는지 정우가 이것저것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잔뜩 사 들고 왔다. 중2 소년들 기준으로 잔뜩이었으니, 지금 보면 저걸 인간이 다 먹냐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겨우 마음이 풀린 내가 우걱우걱 햄버거를 입에 밀어 넣고 있는데, 정우는 그런 나를 보며 싱긋 웃어 보이더니 가방에서 공책과 악보를 꺼내었다. 또 시작이다. 일단 악보 꺼내 놓고 나면 정우에게 두 시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마 저대로 엉덩이 한번 안 들추고 악보만 읽고 쓰고 할텐데, 두 시간이 아니라 스무 시간이라도 끄떡없이 저대로 있을 태세였다.

그런데 비행기 늦어진다는 소식에 골탕 먹은 사람은 우리 말고도 많이 있었다. 수첩과 펜, 혹은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은 무례하고 안하무인격인 걸음걸이로 삼삼오오 모여들더니 비행기 도착시간을 보고는 일제히 욕지기를 토해내는 것이었다. 행색으로 봐서는 틀림없는 기자들이었다.

그 중 몇몇이 이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리고 악보를 읽고 있는 정우를 흘끔거리며 훑어보더니 확신이 든다는 듯 일제히 우르르 몰려왔다. 몇몇이 사진을 찍어대는 바람에 플래시가 터지고 필름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공기를 흔들었다. 이 소란 통 속에서 악보를 본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아, 씨발, 왜들 그래요?”

정우가 악보를 덮으며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기자들에게 악보 분석 중인 음악가를 배려하기 위해 소란을 삼가는 매너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질문공세가 쏟아졌다. 그 질문 공세들 덕분에 나는 드디어 정우가 누구를 마중 나오기 위해 나까지 끌고 왔는지 알게 되었다.

녀석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느닷없이 일을 벌리고, 절대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번번히 다른 사람 입을 통해 이 녀석이 벌린 일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일에 끌려든 것인지 들었다.

“아녜스를 기다리고 있나요?”

“앞으로 아녜스와 연주활동 할 계획인가요?”

“누나가 돌아오면 어떤 반응일 것 같습니까?”

“아녜스는 한국에 거주할 예정입니까?”

“두 분은 사적으로 특별한 관계인가요?”

“아녜스가 굳이 한국까지 들어오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등등 기자들이 동시에 질문을 던지자 마치 장마 뒤끝 웅덩이에서 개구리들 우짖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정우는 그저 물끄러미 질문이 다 쏟아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녜스와 한 팀으로 연주할 겁니다. 이미 일 년 간의 투어 일정이 다 잡혀 있습니다. 누나하고는 아직 상의한 적 없습니다. 아녜스가 한국에 들어오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아버지 나라이고, 고모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당분간 고모 집에서 지낼 겁니다.”

당연히 기자들은 정우의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다. 특히 정우는 기자들이 가장 흥미로워하는 주제인 아녜스와의 사적인 관계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개구리 떼 소리가 한바탕 더 울려 퍼졌지만 정우는 고집스러운 얼굴로 입을 닫았다.

기자들은 눈치가 빨랐다. 더 이상 대답이 없을 것임을 간파한 듯, 이번에는 우루루 입국장 출입문으로 달려갔다. 이미 입국장 출입문을 아녜스의 팬들이 에워싸기 시작했기 때문에 열성팬과 기자들의 카메라 자리 잡기 쟁탈전이 어지럽게 벌어졌고, 나와 정우에게는 다시 평화가 돌아왔다.

“그러니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짢은 마음 때문인지 생각보다 더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굳이 누르지 않았다. “지금 아녜스 기다리고 있는 거야?”

하지만 정우는 보고 있던 악보에서 눈도 떼지 않고 고개만 까딱할 뿐이었다.

“그런데 아녜스가 이렇게 인기 많았어?”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 조금 신경 쓰였던 나는 살짝 가벼운 말을 던져 보았다. 하지만 역시 정우는 나를 보지 않고 긍정인지 부정인지 가름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개만 대충 움직였다.

“너무한 거 아니야?”

마침내 내 목소리가 거의 최고 수준으로 올라갔다.

“너무 하다니 뭘?”

“어떻게 누나한테 이럴 수 있어?”

“뭔 헛소리야? 너무 하다니? 누나가 뭘?”

그제야 정우가 고개를 들었다.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는 왜 누나를 들먹였을까? 김포공항으로 끌려오면서 혹시 미우가 귀국하는 게 아닐까 기대했는데, 엉뚱하게 아녜스라 분통이 터졌던 모양이었다.

여름방학 내내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정우가 아니라 미우의 부재였다. 정우 혼자 귀국했을 때 너무 노골적으로 실망감을 드러내 정우를 민망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김포공항에 내리는 사람은 미우가 아니다.

웬 엉뚱한 아녜스라니. 나는 졸지에 아녜스 마중 나온 꼴이 되어 몹시 억울했다. 그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화가 났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짜증? 아니면 히스테리?

“신문에서 다 봤어. 너 솔로 연주자로 활동할 거라고 발표 했잖아? 그래서 남매 듀오 해체한다고. 그런데 그 말이 끝나자 마자 아녜스를 불러? 그럼 누나는 뭐가 되는데?”

“헛소리 좀 그만해라. 듀오 접자고 먼저 말한 건 누나잖아? 난 깨지 말자고 빌었고, 너한테도 도와달라고 했잖아? 넌 무조건 누나 편이라 소용없었지.”

정우도 살짝 골이 난 모양 목소리가 높아지고 양 볼이 서서히 붉은 빛을 띄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든 와락 덥칠 수 있는 정우의 공격에 반사적으로 대비했다.

그러나 정우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피식 웃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나의 호르몬 활동은 재빨리 균형을 찾아갔다.

“뭐 상관없어.” 정우가 말했다. “나도 독주 활동할 거야. 하지만 2중주를 접을 생각은 없어. 난 바이올린이랑 같이 연주하는 걸 아주 좋아해. 트리오나 쿼텟은 서로 예의를 갖추고 서로 서로 균형을 맞추는 연주야. 하지만 피아노와 바이올린 듀엣은, 이건 사랑의 연주야.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없으면 안 되는 그런 연주야. 꼭 남녀 간의 사랑만 말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어떻게든 사랑이 있어야 해. 그것도 아주 많이. 그 연주가 잘 되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그 기쁨, 그 행복. 음악뿐 아니라 마음까지 어우러지는 그 하모니. 그걸 포기하라고? 난 못해. 만약 네가 바이올리니스트라면 난 지금 당장 너하고 2중주 하자고 달려 들었을 꺼야. 하지만 넌 할 수 없잖아? 누나는 안한다잖아? 그럼 내가 누구와 함께할 수 있을까?”

“그래서 아녜스야?”

정우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담 뭐.”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정우가 피아노-바이올린 2중주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몰랐다. 음악의 하모니와 사랑의 하모니. 듣기만 해도 나까지 행복해지는 말이었다. 게다가 나도 이미 경험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니까. 미우와 함께 연주했던 비탈리의 샤콘느가 주었던 그 찬란하고 풍만한 행복감이 떠올랐다.

“어, 이제 들어오는 모양이야.” 정우가 술렁거리는 기자들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행기가 예상보다 빨리 왔나봐.”

정우가 마중 나온 사람들. 관광회사 직원들, 기자들로 빙 둘러싸인 입국장 출입문을 가리켰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만 해도 신기한 구경거리였던 자동문이 열리며 큰 트렁크 질질 끄는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외국인 만나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라 하얀 얼굴, 검은 얼굴, 노란 머리, 빨간 머리를 한 각양 각색의 외국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는 재미에 빠져 나는 아녜스를 영접하도록 끌려 나온 언짢음마저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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