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케이팝소설 트리플콘체르토 2화 디누의유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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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그 열린 틈으로 젊은 여성 세 명이 차례로 들어왔다.
트리오 디누의 멤버들이 도착한 것이다.
가장 먼저 들어온 여성은 어디서나 단번에 시선을 끌어들일 것 같은 미인이었다. 총명하게 빛나는 큰 눈, 오똑한 콧날, 손바닥만 한 작은 얼굴, 그리고 윤기와 탄력이 도는 깨끗한 피부.
첼로를 담당하는 예니였다. 리허설이라 차림은 소박했다. 은은한 니트에 데님, 단색 앵클 부츠. 그런데도 전혀 허술해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이 정도가 꾸미지 않은 모습이라면, 드레스를 입었을 땐 얼마나 더 아름다울까’ 싶은 상상력을 자극했다. 얼른 보면 첼리스트가 아니라 배우나 아이돌로 보였다.
예니는 수민에게 고개만 까딱하며 인사의 모양만 취할 뿐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고 아버지 권오석에게로 갔다. 그것은 어느 모로 보나 협연할 오케스트라 지휘자에 대한 인사였지 자기를 가르친 선생에 대해 할만한 인사는 아니었다.
‘웬만하면 말이라도 좀 하지.’
수민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수민은 예니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러나 보다 했다. 그나마 아직 10대였던 2016년까지는 형식적인 인사말이나마 했는데, 케이 팝 아이돌 한다며 잠시 외도하다 돌아온 2017년 이후부터는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러고 보니 예니가 아버지인 권오석에게 하는 인사도 거기서 딱히 더 친근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니 할 수 없이 인사라도 해 준다 수준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예니도 자신을 날카롭게 노려보는 최유선과는 감히 눈을 맞추지 못했다.
“요아나, 반년 만인가?”
“네. 스텔라 대모님.”
유선이 굳이 ‘예니’라는 이름 대신 ‘요아나’라는 세례명으로 불렀다. 예니도 굳이 유선의 세례명을 거명했다. 수민은 그 짧은 대화 속에서 기묘한 기싸움을 느꼈다.
그 뒤를 따라 키가 170센티를 훌쩍 넘긴 당당한 체구의 여성 둘이 들어왔다. 바이올린을 담당하는 로사와 피아노 담당 마리다. 스승 디누의 쌍둥이 딸, 그리고 마흔이 넘도록 싱글인 수민에게 딸이나 다름없는 제자들. 워낙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내서 때때로 “선생님”이 아니라 “언니”라고 부르기도 하는 사이.
그런데 일란성 쌍둥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모습은 달랐다. 물론 자세히 뜯어보면 외모는 거의 같았다.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마리는 눈에 띄는 장식 하나 없는 단정한 차림이었다. 회색 빛 낡은 니트, 몸에 맞지 않아 어깨가 살짝 처진 듯한 남색 코트, 그리고 오래 신은 티가 나는 어그 부츠. 머리는 질끈 묶었다. 아무리 리허설이라지만 도무지 무대에 오를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고, 차라리 도서관에 가는 대학원생, 혹은 동생 데리러 학원 앞에 나온 누나 같은 인상이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올수록 수민은 마리가 긴장과 불안을 담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분위기를 느꼈다. 그 불안한 시선이 끊임없이 예니를 찾는 것을 본 수민은 가슴이 더욱 쓰라렸다. 디누의 딸이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는 재능과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청중의 쏟아지는 시선을 두려워해 무대에서 무너지곤 했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반면, 로사는 마치 리허설이 아니라 이미 2,400석이 꽉 들어찬 무대에 입장하는 것처럼, 혹은 어딘가 숨어 있을지 모를 파파라치의 카메라라도 의식하는 듯한 태도로 시선을 사방으로 흩어가며 들어왔다. 마리와 달리 큰 키와 당당한 체구를 최대한 부각시키는 화려한 차림이었다. 누가 봐도 버버리임을 알아볼 수 있는 붉은 롱 코트 사이로는 미우미우의 버건디 니트가 슬쩍 드러났고, 발끝에는 셀린느의 골드 메탈 장식이 돋보이는 블랙 앵클 부츠가 자리를 지켰다.
머리카락은 어깨 아래까지 자연스럽게 물결지게 내려와 있었는데 체리 브라운으로 염색하여 콘서트 홀 조명 아래서 은은한 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메이크업 또한 리허설은 커녕 공연용이라 해도 지나치다고 느낄 정도로 정성스럽고 진했다.
심지어 리허설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프라다 백까지 들고 있었다. 마치 타고난 미모로 자연스레 시선을 받는 예니에게 스타일링된 존재감으로 도전장을 내미는 것처럼 보였다.
수민은 로사를 향한 최유선 눈빛의 온도가 점점 높아지는 것을 감지했다. 로사가 아이폰을 들어 셀피를 찍는 순간 모녀간의 전쟁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수민은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뭔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차피 저 모녀의 다툼이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로사도 서른 줄에 들어선 다음부터는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수민에게 로사는 그저 귀엽기만 했다. 마리는 늘 안스럽고 짠한 느낌을 주는 제자였지만 로사는 어차피 크게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친밀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수민은 슬그머니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인스타그램을 열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기가 막힌 각도에서 섹시한 모습으로 찍힌 로사의 방금 모습이 스토리에 떡 떠올랐고, ‘Rehearsal? Nope. Just Enjoy Seoul’ 이라는 코멘트까지 붙어 있었다. 방금 올렸는데도 벌써 하트가 수십 개 찍혀 있었고 실시간으로 계속 하트가 별똥별처럼 날아오고 있었다.
‘아이고, 로사, 저 인플루언서 놀이 정말 못 말려. 하지만 오늘이 어떤 날인데. 오늘 만큼은 좀 조용히 넘어갔으면 좋으련만.’
잠시 웃음을 참은 수민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최유선의 눈치를 살폈다. 딱닥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최유선이 예니와 로사를 번갈아가며 보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 상실, 분노, 불신 등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읽은 수민은 폭풍우를 예감했다.
예니도 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는지, 혹은 또 시작이구나 하고 생각했는지 슬금슬금 자리를 떠나 무대 가장자리 단차를 통해 무대위로 올라갔다.
“예쁘네.”
무대위로 올라간 예니를 보며 최유선이 한 마디 던졌다.
“엄마 닮아서.”
권오석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니, 마음씨랑 행실이 말이야.”
“아, 그거야 뭐.”
오석은 뭔가 말하려다 말았다. 예니와 2017년 이후 계속 냉전 상태인 걸 굳이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다.
순간 로사가 아이폰을 들더니 무대 위에서 보면대 높이를 맞추고 있는 예니를 계속 찍어댔다.
“뭐하는 짓이냐? 대체?”
마침내 참다 못한 최유선이 한 소리 하고 말았다.
수민은 마침내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하고 무대감독에게 손짓하여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입장을 지시했다.
정작 로사는 싸늘하게 이글거리는 어머니의 눈빛에 전혀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싱글싱글 웃으며 대꾸했다.
“명색이 내 인스타 계정인데 내 사진 보다 예니 사진 올리면 조회수가 더 많이 나오거든. 이번에도 그러나 한 번 보려고.”
“너 오늘이 무슨 날인지나 알고 있는거냐?”
“21회 디누 기념 음악회 리허설. 그러니까 아빠 기일 전야제라고나 할까?”
“알긴 아네? 그런데 지금 그게 아빠 기일에 맞는 차림이고 행동이냐? 더구나 디누 기념 음악회의 하이라이트인 트리오 디누 리더가 기껏 한다는 짓이 셀럽질?”
“아이고, 하이라이트는 무슨. 어차피 솔로는 글러먹은 디누의 딸들이 아빠 이름 걸고 예니 미모 앞세워서 여기까지 온 거 뻔히 다 아는데? 그래서 나도 셀럽질로 좀 보태 주는 거라고. 나까지 마리처럼 얌전 떨고 있었으면 트리오 디누가 아니라 트리오 예니 되던가 아니면 객석 썰렁해서 엄마 좋아하는 세계적인 트리오는 커녕 로컬 행사나 찾아다니는 팀으로 주저앉았을 걸?”
분위기가 이쯤 진행되자 와들와들 떨며 엄마와 언니 눈치를 보고 있던 마리도 슬금슬금 무대로 올라갔다. 수민은 초조하게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빨리 들어오기만 기다렸다.
“됐다. 그만하자. 리허설은 본공연이나 마찬가지니 괜히 집중력 흩을 거 없다.”
의외로 최유선이 한바탕 하는 대신 한숨만 푹 쉬더니 눈빛의 온도를 낮추었다.
“네네, 리허설이나까 연습해야죠. 연습.”
로사가 무대위로 올라가기 위해 코트를 벗었다. 순간 최유선의 한숨 소리가 더 크게 흘러나오며, 음향효과 좋기로 유명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의 벽과 천장을 울렸다.
빨간 코트를 벗자 드러난 로사의 상의는 미우미우 특유의 리본 장식이 달린 원 숄더 니트 크롭 탑이었다. 오른쪽 어깨와 눈이 시릴 만큼 하얀 허리를 하얗게 드러낸 채, 로사는 긴 다리와 육감적인 골반 위로 그 상의를 당당하게 휘날리며 무대 위로 걸어 올라갔다.
수민은 최유선의 눈빛이 완전히 얼어붙은 것을 보고는 ‘이거 오늘 진짜 사고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로사가 살짝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나도 내일이 아빠 기일인 거 신경 안 쓰는 거 아니야. 그래서 이번 달에는 글램이고 틴더고 아무 약속 안 잡고 참고 있다고.”
하지만 최유선은 글램이니 틴더니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 이름들을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던 수민은 최유선이 그 앱들이 뭔지 모르는 것이 확실해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슬금슬금 무대 위로 걸음을 옮겼다.
마침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디누 기일에 열리는 기념 음악회에는 은퇴한 원로 멤버들까지 참석하기 때문에 단원들 사이 사이에 지휘자 수민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사람들도 여럿 보였다.
초대 악장을 지냈던 성주영 교수, 그리고 초대 비올라 수석이었던 신유미 교수도 오랜만에 자리를 함께했다. 다만 수석 자리가 아닌 파트 제일 뒷자리에 겸손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웬일로 로사가 굳이 오케스트라 제일 뒷자리까지 찾아가 두 원로 멤버들에게 깍듯하게 인사 했다. 평소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특히 비올라 자리까지 찾아가서 신유미 교수와 계속 친분을 과시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신유미 교수는 트리오 디누가 피아노 4중주나 5중주를 연주할 때 종종 비올라 파트를 담당하곤 했지만 로사는 평소보다 훨씬 친밀함을 과장하는 몸짓과 웃음을 드러냈다.
‘제발, 로사야. 엄마를 더 자극하지 마. 네 마음은 선생님도 다 이해해.’
수민이 마음속으로 애원했다. 로사가 신유미 교수와 요란스럽게 친밀감을 과시하는 까닭이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신유미 교수는 디누가 대학 시절 여러차례 잠자리를 함께 했던 사이였기 때문이다. 하필 엄마가 보는 앞에서 그 상대와 과장된 친밀함을 과시하는 모습은 마치 “디누의 유산이 어디 음악뿐인가요? 내 사생활 난잡한 거 가지고 뭐라 하지 마세요. 그 역시 디누의 유산이니까. 그 아버지의 그 딸.”이렇게 항의하는 것 같았다.
이때 마리가 예니에게 심각한 눈빛을 던지더니 손으로 휴대전화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예니가 스마트폰을 꺼내 인스타그램을 열어보고 로사 스토리에 무수히 올라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푹 내 쉬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놀라기 보다는 ‘또 이러네. 그런데 하필 오늘 이러는 건 좀.’ 이 정도에 가까웠다. 이미 하트가 융단폭격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런 일이 너무 반복되어 예니가 본인 인스타 계정을 비공개로 닫아버린지 오래였다.
그러는 동안 신유미와 어색한 깨방정을 마친 로사가 예니가 자리잡고 있는 포디움 옆에 와서 서서 바이올린을 들어 올렸다.
“로사 언니. 제발.”
예니가 애원하듯 말했다.
“뭐?”
“오늘, 내일만큼은 좀 참아줘. 내 아빠 아니야. 언니 아빠야.”
“그러니까, 더 널리 알려야지. 그런데 다들 네 얼굴 보고 몰려오니 써먹어야지. 안 그래? 저번주에 틴더에서 만난 어떤 남자가 그러더라. 실컷 할 거 다 하고 나서 한다는 말이 진짜 로사 디누 맞냐고. 그래서 맞다고 하니까 예니 연주복 말고 평상복 사진 있으면 좀 보내 달래. 세상에 아무리 원나잇이라지만 방금 재미 본 여자 앞에서 그게 할 말이야?”
“로사. 좀!”
마침내 말 없던 마리까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피아노의 A4 키를 땅 하고 때렸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오보에가 소리를 맞추고 거기 따라 모든 악기들이 일제히 조율을 시작했다. 로사도 어깨를 으쓱 하더니 바이올린을 들고 튜닝했고, 예니도 첼로를 튜닝했다.
그제서야 마음을 가라앉힌 최수민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베토벤 3중 협주곡, 1악장 처음부터 갑니다.”
마침내 영영 시작 못할 것 같았던 리허설이 시작되었다. 고요한 오케스트라의 도입부, 그리고 느닷없이 강하게 몰아치는 투티를 들으며 예니가 긴장감을 높였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가 모두 등장하는 협주곡 자체도 드물거니와, 베토벤의 이 작품은 첼로가 주도한다는 점에서 매우 독보적인 곡이었다. 심지어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거드는 첼로 협주곡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첼로의 활약상이 큰 작품이다.
예니는 문득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트리오 디누의 마지막 공연을 이 곡으로 하자고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던 사람이 마리였다. 예니는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땡큐”를 말했다. 마리가 눈웃음으로 대답했다.
로사는 두 사람 사이에 뭐가 오가는지 관심 없는 모습이었고, 만약 손에 바이올린이 아니라 스마트 폰이 쥐어 있었으면 사진이라도 찍을 기세였다.
‘마지막인가? 내일이 지나면 이제 우리는 없는건가?’
예니는 멤버들이 해산을 결정한 지난 6월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아직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일의 공연을 멋지게 마무리 한 뒤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할 생각이었다.
6월에 있었던 일.
곧 첼로의 도입부가 시작될 판이라 집중해야 하지만 흐르는 생각을 막는 것은 빗줄기를 가위로 자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예니의 마음은 2024년 6월 청담동으로 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