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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소설 디누 1부 33화

by 권재원

영상 속의 장소는 아녜스의 취리히 숙소 근방의 카페다.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치고 케잌을 음미하던 정우가 갑자기 개구쟁이처럼 웃는다.

“헤헤, 넷시. 내가 또 사고를 쳤어.”

아녜스가 눈을 크게 뜨고 들고 있던 커피 잔부터 내려놓았다. 정우가 이렇게 개구쟁이 흉내를 낼 때는 십중팔구 뭔가 상식에서 한참 벗어나는 일을 저질렀을 때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녜스의 모습을 보며 정우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결선 연주 곡 바꿨어.”

“또? 1라운드도 아니고 결선에서? 왜?”

“결선 연주 곡 신청하는데, 결선 연주자 다섯 명 중 슈만 협주곡을 세 명이나 신청한 거야. 그리고 쇼팽 하나, 그리크 하나. 그래도 상관은 없지만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지히발 선생님은 썩 내키지는 않는 모양이었어.

‘좀, 다양한 작품을 연주할 수는 없을까요? 결선은 일종의 콘서트입니다. 슈만 협주곡은 정말 아름다운 곡이지만 다섯 분 중 세 분이나 이걸 연주하면 청중도 지루하고 같이 연주할 오케스트라도 지루하고, 지휘를 할 저도 너무 지루하지 않겠어요? 차이코프스키 1번, 라흐마니노프 2번, 바르톡 2번도 지정곡에 있으니 혹시 누구 하실 분 없습니까?’ 이렇게 말할 정도였으니.

물론 농담이었을 거야. 콩쿨 결선에서 어떤 곡을 연주하건 그건 참가자가 정할 일이지 지휘자가 자기가 점수 받을 것도 아닌데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지. 그런데 왜 그랬는지 몰라. ‘제가 슈만 대신 차이코프스키를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해버렸거든.

지히발 선생님이 오히려 깜짝 놀랐지. 그래서 이렇게 나를 달래더라고.

‘저런, 어린 음악가라 너무 마음이 순수하군요. 제 말은 그냥 올해는 슈만 협주곡들을 많이 하네, 그 정도 뜻이랍니다. 바꿀 필요는 없어요. 게다가 디누는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을 연주하려면 아직 몸이 더 자라야 한답니다.’

물론 결선진출자들 중 내가 제일 어리고 또 작았어. 나 다음으로 어린 사람이 나 보다 아홉 살 많았고, 나 다음으로 작은 사람이 나보다 키가 10센티미터나 더 큰 네덜란드 여자였으니까. 하지만 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차이코프스키 1번, 많이 연주해 본 곡이에요.’ 라고 거짓말을 했어. 왜 그랬을것 같아? 너무 해보고 싶었거든. 하도 많이 들어서 음표 하나하나 다 외우고 있었지만 직접 오케스트라랑 연주해 본적도 없거든. 그래서 신청해버렸어.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 좋잖아?”

“정말 할 수 있는 거지?”

“그렇다니까? 이제 악보 구하러 도서관 가야지. 넷시는?”

“난 오늘 밤 베른 갔다가 모레 글피에 올 거야.”

“아 참, 너 2라운드지?”

“응.”

정우는 준비 잘 되고 있냐, 연주 잘 해라 등의 상투적인 인사조차 하지 않았지만 아녜스는 그런 말을 들을거라 기대하고 있지 않았기에 그저 무덤덤했다.

“나 먼저 도서관 갈게. 세 밤 자고 보자.”

정우가 도서관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모습을 한참 쳐다보던 아녜스는 웨이터를 불러 두 사람이 먹고 마신 대가를 지불하고 거스름돈은 받지 않았다.

취리히 역으로 가는 트램에 몸을 실은 아녜스는 그다지 불안하지도 걱정되지도 않았다. 어차피 정우는 취리히 대학 도서관 뒤져서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악보를 구해 올 것이고, 하이든 때와 달리 이미 들어서 소리로 외워 놓은 곡이기 때문에 하루 이틀 정도면 완벽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준비할 테니까.

사흘 뒤, 간신히 베른 콩쿠르 결선에 진출한 아녜스가 다시 취리히로 돌아왔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정우가 방문 앞에 찌그러져 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얼굴이 누렇게 뜬 무기력한 모습. 한때 에어리얼이었던 소년이 칼리반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아녜스가 깜짝 놀라며 일단 정우를 일으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소파 위에 앉혔다.

“왜 그래? 아파?”

그러자 정우가 고개를 끄덕 끄덕 두 번 움직였다.

“어디가 아파?”

그러자 정우 입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한 마디가 대답으로 제출되었다.

“손가락.”

“What the....”

아녜스는 이 한 마디 밖에 더 할 수가 없었다.

피아니스트가 손가락 아프다고 말하는 것은 일반인으로 치자면 “나 암이야” 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일단 손가락 부상이 발생하면 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많이 아파?”

“아니. 그렇지는 않아. 그런데 겁이 나. 금방이라도 많이 아파 질까 봐.”

“디누. 아이, 참...”

아녜스는 정우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속상했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처치를 했다. 그것은 정우의 두 손을 꼭 움켜쥐고 자신의 가슴께로 가져가 따스하게 품어주는 것이었다.

정우의 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여느 때라면 기분 좋은 따스함으로 느껴졌겠지만, 아녜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따스함은 손가락이 붓고 열이 나고 있다는 신호일 가능성이 컸다. 정우는 평소 손이 차가운 편이었기 때문에 아녜스가 데워주는 쪽이었다. 따뜻한 손은 낯설다.

“오른손 약지 두 번째 관절이랑 엄지가 약간 부었어.”

정우가 조금 진정된 모습으로 말했다.

“열도 조금 나는 것 같고, 조금 얼얼한 것 같고, 멍 든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쉬어. 너무 무리하지 마. 결선은 그냥 드롭 해.”

“아니, 그러지 않을 거야. 딱 한 번, 딱 40분만 더 연주하면 되는데 뭐. 그 다음 무조건 쉴래. 오늘도 연습 쉬었어. 내일도 쉴 거고.”

“의사한테 보이긴 했어?”

“응. 류마티즘 같은 건 아니고, 손가락이 너무 무리해서 급성 건초염 온것 같다면서 소염제랑 진통제 처방해줬어. 그러면서 손가락이 쉬어야 한데. 자업자득이지 뭐. 난생 처음 연주해 보는 곡들로 경연하느라 평소보다 연습을 갑절로 했으니. 차이코프스키 협주곡이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어. 3악장 피날레 부분 연습하다 손가락이 건반에 걸려 살짝 삐었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심하네. 하하하.”

정우가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리자, 아녜스는 그만 와락 눈물을 터뜨렸다.

아녜스는 자라면서 울어 본 기억이 없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해 주는 부모 덕분에 울며 보채어본 적도 없고, 신의 축복이라 할 만한 재능 덕분에 뭔가 배우면서 힘들어 울어본 적도 없었다. 그렇게 유쾌하게 종달새처럼 살아왔던 아녜스가 이렇게 며칠을 두고 연거푸 눈물을 터뜨렸다.

“나 자꾸 울게 만들지 마.”

아녜스가 울먹였다.

“자꾸 그러면 너랑 함께 할 수 없어. 난 슬픈 거 싫어. 익숙하지 않아. 불편해. 자꾸 울면 가버릴거야.”

정우는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려고 터뜨린 웃음이 도리어 아녜스를 울리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간혹 아녜스의 흐느낌 소리만 공기를 두드리며 불안한 정적을 이어갔다.

정우는 톨킨이 정의한 엘프의 죽음을 떠올리며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웃음을 잃어버린 아녜스의 모습은 마치 빛을 잃어버린 요정 같았다.

“미안해.”

침묵을 먼저 깬 쪽은 아녜스였다.

“내 멋대로 엉뚱한 상상을 했어. 손가락을 못 쓰게 된 디누가 떠올랐어. 생각만으로도 너무 끔찍해서 눈물이 쏟아졌어. 너무해. 내가 그렇게 걱정하고 무서워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장난처럼 웃어버릴 수 있어?”

“너무 무서웠어. 그래서 웃었어. 안 무서운 척하려고. 너 걱정 안하게 하려고 그랬어.”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내일도 모레도 그냥 쉬어. 그리고 결선도 무리가 간다 싶으면 그냥 쉬어. 넌 천재잖아? 그리고 이제 겨우 열 넷인 걸? 이번에 안 되면 85년에는 쇼팽 콩쿠르가 있잖아?”

“콩쿠르는 됐어. 나 콩쿠르 계속 나간 건 유학 자격 얻고 군 면제 받으려고 한 거야. 그건 바이에른에서 벌써 해결했어. 그래서 멋대로 했어. 등수 상관 안 할 거니까. 서너 곡만 죽도록 연습한 다음 그거 가지고 점수 매기는 거, 너무 짜증나고 지루했거든. 여러 음악을 해보고 싶었어. 게다가 자그마치 지히발 선생님이 지휘하는 취리히 주립 오케스트라야. 이 때 아니면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무대에서 제대로 연주할 기회가 있을까 싶었어.”

“그럼, 결선 나갈 거야?”

“모르겠어. 이틀 놀고 컨디션 봐서 정할 게. 지금은 그냥 무서워. 몇 달, 아니 몇 년 피아노 쉬어야 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그러고 과연 살 수 있을까?”

“걱정 마. 아무 일 없을거야.”

아녜스가 정우의 살짝 굽은 곱슬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일 멋진 곳에 데려가 줄게.”

다음날 그들은 모든 일정을 접었다. 정우는 물론 아녜스도 자신이 베른 콩쿠르 결선 진출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그들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의 도주를 하는 철없는 10대의 모습으로 바트 라가츠에 나타났다. ‘하이디’에서 클라라가 걸을 수 있게 된 기적의 온천이 있는 바로 그곳.

그들은 그랜드 리조트라는 문자 그대로 거대하고 또 값비싼 스파 리조트에서 1박 2일간 느긋한 휴식과 스파를 즐겼다. 즐기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기적처럼 벌떡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된 클라라처럼 정우의 손가락이 생고무 같은 탄력을 되찾기를 기대했다.

여기까지 쓰고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눈 앞에 40대의 아녜스와 리마트 강이 보였다.

“스파가 효험이 있었나요?”

“글쎄요? 스파 효험인지 내 손이 약손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았어요. 산책하고, 스파하고, 잘 먹고, 디누의 손을 꼭 쥐고 잠들었어요. 디누가 잠시도 안 떨어지려 했거든요.”

이런 맹랑한 10대들 같으니. 결국 잠자리에 같이 들었다는 말이잖아? 하지만 나는 걱정과 애정을 가득 담은 아녜스가 정우의 손가락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며 정성껏 쥐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모습 그 이상을 상상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은 에로틱하다기 보다는 간절한 그림이었다.

“하룻밤 자고 나니 디누가 많이 좋아졌어요. 디누 말에 따르면 자갈을 움켜쥐어 모래로 만들 수 있을 만큼.

스파 몇 번 더 하고, 그림 엽서같은 풍경을 즐기며 산책했어요. 저도 디누노 피말리는 콩쿠르 경연에 자글자글 주름 잡혔던 마음이 확 펴졌죠. 디누의 결선 연주는 그 날 저녁이었고, 저의 결선 연주는 다음날이었지만 더 이상 우리 마음에 결선이 차지할 자리는 없었어요.”

“그래서 결선 망쳤나요?”

“글쎄요, 그걸 망쳤다고 해야 할까요? 이틀 동안 연습 한 번 안하고, 심지어 당일 오전까지 스파에 있다 가서 연주했다면 망치는 게 당연하죠? 하지만 디누는 어떤 상황에서도 디누였어요.”

아녜스가 다시 눈을 감았고, 나는 다시 아녜스 머릿속의 영상을 내 머리로 옮겨와 재생시켰다.

브람스가 종종 연주회를 열었던 유서 깊은 콘서트 홀인 취리히 톤 할레 대기실에 정우와 아녜스가 있다. 참가자들의 경직되고 긴장과 한숨으로 공기는 잔뜩 얼어붙었다.

하지만 정우와 아녜스의 얼굴에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결선 진출자들과 강한 대비를 이루는 밝은 빛이 감돌고 있다. 이따금 아녜스가 서투른 한국어로 엉뚱한 말을 하면 정우가 자지러지게 웃는다. 그러는 동안 무대에서 누군가가 연주하는 슈만 피아노 협주곡 A장조의 3악장이 들려온다.

“이 곡 끝나면 디누 차례야. 괜찮겠어?”

“딱 40분인데 뭐. 푹 쉬었으니까. 스파도 하고.”

“그래. 난 디누 믿어. 잘 해. 나 객석 간다.”

“그래. 연주 끝나면 봐.”

아녜스는 애써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앞 참가자 연주가 끝나기 기다렸다가 객석으로 갔다.

“넷시? 내일 결선인데 여긴 웬일이세요?”

“아, 헤어 솅크. 한 시간 거린데요 뭐. 너무 긴장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바트 라가츠에서 스파하고 돌아가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

“마침 잘 되었네요. 아녜스 또래 연주자가 나올 차례니까. 디누 알죠?”

“물론이죠.”

“하이 넷시.”

“하이 맥스.”

아녜스를 알아보는 음악계 인물들이 제법 많이 있어 인사하느라 바쁘다. 아녜스는 그런 사람들하고 인사하고 이야기 나누는 일에 익숙하다. 30대 중견 같은 태연한 모습이다.

지히발이 지휘봉을 힘차게 휘두르자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그 유명한 인트로가 시작되었다. 너무 유명해 팝송처럼 느껴질 정도지만 사실 만만한 곡이 아니다. 더구나 근력이 아직 성인에 미치지 못하는 정우에게는.

정우는 며칠 벼락치기로 연습해 본 결과 자신의 몸이 충분히 여물지 않았음을 절감했다. 머리로는 이 곡을 몇 번씩 찜쪄 먹고도 남았지만 손가락과 손목에 아직 그만큼의 근육과 힘줄이 붙어있지 않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인트로는 멋들어지게 넘어갔다. 하지만 아직 서론도 시작 안한 거다. 진짜 괴로운 부분은 이 곡에서 가장 유명한, 그러나 다시는 나오지 않는 그 인트로가 끝난 다음부터 밑도 끝도 없이 계속 밀려나오는 악절들이다. 카덴짜가 별로 인상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1악장은 피아노 파트 전체가 사실상 카덴짜다. 피아노가 어떻게 연주 하느냐에 따라 유기적이고 잘 짜인 악장이 되기도 하고 산만하고 조악한 악장이 되기도 한다. 과연 정우의 여린 손이 감당할 수 있을지.

그래도 정우는 최선을 다해 그 거친 악절들을 연주해 내었다. 덩치는 작아도 내지르는 소리는 오케스트라에 밀리지 않았고, 여리여리한 손가락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어렵고 때로 지저분하기까지 한 페시지들을 척척 연주해 내었다. 연주자의 기량이 이미 이 곡이 요구하는 수준을 한참 넘어서 있음이 모든 이에게 분명해 보였다.

게다가 자칫 잘못 연주하면 거칠게 들리거나 먹먹하게 들리기 십상인 이 곡에 매끈하고 몽환적인 숨결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마치 차이코프스키가 자신의 상처받기 쉬운 내면과 복잡한 정서를 정우의 손가락을 통해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다. 청중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숨과 탄식을 내 쉬며 그 연주에, 그리고 그 연주가 들려주는 감성의 세계에 공감을 표시했다.

청중은 어린 소년이 쉽지 않은, 그런데 하도 많이 연주하여 뻔하게 들리는 곡을 풍부한 표현으로 참신하게 연주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놀라고 있었다. 하지만 정우가 단 며칠 연습하고 무대에 올라왔다는 것, 상태가 좋지 않은 손가락으로 연주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녜스는 정우가 이렇게 격렬한 연주를 하고서 과연 무사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피아니스트를 고문하는듯한 1악장이 끝났다. 목가적인 2악장이다. 아녜스의 불안감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정우가 느린 칸타빌레 풍의 연주에 가장 큰 강점을 가지고 있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의 서정적인 2악장은 단지 간주곡에 불과할 정도로 짧았다. 평화는 잠시 흔적만을 보여 줄 뿐, 격렬하게 질주하는 3악장으로 내 달려야만 했다. 그나마 짧은 2악장마저 전체가 서정적인 목가가 아니다. 중간에는 전 곡을 통틀어 가장 격렬한 부분이 있다. 정우는 그 부분을 마치 연습곡 치듯 쉽게 두드리며 지나갔다.

마침내 정우는 폭풍처럼 질주하는 3악장에 뛰어들었다. 정우는 다른 연주자보다 훨씬 빠르게 연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렬하다기 보다 리드미컬했고, 정열적이라기 보다 유쾌했다. 당장 객석에서 일어나서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면서 춤이라도 추어야 할 것 같은 그런 연주였다.

그런데 정작 연주하는 정우의 모습은 고요했다. 젊은 피아니스트들이 자주 보여주는 요란한 몸동작과 과장된 표정도 없었고, 눈을 감거나 도취된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진지한 모습으로 지휘자를 바라보았고, 상체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녜스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얼굴에 미소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연주에서 점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마치 잔치판에서 흥겹게 춤을 추던 러시아 농민들이 지대 받으러 오는 영주를 피해 서둘러 잔치판을 접는 느낌이었다.

지휘자 지히발도 뭔가 낌새를 눈치 챘는지 템포를 살짝 늦췄다. 심지어 정우는 그리 어렵지 않은 서정적인 2주제에서 미스 터치까지 범했다. 아녜스는 공연에서나 연습에서나 정우가 미스 터치를 범하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결선에서 미스 터치라고?

그 충격은 당사자인 정우가 더 큰 듯했다. 연주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고, 그 불안감은 소리의 불명료함으로 나타났다. 여전히 세계 무대에서 통할 만한 연주이긴 했지만 그것은 모범생의 연주였지 더 이상 디누의 연주는 아니었다. 자신감을 상실한 정우가 교과서적인 연주로 돌아선 것이다. 안전위주로.

“그래. 여기까지였어.”

아녜스가 아픈 가슴을 쓰다듬었다. 어차피 마음을 비우기로 하고 실컷 놀아 주기로 한 결선이지만 무너지는 디누를 보는 것은 괴로웠다.

화려한 코다와 함께 연주가 끝나고 어린 소년의 놀라운 연주를 들은 청중들이 일제히 천둥 같은 박수를 보내 주었지만 정작 박수의 주인공인 정우는 풀 죽은 모습으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간헐적으로 바이브레이션을 일으키는 어깨가 이 소년이 흐느끼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마침내 지휘자 지히발이 조용히 다가와 그 큼직한 손바닥으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제야 정우는 부스스 몸을 일으켜서 청중들을 향해 힘없이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은 인사가 아니라 제 머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이때 지히발이 정우를 가리키며 손수 박수치는 제스쳐를 보여주었고, 이에 힘입어 장내는 더욱 요란한 박수갈채로 뒤덮였다.

예민하고 까다롭기로 유명한 지히발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었다. 더군다나 심사위원장이라는 직책으로는 비난받아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행동이었다. 정우는 다시 청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지히발과 함께 대기실로 퇴장했다.

“디누, 낙심하지 말게나.”

“고맙습니다.”

“연주를 망쳤다고 생각하나?”

“예.”

“자네 연주는 나쁘지 않았어. 나이를 생각해. 내 제자들 중 자네 나이 두 배씩 먹고도 그만큼 못하는 녀석들 투성이야. 3라운드 연주에 비해 실망스러웠다는 건 인정하네. 하지만 선곡할 때 내가 이미 지적했지만 자넨 아직 이 곡을 연주하기엔 피지컬이 덜 여물었어. 그러니 그만 마음 풀고 활짝 웃어. 적어도 15년 이상 더 공부하고 성장해야 하니까. 이 말만 명심해. 서두르지 말게.”

“네. 고맙습니다.”

“자네는 신의 선물이야. 더 이상 콩쿠르 따위 나가지 말게. 자네는 늦어도 10년 안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어 있을 걸세. 아니라면 내가 억지로라도 그렇게 만들 걸세. 하지만 그 전에 병원부터 가게.”

“네?”

“날 속일 수 있을 줄 알았나? 자네 손가락 말일세. 무리하지 말게나. 젊을 때는 차이코프스키 1번이니, 라흐마니노프 3번이니, 프로코피에프 2번이니 이런 폼 나는 곡들로 청중을 압도하고 싶겠지. 하지만 자네에게 맞지 않아. 피아니스트가 청중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곡이 반드시 그런 곡들일 이유도 없고. 오늘 교훈을 가슴에 새겨두도록 하게.”

“고맙습니다. 오늘 가르침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정우는 다섯 번째 결선 연주자의 협주곡 지휘를 위해 무대로 나가는 지히발을 향해 깊숙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대기실을 빠져나와 로비에 있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던졌다. 마지막 결선 진출자가 연주하는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형편없는 연주였다. 예민한 정우의 귀가 경련을 일으킬 정도였다.

“젠장, 그냥 저걸 했어야 했는데.”

별로 개의치 않으려 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날아가 버린 우승 트로피가 아까웠다. 하지만 의외로 마음이 편안하고 심지어는 행복하기까지 했다.

“빤빤 빠바바바, 빤빤 빠라라라....”

어느새 정우는 입으로 멜로디를 읊으며 손가락으로 자기 무릎 위에서 방금 연주한 차이코프스키 3악장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처음 연주해 보는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을 손가락까지 다쳐가며 죽어라 연습했던 3일간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우울한 삶을 살았던 이 위대한 음악가의 내밀한 이야기를 훔쳐보았던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 우울한 대가는 가슴속에 은밀히 품어두었던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누구 귀에도 들리지 않는 오직 정우에게만 들리는 이야기였다. 정우는 피아노를 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며 축복인지 이번 무대 위에서처럼 진하게 느껴 본적 없었다. 적어도 3악장 중간부분이 되기 전 까지는.

“안녕. 표토르 일리히. 그 동안 고마웠어요.”

정우가 허공을 향해 인사를 했다.

“여기 있었구나?”

“아녜스.”

“바보같이. 지금 어때? 또 아파?”

“아니. 아프지 않아. 스파가 효과 있나봐. 그런데 3악장 때 뭔가 불안한 느낌이 있었어. 무리하면 안 되겠다고 싶었고, 덜컥 겁도 나고. 그러다 미스터치가 나왔는데, 잔뜩 쫄았지 뭐. 그래서 연주 망쳤어.”

“망치지 않았어. 2악장 까지는 정말 좋았는 걸?”

“뭐, 이대로 좋아. 참, 아녜스, 너 베른 안 가? 너도 이제 결선 준비해야지?”

“참 빨리도 물어본다. 내 콩쿨 신경 안 쓰고 너 챙겨 주느라 다 망하게 생겼는데.”

“난 네가 신동이라 원래 그런 줄 알았거든. 연습 별로 안하고 그냥 놀아가면서 하는 거라고.”

“그런 게 어디 있어? 안 그래도 지금 기차 타고 베른 갈 참이었어. 결선이 내일이야.”

“내일이 결선이라고? 그런데 너... 정말...”

“괜찮아. 그냥 망치면 되지 뭐. 그깟 콩쿠르. 디누가 훨씬 중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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