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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국 여행기 "도쿄 산보" 1

걸어서 도쿄 횡단하기

by 권재원

요즘 외국 여행이 막히다 보니 옛날 여행기 재탕하는 분들이 늘어났다. 나도 그러고 싶어졌다. 하지만 기왕 하는거 삐딱선을 타고 싶다. 나는 성격이 이상해서 그 당시 다수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의 반대편을 선호한다. 지금은 문재인 정권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지만, 만약 정권이 교체된다면 아마 교체된 정권에도 대들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이른바 출세를 못한다. 영원한 운동권?


어쨌든 반일감정이 드센 혹은 드세어야 한다고 당위적으로 요구되는 시대이니 만큼 언제나 반골스러운 나의 여행 추억은 주로 일본 여행에 집중된다. 꼭 반골이 아니라도 어차피 나의 해외 여행 절반 이상이 일본이기도 하다. 내가 주로 나가는 곳은 일본, 대만, 그리고 약간의 홍콩, 싱가포르, 가족 상봉을 위한 미국 정도다. 유럽은 비행시간도 길고, 무엇보다도 "후진국 지역"이라 이것 저것 불편하고 지저분하며, 중국과 러시아는 나라 이름만 봐도 두드러기가 난다. 아 마르크스-레닌 주의자가 어쩌다 이렇게 반공냉전적 태도를 가지게 되었는지. 하긴 중국, 러시아가 마르크스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어쨌든 외국 여행을 마음대로 다닐 수 있었던 가장 마지막 해인 2019년의 기억을 돌아본다. 당시 나는 교사에게는 불가능한 기간인 9월 말(휴직의 특권)에 짧게 도쿄를 다녀왔다. 짧은 여행이지만 이걸 가지고 길게 길게 우려먹어볼까 한다. 기간은 2박 3일이었고, 이 2박 3일동안 한 일의 대부분은 걷는 것이었다. 정말 줄기차게 걸었다. 그런데 걷기 보다 '산보'라 그러면 더 듣기 좋고, 도쿄 산보 그러면 웬지 영화제목 같이 들리기도 하다.


우리는 보통 운동삼아 소일거리 삼아 걷는 것을 산책이라고 한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산책보다는 산보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모양이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세대 분들 역시 “산보 다녀 오마.” 이런 식으로 말했다. 산책이나 산보나 그 말이 그 말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막상 들어보면 그렇지 않다. 웬지 산책은 공원과 같은 특별한 코스를 걷는 것, 산보는 동네를 걸어다니는 것이란 느낌이 든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괜히 사전 찾아가며 확인할 필요 없다.


어쨌든 그런 느낌이라면 일본 도시들은 산보가 제격이다. 인도를 질주하는 오토바이나 전동휠도 없고, 인도위에 주차된 차도 없으며, 자전거도 통행에 방해되지 않게 정해진 자리에만 주차되어 있다. 사람은 그저 걷기만 하면 된다. 인도 차도 구별없는 골목길에서도 그저 걷기만 하면 된다. 일본의 운전문화는 보행자를 상당히 조심하기 때문에 보행자가 어슬렁 거려도 경적조차 잘 누르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넋놓고 걸으면 안된다. 어쩌다 하나 나타난 또라이 운전자가 있을수도 있으니.

한적한 지방 중소도시 이야기가 아니다. 복잡한 도쿄 한복판에서도 불편없이 산보를 즐길 수 있다. 도쿄의 뒷골목 같은 곳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야말로 도쿄의 중심가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오히려 도쿄 한 복판이 인도가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어 산보하기에는 더 좋다.


하지만 2019년 9월, 2박 3일의 짧은 일정으로 도쿄를 찾은 목적이 산보는 아니었다. 아무리 토착왜구라 해도 굳이 산보 때문에 비행기 타고 도쿄까지 갈 정도로 골수는 아니니까. 별 다른 목적 없이 그냥 훌쩍 갔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한창 바쁠 9월에 외국에 나다닐 수 있는 휴직자의 특권을 누리고 싶었다. 굳이 따지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산시로>에 자주 나오는 도쿄 대학교 캠퍼스, 특히 그 연못을 보고 싶었고, 역시 그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양식집 <세이요켄>에 가 보고 싶었다. 무려 한 세기가 넘도록 같은 자리에서 같은 메뉴로 성업 중이니 호기심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노재팬이 기승을 부린 덕분에 일본 항공권이나 숙박비가 여느때 보다 훨씬 쌌다. 너희들이나 가지 말고 먹지 마라. 나는 덕분에 싸게 좀 다녀오마, 이성을 가진 사람의 특권으로서. 이런 귀족주의적인 반발심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많고 돈은 궁한 무급휴직자다 보니 그 저렴해 졌다는 일본 항공권조차 부담이 되었다. 그래서 그만 인천-나리타 편을 선택하고 말았다. 갈때 마다 후회하지만 결국은 또 가게 되는 곳이 나리타라는 것을 또 깜박했다. 김포-하네다 편 보다 10만원 이상 저렴하기 때문에 순간 혹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천공항버스 왕복 요금에 사악하기 그지 없는 나리타 공항철도 요금을 보태고 거기에 도심-공항간 이동에 까먹는 시간과 불편함을 보태고 나면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게 인천-나리타 코스다. 그래도 사람 마음은 조삼모사라 당장 더 싼 10만원에 손이 가기 마련. 후회를 수없이 되풀이 한다. 이러고도 내가 경제를 가르칠 자격이 있나 싶지만, 장담컨대 앞으로도 인천-나리타를 몇번 더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막상 나리타에 도착해 보니 어리석은 선택만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목적지인 도쿄 대학 혼고 캠퍼스의 '산시로 연못'과 경양식집 '세이요켄'이 모두 우에노에 있는데, 마침 나리타 익스프레스의 종점이 바로 우에노 역이기 때문이다. 간편하게 기차 한 방에 가는 것이다. 도리어 하네다에서 우에노 가는 길이 더 험하다. 일반 전철을 타고 덜컹덜컹 도쿄를 횡단(종단인가?)해야 하니. 만약 행선지가 요코하마였으면 10만원이 아니라 20만원을 더 내더라도 하네다로 갔을 것이다.


집에서 다섯시에 나와 인천공항에 여섯시 반에 도착하고, 8시 비행기를 타고 나리타에 내리니 거의 11시. 그리고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타고 우에노 역에 도착하니딱 맞추어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렇다면 바로 산시로 흉내를 내며 '세이요켄'을 가는 수 밖에. 그런데 나만 그런 생각을 한게 아닌 모양이다. 아직 12시가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대기줄이 잔뜩 늘어서 있었다. 평일 낮에 웬 사람이 이렇게 많아 했더니, 이럴 수가 일본은 추분이 공휴일이었다. 결국 현관에 마련된 자리에서 20분정도 대기한 다음에야 입장할 수 있었다. 그나마 프렌치 레스토랑인 2층은 예약도 꽉 차있고, 가격도 사악하여 아예 엄두도 못내고 , 경양식집이자 카페인 아래층을 이용했다. 사실 소설 속의 산시로도 프렌치 정식이 아니라 기껏 하이라이스 정도 먹는 것으로 나왔으니 오히려 목적에 더 맞다.

뷰도 나쁘지 않았다. 소설 대로라면 하이라이스를 먹어야 했지만, 결국 함박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비록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메뉴판 사진에서 함박이 더 맛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정답을 알면서도 일부러 오답에 체크하는 삐딱한 학생이 된 느낌이다. 하지만 그 선택은 옳았다. 우에노 공원의 시원한 풍경을 바라보며 먹어서인지는 몰라도, 여태까지 먹어본 함박 스테이크 중 제일 맛있었다. 다만 가격은 좀 있는 편이고, 거기에 비해 양은 좀 많이 적었다. 인정하자. 여긴 후쿠오카가 아니라 도쿄다. 도쿄의 음식 가격은 후쿠오카의 1.5배 정도로 느껴졌고, 양은 2/3 정도, 그러니까 후쿠오카보다 두배 이상 비싸다.

배를 채우고 나니 한 시 정도 되었다. 미국이라면 대기 손님이 있거나 말거나 테이블에서 확보한 내 시간을 충분히 즐기겠지만, 여기는 동아시아 문화권이 아닌가? 뒷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느껴야만 한다. 식사를 마치고 미적거리기 미안하여 바로 일어섰다.

어디로 갈까? 우에노까지 왔으니 당연히 도쿄 국립박물관부터 들렀다. 사실은 미술관 입장료가 사악해서다. 특별전도 입장료가 사악했기 때문에 상설 전시관만 둘러 보았지만 훌륭한 작품들이 많아서 특별전에 대한 미련이 남지 않았다. 호쿠사이 그림 같은 유명한 작품 보다 조몬시대 토기(약 3000년 전)와 전통연극 노에서 사용하는 가면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마음에 훅 들어왔다.

평소에 학생들에게 교과서에서 무시당하고 있는 일본 역사를 일부러 더 가르치는 편이다. 일본은 오랑캐 나라가 아니며, 삼국으로부터 간신히 문명을 배워 원시인 꼴 면한 나라도 아니고,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게 발전해 나간 그런 나라이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나라라고 가르친다. 누가 먼저니 누가 우월하니 따지는 건 이쪽이나 저쪽이나 한심한 노릇이다. 그래서 삼국시대보다 훨씬 전에 만들어진, 하지만 너무도 훌륭한 토기에 눈길이 갔나보다. 한국과 일본 학생들이 저마다 도쿄와 서울에 있는 국립박물관을 자주 견학했으면 좋겠다.

도쿄 국립 박물관을 한참 둘러보고 나니 생각보다 오래 관람했다. 벌써 시간이 15시 30분 정도가 되었다. 원래 목적지인 산시로 연못을 보기 위해 서둘러 도쿄대학교 캠퍼스로 들어갔다. 우에노 공원 근처라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바짝 붙어 있는 건 아니고, 동물원 옆으로 해서 제법 걸어가야 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멀어서 산보가 아니라 행군에 가까웠다. 도쿄 대학교 교문은 빨간 대문(아카몬)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 문은 국립박물관쪽 문이 아닌 모양이다. 그냥 저냥 흔히 볼수 있는 너무도 평범한 교문으로 들어갔다. 이미 박물관 투어로 뻐근해진 다리지만 무시하고 몰아 붙인다. 주인 잘못만나 고생하는 다리.


산시로 연못. 소설 <산시로>에서 걸핏하면 주인공이 나와서 사색하던 곳이다. 나도 사색을 좀 하고 싶었지만, 9월말의 도쿄는 여전히 더웠고, 연못 가에 있다 보니 모기 투성이라 금새 팔 다리가 근질근질해졌다. 더구나 제일 좋은 자리에는 어떤 여성분이 앉아서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비킬 계획이 없어보였다. 그냥 한바퀴 돌아보고 소설을 또 읽어 보는 것으로 한다.


산시로 연못을 돌아 나와 사회과학연구소도 한번 둘러보고(명색이 전공이니), 아카몬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긴다. 가다 보니 어디서 많이 봤던 건물이 나타났다. 바로 혼고 캠퍼스의 상징과도 같은 야스다 강당이다. 일본 학생운동의 최후를 상징하는 건물로 우리나라로 치면 연세대학교 백양관(맞나?) 같은 곳이다. 당시 학생과 경찰의 공방전으로 일어난 화재의 흔적이 아직도 그을음으로 남아있는데, 일부러 지우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는 일본에서 하는 건 꼭 따라한다. 연세대학교에도 백양관인가에도 이런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고 들었다.



이렇게 혼고 캠퍼스 투어를 한바퀴 돌고 도쿄 대학의 명물이자 상징과도 같은 아카몬으로 빠져 나왔다. 야스다 강당에서 아카몬으로 가는 길은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나무들이 줄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단풍철에 매우 아름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직하고 나면 11월 말에 다시 와서 걸어보고 싶다. 그러고 보니 퇴직도 몇 년 안 남았다.

혼고 캠퍼스를 다 둘러 보고 나니 다리가 천근만근이다. 애플워치를 들어 보니 벌써 2만5천보를 넘겼다. 숙소로 걸음을 옮겼다. 숙소는 긴자에서 멀지 않은 가야바쵸에 잡았다. 긴자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지만 긴자보다 훨씬 저렴하고, 어쨌든 스미다 강 근처라 밤에 산책하기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도쿄 지하철은 환승이 헬이기 때문에 환승해서 가야바초 역까지 가는 대신 스이 텐만구 마에 역에서 내려서 또 걸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스미다 강을 도보로 건너게 되었다. 저 다리가 무슨 문화재라고 하는데, 이젠 다리가 너무 아파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저 펼치고 쉬고 싶을 뿐..

저녁때가 다 되어서야 가야바초에 있는 숙소에 들어갔다. 다섯시에 집에서 나와 11시 반 부터 거의 여섯시간을 걸어다닌 끝에 다리를 펼치고 앉을 수 있게 되었다.숙소는 일본 호텔, 더구나 도쿄에 있는 비즈니스 호텔답게 정말 좁았다. 사진에나와 있는 저 공간이 실내공간의 전부다. 사진을 찍는 내 등 뒤가 바로 화장실이다.더구나 이 정도면 일본 비즈니스 호텔 치고는 절대 좁지 않다. 하지만 그 밖에는 모두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조식은 불포함. 왜냐, 멀지 않은 곳에 긴자가 있고, 긴자에는 유명한 스타벅스 매장이 있으니까.

잠시 다리를 펼쳐 쉬고 있노라니 도쿄에 유학중인 제자가 룸메이트인 일본인 언니와 같이 보고 싶다고 한다. 그 언니가 한국에서 온 교사에게 호기심을 느낀 모양이었다.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민간외교의 전사가 되어 다시 길을 나섰다. 마제소바와 기타 등등 제법 푸짐하게 먹었는데, 그 일본 언니는 자기 먹은것만 싹 계산하고 일어선다. 너무도 당연하게. 역시 더치의 나라다. 내심 내가 다 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돈 벌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뿐해졌다. 그런데 그 일본 언니가 자꾸 군대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한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 남성에 대해 제일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이 군대라고 하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군대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신의 아들이라. 하지만 에라 알게 뭐냐? 대충 지어서 이야기 할 수 밖에. 어쨌든 대학교 1, 2학년때 병영집체훈련도 다 받았으니 총도 쏴 보고. 일본인들 중에 총 쏴 본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이렇게 도쿄의 첫날이 마무리 되었다. 어느새 애플워치는 3만보를 넘기고 있다. 엄청 걸었다. 하지만 문제는 진짜 걷는 일정이 바로 내일부터라는 것이다. 도쿄를 걸어서 횡단할 생각이기 때문이다. 가야바초에서 걸어서 지브리 박물관이 있는 기치조지까지 가 볼 생각이다. 뭐 계산해 보니까 20킬로미터 정도 밖에 안된다. 할 만하다. 그리고 내 나이 겨우 52세밖에 안되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사실 지난 여름 방학에는 산길 20 킬로미터도 걷지 않았나?

일단 푹 자고 본격적인 도쿄 산보를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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