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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가 휘파람을 불었다고? 진의 귀에는 분명 그렇게 들렸다. 휘파람을 불며 깡총 깡총 뛰어 노는 피아노를 따라 바이올린이 빙글빙글 춤을 추었다. 다람쥐를 쫓아가는 어린아이처럼 신나게 달리다 뭔가 신기한 것을 발견한듯 잠시 신비경에 빠지고 다시 휘파람으로 돌아와 깡총깡총 뛰며 여행을 마무리했다.
이렇게 베토벤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10번의 4악장이 끝났다. 지난 사흘간 진을 황홀경에 빠뜨렸던 소리의 코스모스 여행도 끝났다.
왜 이런 공연을 대강당에서 하지 않았을까? 정우의 이름 값이라면 2천석 채우는 건 일도 아니었을 건데? 이런 기회를 겨우 500명에게만 제공하다니? 1500명에게 기회를 더 주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진의 황홀경을 방해했다.
문제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자꾸 바이올린 소나타로 부르는 관행에 있었다. 마치 바이올린이 주가 되고 피아노가 반주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바흐, 헨델 시대에는 바이올린이 연주하고 키보드가 통주 저음을 연주하는 그야말로 반주였겠지만, 모차르트 이후에는 두 악기가 동등한 자격으로 소리를 빚어내는 2중주 소나타가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바이올린 소나타라고 부르니 피아니스트가 누구냐 보다는 바이올린 누가 하느냐에 따라 티켓 파워가 갈렸다. 아네소피 무터도 지네트도 아닌 성주영이라는 20대 후반의 무명 연주자의 티켓 파워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미우가 기적적인 재활을 마치고 동생 디누와 재결합 한다거나, 잠시 음악계를 떠나 있던 아녜스가 디누와 재결합 한다거나 했다면 세종문화회관 대강당 정도는 티켓 오픈 당일에 매진되어 버렸을 것이다.
그나마 ‘반주자’가 ‘디누’라 3일 연속 400석을 꽉 채울 수 있었다.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이렇게 사흘간 연속으로 진행된 음악회가 초대권 살포 없이 매번 유료관객으로 400석을 꽉꽉 채우는 일은 한국 클래식 음악계에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날에는 네 곡, 둘째날과 세째날에 세곡씩 사흘에 걸쳐 베토벤의 2중주 소나타 10곡을 모두 연주하는 굉장한 기획 연주회였다.
이 엄청난 연주를 성공한 20대 후반의 여성 바이올리니스트 성주영은 진과 19년간 알고 지낸 사이였다. 다름아닌 큰 아버지의 따님, 사촌 누나니까.
그런데 진은 누나가 정우와 어떻게 연이 닿아 이런 큰 기획 연주회까지 열었는지는 전혀 알수 없었다. 진은 두 사람을 소개시켜 준 적 없었고, 둘이 아는 사이인지도 몰랐다. 이 정도 기획 공연을 하려면 기획, 연습, 준비 등등 해서 이미 6월부터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6월부터 석달간 정우가 엄청나게 바빴다는 것이다.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준비하고, 유럽 투어를 준비하고, 공단을 돌아다니며 파업 농성장에서 연주하고 경찰에게 도망 다니고 그러는 와중에도 이렇게 ‘부르주아적’인 공연도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진이 모르는 사이에 너무도 감쪽같이.
더구나 성주영과 정우 사이에는 아무런 연결점이 없었다. 진이 아는 한 성주영은 학생운동 이런 거 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부잣집 딸내미 그 자체였다. 학부 시절에도 명품 옷 입고, 명품 백 들고, 자가용 차까지 몰고 다녔다. 박사과정 다니면서 서울대학에 출강하고 있는 지금은 더 비싼 명품 옷, 더 비싼 명품 백, 그리고 자가용 차도 포니에서 소나타로 바뀌었다.
진은 정우가 친구라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갈수록 늘어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모르던 모습이 자꾸 튀어나와 진짜 모습을 오리무중으로 만들었다.
공단에서 노동자들을 위해 지지직 소리가 나는 낡은 앰프와 신디사이저(좋은 신디사이저였는데 지난번 구사대 습격 때 탈취 당했다가 다시 찾는 과정에서 고물이 되고 말았다)로 무료 공연을 하는 정우. 쇠파이프를 들고 구사대와 치고 박고 싸우는 정우. 그러는 와중에 세종문화회관을 빌려 비싼 티켓 값을 받고, 명품으로 치장한 부르주아 여성과 함께 연주하는 기획을 진행하던 정우.
이 중 어느 것이 정우의 진짜 모습일까?
뭐 알 바 없다. 진은 정체성이란 다만 습관의 덩어리라는 데이비드 흄의 말을 되새기며 앞으로 얼마든지 엉뚱한 정우가 더 나타나더라도 모두 한 다발의 정우로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따지고 들면 진 역시 그런 모순된 한 다발의 다중 인격 집합일 것이니 말이다.
어쨌든 둘이 만났고, 이렇게 훌륭한 연주를 들려주었고, 심지어 공짜 표까지 받아 사흘 저녁을 내내 행복하게 보냈으니 그거면 된 거다.
이 정도 생각을 하다 보니 비로소 이어지고 있는 박수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감동이 가라앉지 않아 그 고마움을 표시할 방법이 없어 계속 치는 박수소리 같지는 않았다. 비싼 티켓 사서 왔으니 앵콜 곡 연주해 본전 뽑게 해 달라는 집요한 박수소리다.
이 박수가 끝나기 전에 앵콜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나가야 했다. 진은 앵콜 연주를 아주 싫어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음악회의 앵콜 연주란 훌륭한 요리 사 먹고 공짜로 주는 싸구려 디저트, 가령 자판기 커피 같은 것으로 입맛 버리는 것과 같았다. 기껏 훌륭한 작품 듣고 그 감동을 집에까지 간직해 가지 않고 가벼운 소품으로 흩어버릴 이유가 없다.
진은 그렇게 슬금슬금 로비로 빠져나와 물품 보관소에서 맡겨 두었던 꽃다발을 찾았다. 여기서 한 10분 정도 어슬렁거리고 나면 누나와 정우가 나올 거니 꽃다발 주고 같이 사진 찍고, 시간 되면 야식이나 같이 하고, 누나 차 얻어 타고 집에 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10분만 기다리면 될 줄 알았던 진은 무려 25분이나 지나서야 피곤한 모습으로 나오는 누나를 만날 수 있었다. 뭔 앵콜을 이렇게 많이 했담?
일단 인사부터 했다.
“축하해 누나. 굉장한 연주였어.”
“다 디누 덕이지.”
“나, 누나가 정우랑 이런 일 꾸미고 있는지 전혀 몰랐어. 게다가 지난 주에 빵까지 갔다 왔는데.”
“사실 그것 때문에 걱정 많이 했어. 들어가서 못 나오면 공연 캔슬이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금방 나왔대? 기사에는 거의 구속이라도 시킬 것 같이 나왔던데?”
“88 올림픽 개최국 체면 때문에 대통령 직선제까지 양보했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를 정치적인 이유로 체포했다는 외신 나간다고 생각해 봐. 전두환 입장에서. 얼마나 끔찍하겠어? 아마 일선 경찰 중에 누가 칭찬받으려고 잡았다가 불려 가서 엄청 까이고 왔을거야. ‘너 누구 죽일 일 있어? 당장 풀어줘!’ 이런 말 들으면서. 올림픽이 사람 여럿 살려준다니까. 아 참, 이런 말 할 때가 아니지. 누나 이거.”
진은 성주영이 정치 이야기 아무리 해 봐야 전혀 관심 없을 상대라는 것을 깨닫고 일단 꽃다발부터 들이 밀었다.
“고마워. 너무 예쁘다.”
역시나 예상했던 딱 그대로의 반응이다.
“자, 둘이 다정하게 서 봐.”
굵직한 바리톤 음성이 들렸다. 성주영의 남자친구와 약혼자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 있는 정동진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정동진은 구레나루가 힘차게 뻗어있는 활기차고 덩치 좋은 30대 초반 남성으로 경희대학교인지 홍익대학교인지 혹은 둘 다인지 하여간 전임강사로 첼로를 가르치고 있다.
진은 꽃다발을 든 누나와 나란히 공연 포스터를 배경으로 섰다. 포스터에는 누나와 정우가 친근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사진이 찍혀 있었다.
“참, 정우는?”
“곧 나오긴 할텐데, 아마 아직 한참 더 있어야 할 걸?”
누나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정우가 사인을 받으려고 하는 것인지 얼굴을 가까이서 보려고 하는 것인지 모를 팬들에게 둘러 싸여 있었다. 줄을 서던가 할 일이지 이게 무슨 짓인가 싶다.
한참 이렇게 아우성을 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럭저럭 줄 비슷한 게 만들어졌고, 정우를 위해 책상과 의자가 마련되었다. 긴 곱슬머리가 젖어 있고, 하얀 블라우스도 흠뻑 젖어 있는 것이 온 몸의 땀을 다 짜내며 연주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살짝 젖은 정우의 모습이 꽤 매력적이었다. 정열을 불태우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꺾이지 않고 추구하는 강인한 영혼, 곁에 있는 사람을 알뜰하게 보살펴 줄 것 같은 부드러운 다정함, 그리고 보통 사람은 존재조차 느끼지 못할 드높은 이상을 꿈꾸며 어딘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깊은 눈동자가 교묘하게 섞여 있는 얼굴에, 스포츠 선수를 연상시키는 단단한 근육질의 몸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찬란한 청춘. 진은 클래식 아이돌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구나 싶었다.
정우가 책상에 앉자 손에 손에 사인 받을 레코드 판 자켓을 든 팬들의 긴 줄이 만들어졌다. 젊은 여성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좌파 이미지가 박혔지만 정우는 공단이나 달동네에서 무료 연주회를 했으면 했지 정식 연주회 티켓 값에는 추호도 양보가 없었다. 그나마 이 공연은 저렴했지만, 젊은 여성들에게 상당히 부담될 가격이란 점에서는 다를 바 없었다.
이 역시 정우의 너무 다른 얼굴들 중 하나였다. 대학 문화관에서 태연한 얼굴로 엄청나게 긴 공짜 공연을 하는가 하면 세종문화회관에서 눈 돌아갈 정도로 비싼 공연도 태연하게 아무 괴리감 없이 하는 얼굴.
그런데 로비 군데 군데 이물질 같이 느껴져 진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짧게 깎은 머리와 날카로운 눈매의 30대 중반 남성들이 조금 어색해 보이는 양복을 입고 사람들을 하나하나 마치 스캔하듯 살펴보고 있는 것이다.
진은 저 깍두기 머리들이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정보과 형사나 안기부 정보원일 것이다. 정우가 국제적인 인물이라 올림픽을 앞두고 직접 어떻게 하기는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주변을 감시하면서 누구 하나라도 걸려라 이러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의 입에서 마른 침이 꼴딱 넘어갔다. 만약 지금이 박정희 시절이나 혹은 1987년 6월 29일 이전이었다면 정우를 중심으로 진을 엮어 해외 왕래가 잦은 예술가들과 학자들을 굴비처럼 엮는 제2의 베를린 간첩단 사건 같은 거 하나 조작해 내는 것은 저들에게 식은죽 먹기였을 것이다. 요리하기 딱 좋았을 것이다. 진의 아버지는 독일 유학파에, 교수들 시국선언에 거의 개근하는 그런 인물이다. 진은 10년 넘게 독일에서 공부했다. 정우는 외국 나들이가 잦은 음악가고 최근 유럽에 다녀온 바 있다.
그런데 이 둘이 한 패가 되어 정우가 유럽에 다녀오자마자 공장을 돌아다니며 노동자 상대의 공연을 했다. 그러니 이것을 아버지와 연결시키면 그림이 그럴듯해진다. 독일에서 이미 북한에 포섭된 교수가 아들을 이용해 권정우 등 유명 예술인과 예비교사들을 포섭하고, 본인은 유학파 지식인과 예술인을 포섭하고 체제전복을 꾀하는 지하조직을 건설하여 어쩌구 저쩌구 이런 그림.
그림이 다 그려지면 다음 단계는? 남산에 끌려갔을 것이다. 독일에 있을 때 몰래 동베를린 갔다 온 적 있느냐, 거기서 북한 간첩 만났냐는 질문을 받을 것이다. 답은 정해져 있을 것이다. 무조건 예스다. 다른 대답은 있을 수 없다. 오직 정해진 답, 예스가 나올 때 까지 잔혹한 고문이 가해질 것이다.
진은 소름이 돋았다. 1987년 6월 29일을 계기로 우리나라가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들어선 줄 알았다. 하지만 의외로 달라진 게 없었다. 폭압기구는 건재하다.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다. 저들은 패배하지 않았다. 잠시 양보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을 뿐이다. 진은 식은 땀으로 축축해지고 소름으로 싸늘해진 손바닥을 팔꿈치에 부지런히 비볐다.
“경찰이지 저 사람들?”
어느새 뭔가 눈치 챈 주영이 살그머니 귀엣말로 물었다.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디누가 너랑 같이 다니면서 한 일 때문에 저러는 거지?”
“글쎄. 그건.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닐 거야. 주관이 뚜렷한 녀석이니 내가 있건 없건 무슨 일인가는 벌였을 거야.”
“진이 넌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디누가 그런 일을 한 건 틀림없이 네 영향을 받아서야. 그래서 하는 말인데, 디누를 좀 그냥 두면 안될까?”
“에잉? 갑자기 뭔 소리?”
“나, 삼촌 훌륭한 분인 거 알아. 우리나라를 좋게 만들려고 싸우시니까. 존경해. 그리고 네가 하는 일도 지지해. 늘 마음 속으로 박수치고 있어. 하지만 디누를 거기 끌어들이는 건 반대야.”
“꼭 내가 끌어들였다고 하긴 그런데?”
“그럼 말려야지.”
“말린다고 들을 놈이 아니잖아?”
“그럼 더 적극적으로 말려. 너 음악 사랑하잖아? 지네트 연주 듣는다고 자전거 타고 독일에서 룩셈부르크까지 갔다 오고 그랬잖아? 연주자 몸이 얼마나 섬세한지 몸이 보물이라는 것 다 알잖아?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천재가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에 태어났어. 디누 몸은 국보라고. 난 디누가 방해 받지 말고 한 길을 쭉 갔으면 해. 정치도 중요하지만 음악도 중요하고. 민주주의 지키는 일은 5천만 명중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디누는 오직 디누 하나야.”
진은 자기 사촌 누이가 이렇게 조리있게 길게 말하는 거 처음 들었다. 주영 역시 말하고 나서 스스로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 동안의 경험칙에 의해 진이 뭐라고 반박할까 조금은 겁먹은 눈빛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진은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누나에게 동의한다는 의사표시를 확실히 했다.
이런 말 처음 듣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지네트다. 진은 빠르게 석 달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