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클래식 소설 디누 1부 36화

by 권재원

디누의 베일


1

커서가 깜박였다. 컴퓨터 화면은 텅 비어 있고, 그저 커서만 깜박일 뿐이다. 깜박이던 커서가 잠시 글자들을 꼬리에 달고 달렸지만 얼마 못 가 멈춰선 채 깜박이더니 뒤로 달리며 앞의 글자들을 지워 나갔다.

다시 텅 빈 공간과 깜박이는 커서.

벌써 두 시간째 이 모양으로 있었다. 조사도 다 끝났고, 인터뷰도 다 끝나고 이야기 가닥도 다 잡아서 그냥 쓰기만 하면 될 것 같았는데, 첫 줄도 쓰지 못하고 어서 문자를 먹여 달라며 재촉하는 맥 미니의 우유빛 화면만 노려보고 있었다.

마땅한 첫 글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일주일 째 몇 글자 쳐 넣었다 지우고 넣었다 지우기만 반복했다.

나의 무능함에 놀랐다. 비록 멋들어진 문장은 못써도 짧은 시간에 엄청난 분량의 글 쓰는 것으로 유명했던 내가 첫 글자로 무엇을 넣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스스로가 더 한심해 보이기 전에 키보드에서 손을 내렸다. 손으로 목을 받치고 등을 뒤로 눕히니 의자 등받이의 쿠션이 느껴졌다. 그 쿠션을 즐기며 눈을 감았다.

문득 키보드 두드리는 동작 자체가 사람을 조급하게 하고 재촉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밀히 말해 ‘쓰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글을 쓴다는 것은 뭔가를 입력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의 것을 출력하는 것인데, 아무리 봐도 키보드라는 녀석은 입력 도구지 출력 도구는 아니다.

그렇다면 사각사각 종이 스치는 소리를 내며 만년필을 휘두르는 것은 어떨까? 펜촉 소리가 들리면 글이 잘 써질 것 같았다.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켜서 공책을 펼치고 만년필을 꺼냈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탓에 잉크가 굳어 있었다. 물에 담궜더니 굳어버린 잉크 찌꺼기가 녹아내리며 세면대를 시커멓게 물들였다. 로르샤하 테스트의 입체화 버전을 연상시켰다.

만년필을 닦고 말리고 다시 잉크를 넣어 쓸 수 있게 만들기까지의 과정이 마치 종교의식 치루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깨끗한 휴지로 조금씩 흘러나온 잉크까지 싹싹 닦아내자 10년 된 만년필이 방금 구입한 것처럼 은색으로 반짝였다.

조심스럽게 연습장에 펜촉을 문지르자 기분 좋게 미끄러지는 느낌과 함께 촉촉한 검은 선이 부드럽게 그어졌다. 예감이 좋다. 나는 조용히 공책에 펜 끝을 얹고 만년필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글자를 써 나가기 시작했다.


####

“여기서 내려주세요.”

김정미 교수가 택시를 세웠다. 길이 막힌 탓에 미터기에는 무려 5700원이나 찍혀있다.

“와아, 햄버거 10개 값이다.”

큰딸 나경이 엄마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중얼거렸다.

“시끄러워.” 김교수는 딸을 윽박지른 뒤 기사에게 6000원을 건내 주며 “거스름돈은 됐어요.”라고 친절을 베풀었다.

“자, 다 왔다. 어서 내리자.”

“난 음악회 가는 게 싫다고. 더구나 바이올린 따위.”

차에서 내리면서도 나경이 투덜댔다. 순간 김정미 교수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나경을 노려보았다.

“얘, 말하는 것 좀 봐. 바이올린으로 대학 가야하는 학생이 바이올린 따위는 싫다니. 엄마는 대학에서 바이올린 가르친다고. “

“맞아.” 작은 딸 유선이 한 마디 거들었다. “피아노 전공인 나도 오는데?”

“까불지 마라.” 나경이 말했다. “너는 예고 갈 거고. 나는 예고 떨어져 인문고 가고. 뭐 그거라도 붙어서 다행이지 뭐.”

“쓸데없는 소리들 하지 말고 행동 조심해. 이따 음악계 어르신들 뵈어야 하니까. 예의 바르게 굴고. 괜히 엉뚱한 소리 해서 엄마 이미지 구기지 말고.”

김교수의 목소리가 엄숙하게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갈랐다.

“네, 네.”

마지못해 입 끝으로 대답한 나경의 눈에 크고 서늘한 느낌의 눈을 부릅뜬 엄마가 들어왔다.

큰 키, 꼿꼿한 신열, 위압적인 눈 빛.

그런데 그런 엄마 등 뒤에 그 보다 백배 더 위압적이고 거만한 모습의 세종문화회관이 버티고 서 있었다. 나경은 생물시간에 배웠던 먹이사슬이 떠올라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 먹이 사슬의 제일 아래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정미 교수님 오셨습니까?”

세종문화회관에 들어서기도 전에 납작한 아일랜드 캡을 쓰고 트렌치 코트를 입은 중년 남성이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아, 박 주간님!”

“하하하.” 중년 남성이 손을 내저었다. “이젠 더 이상 주간이 아닙니다. 회사 나와서 새로 하나 만들었거든요. ‘계간 클래식’이라고.”

“어머, 그럼 사장님이시군요.”

“그런 셈이죠.” 박사장이 쑥스럽게 웃다가 어색함을 깨려고 슬쩍 말을 던졌다. “참, 최원장님은? 같이 안 오셨나요?”

“그이는 병원일 때문에 바쁘대요. 의사 아들 길러봐야 남의 딸만 호강시킨다고. 정말 일 너무 많이 한다니까.”

“하하. 그러게요. 그나 저나 참 세종문화회관은 어렵네요.”

“어렵다뇨?”

“늘 뭔가 불편해요. 뭐랄까? 건물 자체가 권위적이라고나 할까? 음악 기자생활 20년에 아직도 어렵게 느껴지니 원”

“다 그렇죠. 서울대학은 또 어떻고요? 학생 4년, 대학원생 6년, 강사 5년, 교수 10년, 합이 25년을 보내고도 아직도 교문 지나갈 때 위압감을 느낀다니까.”

“그거야 김 교수님이 을지로 시절에 대학을 다니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관악캠퍼스는 솔직히 멋없죠. 황량하고.”

“그런가요? 하지만 을지로에 있던 음대 건물도 멋없기는 마찬가지였는걸요? 약대 건물 물려받은 거라 계통도 없고.”

“계통 없기로 따진다면야 세종문화회관만한 곳이 또 있겠습니까? 도통 정체가 뭔지 알 수 없다니까요. 강당이기도 하고, 국가 행사장이기도 하며, 오페라 하우스이자 동시에 콘서트 홀이기도 한 이런 공연장이 세계에 또 있을까요?”

“그러게요. 정부가 예술의 전당 건립하기로 한 건 정말 잘 한 거예요. 드디어 서울에도 오페라 하우스가 생기잖아요? 그런데 박주간, 아니 사장님도 아녜스 초청장 받고 오셨나요?”

“김 교수님도?”

“네. 초청장은 하나만 왔는데, 두 장 더 사서 애들까지 데리고 왔죠. 나경이 자극 좀 되라고. 쟤들은 저렇게 잘 하는데, 나경이 얘는 뭐하고 있는 건지.”

나경이 끼어들었다.

“난, 중3이야. 중3이면 중3다와야지, 세종문화회관에서 독주회 하고 이러는 게 어디 정상이야?”

“어른들 말하는데 버릇없게!”

“치잇.”

어른들이 지루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경은 ‘오늘의 공연’이라는 팻말 아래 붙어있는 포스터를 뚫어지게 뜯어보았다. 보는 사람마저 행복하게 할 것 같이 화사한 모습으로 웃고 있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소녀는 맵시 있고 예뻤다. 쉬폰과 레이스 장식이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고, 머리에는 비단 나비가 연상되는 리본을 하고 사랑하는 애완동물을 바라보듯 바이올린을 쓰다듬고 있었다.

소년은 소녀 살짝 뒤쪽에서 자뭇 심각한 표정을 짓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있다. 어찌 보면 날카롭고 잔혹해 보이고, 달리 보면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느낌을 준다. 강인하고 남성적인 느낌이 오는가 하면 소녀 같다는 느낌을 주기까지 했다.

포스터 아래에는 ‘아녜스 & 디누 2중주의 밤. 1984년 1월 8일 저녁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이라는 중고딕체 글자들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얘, 뭐하니? 춥다. 얼른 들어가자.”

엄마가 멍하니 포스터를 보던 나경을 잡아 끌었다. 아직 공연시간이 한참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중앙 로비를 채웠고, 현관을 통해 아직도 꾸역꾸역 몰려왔다. 세종문화회관은 몇 해 전에 대통령 부인이 피격된 곳이기도 했기 때문에 현관에서는 안전요원들이 입장하는 관객들의 가방을 일일이 검사하고 있었고, 덕분에 긴 줄이 늘어섰다.

이렇게 검색을 통과한 사람들은 거의 서로 아는 사이인 듯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서로 인사들을 나누느라 바쁜 모습들이었다. 로비 곳곳이 순식간에 “안녕하세요, 김교수님.”, “잘지냈어요, 이 선생님. 호호호호.” 하는 간드러진 인사말과 웃음소리들로 가득하다 못해 메아리까지 쳤다. 웃음과 인사 뒤에는 저마다 자기 자녀나 제자들을 음악계 유력자에게 인사시키려는 몸부림이 이어졌다. 김교수의 커다란 두 눈도 인사할 사람을 찾아 날렵하게 움직였다.

“아, 차 선생이 저깄네?” 마침내 목표물을 발견한 김교수가 나경의 손을 잡아끌었다. “얼른 따라와.”

그리고 다소 깡마른 체구에 꼼꼼한 얼굴을 하고 있는 3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어머, 김정미 교수님!”

그런 김교수의 노력에 보답이라도 하듯 내내 반대쪽을 바라보던 그 여성이 타이밍 좋게 김교수 쪽을 돌아보며 예리한 톤의 목소리로 인사를 던졌다. 정말 우연히 타이밍이 맞은 것인지 우연히 눈 마주친 척하면서 어색한 시간을 줄인 것인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건 김 교수에게도 차 선생에게도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어머, 차 선생 아니야?”

김 정미 교수 역시 의도적으로 그쪽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이 아닌 양, 뜻밖에 만나 놀라는 척하며 인사를 던졌다.

그 둘이 서로 반가운 척하며 웃는 모습은 기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불혹을 한참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김 교수의 얼굴에는 여전히 젊은 시절의 미모가 살아있었고, 몸매도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잘 관리되어 있었다. 그 위에 부유한 씀씀이를 알려주는 세련된 옷과 장신구들이 자리 잡아 20년의 세월쯤은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았다.

거기 비하면 차 선생은 나이도 젊고 김 교수 못지않게 화려하게 치장하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투박해 보였고 다소 신경질적인 눈매를 하고 있었다.

“차 선생 졸업하고 한 동안 못 봤죠? 한 3년 되었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교수님 찾아 뵙고 그랬어야 했는데. 유학 갔다 오느라 너무 경황이 없어서.”

“사실 나는 지난 달 차 선생 독주회 가서 보긴 했어요.”

“어머, 그러심 어떡해요. 너무 면구스럽네요. 초대권이라도 드렸어야 했는데.”

“뭘. 그렇게까지나. 내가 변변히 챙겨주지 못해 더 미안한 걸. 오히려 아는 사람들이 티켓 값이라도 내야지. 알 만한 사람들이 자꾸 공짜표 챙기면 연주자는 대체 뭘 먹고 살라고? 안 그래요? 참, 그런데 요즘 이화 대학 강의 다닌다면서?”

“다 교수님 덕분이죠 뭐.”

“덕분은 무슨. 내가 뭘 해준 게 있다고.”

“아이,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누가 들으면 진짜 아무것도 안 하신 줄 알겠네요. 교수님이 추천해 주신 거 다 알고 있답니다. 그런데, 이 아가씨들은?”

“내 딸.” 김교수가 이제야 본론으로 들어왔다는 듯이 크고 동그란 눈을 번쩍 떴다. “인사들 해. 이화대학에서 바이올린 가르치는 차희경 선생님이란다. 큰 딸부터.”

“안녕하세요. 최나경이에요.”

나경이 마치 소년처럼 꾸벅 하며 인사를 했다.

“어머, 언니였어요?”

“동생인 줄 아셨죠? 다들 그래요. 내가 조그마니까.”

나경이 자기 입으로 조그맣다고 말하긴 했으나, 동생 유선이 너무 커서 작아 보일 뿐, 그리 작은 키는 아니었다. 학교 신체검사 때 162.5 센티였으니까.

“무슨 그런 말을. 교수님. 좋겠어요. 이렇게 예쁜 딸을 둬서.”

차선생이 나경의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빈말이 아니었다. 나경의 몸매는 군살 없이 단단하고 매끈했으며, 짧은 스커트 아래로 내리 뻗은 두 다리는 겸재가 일필휘지로 내리친 듯 힘차고 늘씬했다. 말투나 행동은 소년같이 거칠었지만 어머니를 닮은 맑은 눈망울과 갸름한 얼굴은 마치 라파엘로 그림에 나오면 딱 어울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예쁘면 뭐해? 실력이 있어야지.”

김교수가 손을 내저었다.

“무슨 말씀이세요? 잘 하겠죠. 음. 너 바이올린 공부하니?”

차선생이 나경의 손에서 덜렁거리고 있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다소 언짢게 바라보며 한 마디 던졌다.

“네. 엄마가 가르쳐 주셨어요. 그런데 잘은 못해요.”

“얘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김정미 교수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애원 반 협박 반의 묘한 눈빛으로 차선생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얘 때문에 내가 차선생을 꼭 한 번 보고 싶었어. 맙소사. 예고도 떨어져서 일반고 들어가게 생겼지 뭐야? 내가 챙피해서 어느 학교 다닌다고 말도 못하고. 그럼 레슨이라도 제대로 받아야 할 것 아냐? 얘를 어떻게든 번듯한 대학에 보내야 내 맘이 놓이겠는데. 그래서 이화대학을 일단 목표로 할까 하는데, 아무래도 차 선생이 나보다는 그쪽 사정을 잘 알지 싶어서 말이야. 이렇게 말하면 너무 폐가 되나?”

“폐라뇨? 당연히 해 드려야죠. 당장 다음 주부터 레슨 날짜 잡아서 해 드릴게요.”

“아유. 고마워요. 차 선생만 믿을게.”

“열심히 해 볼게요. 미리부터 기죽을 필요는 없잖아요? 예고가 꼭 무슨 보증수표도 아니고. 당장 디누도 예중 때려치웠고, 예고 진학도 안하잖아요? 아, 그런데 이쪽 아가씨는?”

“우리 작은 딸.”

“Y예술 중학교 피아노과 2학년 최유선입니다.”

옆에 있던 유선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작은 딸이라고는 하지만 언니보다 더 큰 키와 당당한 체구를 가졌고, 날카롭고 다부진 눈빛은 자부심과 집념을 잘 보여주는 듯했다.

“아, 유선이 이름은 나도 많이 들어봤어요. 피아노 꿈나무라고 잡지에서도 봤는 걸요. 또래 중에서 최고라고.”

“아뇨. 그건 그렇지가 않아요.”

유선이 이내 시무룩해지며 조용히 포스터의 소년을 가리켰다.

“저 오빠가 있잖아요.”

“아, 디누?”

김교수와 차선생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가 홍콩 배우야? 멀쩡한 한국 이름 나두고 디누는 뭔. “

나경이 어른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투덜거렸다. 유선만 그 목소리를 알아듣고 키득거리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이때 김교수가 유선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물론 디누가 비범하긴 해. 하지만 그건 우리 유선이보다 잘나서가 아니라 누나 덕분이야. 미우 덕분에 어린 나이에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연주했으니 얼마나 좋은 경험이 되었겠어? 아유, 나경이가 좀 제대로 했었으면.”

“엄마도 참. 어떻게 얘기가 가다가 나한테 와? 그리고 비유를 해도 그렇지, 나를 미우 언니한테 비유해? 100년에 한번 날까 말까 한 천재라면서? 내가 무슨 소정이 정도 되면 몰라도.”

“소정이?” 소정이라는 이름에 차 선생이 바로 반응했다. “소정이라면 지네트?”

“지네트 얘기는 꺼내지도 마!"

김 교수가 지네트라는 이름이 튀어나오자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단호하고 냉랭하여 다른 세 사람의 말문이 닫힐 정도였다.

“그 프랑스 이름부터 신경 거슬려. 지네트 느뵈랑 비교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감히. 미우 발끝에도 못 미치는 실력으로.”

“그건 그렇지 않아요.” 유선이 당돌하게 어른들에게 눈을 치켜 뜨며 말했다. “미우 언니가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인건 인정해요. 하지만 지네트도 훌륭해요. 지네트가 미우처럼 바흐를 격조있게 연주하지는 못하지만 낭만이나 현대 쪽 연주는 더 훌륭하다고요. 난 지네트가 연주한 생상 콘체르토 듣고 소름 끼쳤으니까. 게다가 미우 언니는 헨릭 셰링의 지도를 받았지만, 지네트는 누구한테 특별히 배운 적 없어요. 엄마는 정우 오빠는 디누라고 불러주면서 왜 지네트만 가지고 뭐라 그래요? 지네트란 이름은 본인이 지은거 아니잖아요? 애초에 태어나길 프랑스에서 태어났는데 어쩌라고? 그리고 따지고 보면 디누, 이것도 건방진 애칭이잖아? 지가 무슨 디누 리빠티야?”

“얘는 어른들 말하는데?”

“아뇨. 괜찮아요. 재밌는걸요? 따님이 참 똑똑하네요. 그런데 너 피아노가 전공이라면서 바이올린도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차선생이 다정한 말투로 유선에게 말하면서, 은근히 자신이 바이올린을 가르쳐야 할 쪽인 나경이 어떻게 하고 있나 훔쳐보았다. 나경은 그런 대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듯했다.

한다는 말이 “소정이 언제 귀국하지? 같이 명동 한번 가야하는데. 파리 이야기도 듣고.” 였다.

그러다 문득 던지듯이 말했다.

“그런데 왜 아녜스 얘긴 안해요? 오늘 바이올린 연주하는 사람은 아녜스라고요. 그런데 걔는 왜 아녜스야?”

“원래 미국 애잖아? 한국 피가 섞이긴 했지만.”

유선이 별 하찮은 것도 다 물어본다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그럼 유선이는 아녜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지네트랑 비교하면?”

자신이 레슨 해야 할 나경보다 동생에게 더 흥미가 생긴 차선생이 넌지시 물어보았다.

“예쁘잖아요? 화장품 광고까지 찍었으면 말 다했죠 뭐. 방실방실 웃으면서 쉽게 연주하고. 나도 그 언니 연주하는 거 보면 기분이 상쾌해지는 걸요? 어머 저렇게 귀여운 소녀가 이렇게 어려운 곡도 연주하네 하는 호기심? 하지만 지네트는 달라요. 나이가 어린지 많은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고 들어도 와 잘 한다 소리가 나오니까. 그냥 듣기 좋아, 보기 좋아 이게 아니라, 아, 이 곡이 원래 이런 곡이었구나 하면서 놀라죠.”

“와 정말 냉정한데?”

“아, 차선생. 유선이가 원래 말을 가차없이 해. 나도 상처받는다니까. 별명이 얼음 공주야. 그런데 얼음공주 말을 요약하니까 아녜스는 아이돌 스타, 지네트는 애 늙은이란 말이 되네?”

“엄마도 만만치 않네요. 엄마는 얼음 여왕이야.”

나경이 툭 한마디 던졌다.

김교수의 낯빛이 변하면서 분위기가 싸해지려는 찰라, 공연 10분전을 알리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울렸고 로비에서 웅성대던 사람들이 하나 둘 객석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어가자.”

나경에게 뭔 말을 하려던 김 교수가 발걸음을 객석 쪽으로 돌렸다.

이전 05화클래식 소설 디누 1부 3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