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해 전 구글 블러거에 글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구글이 블로그를 폐쇄할지 모르는 불안감에, 옛날 블로그 글들을 박제 떠서 브런치로 옮깁니다. 다만 동시대성이 떨어지는 글은 개작하고 그래도 안될 것 같은 건 그냥 버립니다. 즉 여기 옮겨지는 글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주제의식이 유효한 것들을 고쳐 쓴 것입니다. 이 글은 2011년에 쓴 글입니다.
80년대는 특이한 시대다. 젊은이라면 그것도 대학생이라면 거의 의무적으로 좌파가 되어야 했단 시대. 더구나 나는 그 80년대의 절정기와 쇠퇴기를 동시에 경험한 87학번이다.
1987년. 합격자 발표 무렵 고문으로 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고, 입학식과 바로 그 학생, 박종철 열사의 49제그 겹쳐 분위기가 몹시 어수선했다. 입학식 분위기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대학에 들어간 87학번은 이후 한 학기도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는 저주받은 세대가 되었다. 거의 모든 학기마다 동맹휴업이나 시험거부 투쟁이 이어졌으니.
87년에는 6월 항쟁으로 여파로 , 88년에는 여소야대 국면에서 민주화의 완성과 전두환 이순자 구속 요구로, 1989년에는 노동운동의 확대 그리고 무엇보다 전교조 탄압 저지 투쟁으로, 그리고 1990년에는 우리 스스로의 문제가 된 임용고시 거부 등으로 해마다 그냥 넘어간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낙제한 과목 때문에 한 학기 더 다녀야 했던 1991년에는 80년대의 꼭지점을 이루면서 학생들의 죽음과 분신이 잇따랐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는 클래식 덕질을 계속하였다. 지금 학생들이 들으면 까무라칠 얘기지만 당시에는 3월에 모든 대학 남자 신입생들이 의무적으로 1주일간 문무대에 입대하여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그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군사훈련이 아니라 입소 직전에 구입한 에리히 클라이버가 지휘한 <피가로의 결혼 전집 > LP 를
들어보지 못하고 온 것이었다. 그 전설적인 명반이 1987년에야 처음으로 국내에 정식으로 발매되었고, 당연히 넙죽 집었는데, 카셋트 테이프에 옮겨 담지 못해 워크맨으로라도 들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주일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던지.
당시 월 8회 방문하는 과외를 하면 15-20만원을 받았다. LP판 한장이 2500원이고, 웬만한 음악회가 만원을 넘지 않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거금이었다. 5-8만원이면 한 달 용돈으로 충분했고, 5만원은 저축하고 나머지 돈은 음반을 구입하거나 음악회 티켓을 구입했다. 그 당시 콘서트 홀은 세종문화회관과 호암아트홀이 전부였다. 새로 생긴 호암아트홀을 선호했다. 같은과 여학생과 안톤 쿠에르티 피아노 독주회를 갔는데, 나는 음악회가 익숙했기에 편안한 복장이었지만, 그녀는 매우 긴장된 시간으로 여겨서 분홍색 투피스를 입고 나타나서 재미있어 했던 기억이 난다.
그 밖에 알바비 모아서 전집 박스세트 구입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게자 안다가 연주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집(12장), 에셴바흐가 연주한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집(7장), 칼 리히터가 지휘한 헨델의 메시아 전집이 그 무렵 최고의 득템이었다. 이래 저래 대학 시절에 수백장의 LP판을 긁어 모았다.(나중에 이걸 CD로 개비하느라 중복 지출된 돈도 엄청나다)
이 무렵부터 고등학교때 까지는 잡식성이었던 내 취향이 모차르트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대학교때는 거의 내내 모차르트만 듣다시피했다. 그리고 간간히 헨델, 베버, 슈만, 쇼팽을 들었다. 초등학교때 그렇게 좋아했던 베토벤은 거의 듣지 않았고, 그때나 지금이나 바흐는 잘 맞지 않았다. 현대음악도 조금씩 듣기는 했는데,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자주 들었고, 프로코피에프 피아노 협주곡도 들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음악을 듣는다고 말하지 않고 모차르트를 듣는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오덕이 다시 더 치밀한 오덕이 된 셈이다.
혹자는 당시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대학가를 휩쓸었는데, 이렇게 클래식음악을 즐기는 취향이 어떻게 가능했냐고 반문한다. 나는 그 질문이 오히려 이상하다. 물론 이때가 이념적인 학생운동의 절정기이기는 했다. 우리는 선배 세대들의 낭만적인 학생운동은 노동계급의 관점이 결여된 소부르주아 자유주의라며 난타했으며, 1988년부터 붐을 일으킨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중무장한 이념 세력으로 변모하였다.
'노동자', 이 말은 선이며 성스러운 단어였고, '부르주아' 이 말은 악이며 근절되어야 할 대상을 지칭했다. '지식인' 이 말은 기회주의자의 유사어로 경멸의 의미를 담아서 사용하였다. 노동자 계급이 최고이며, 노동자 계급이 하는 일이 옳으며, 노동자 계급의 취향을 기준으로 미의 기준, 가치관 모든 것을 다 수정해야 한다고 외치고 다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음악을 즐겨듣고, 강의실 구석의 피아노를 연주하곤 했던 나의 취향은 그 열렬한 좌익투사(pd)들에게 오히려 칭찬의 대상이었다. 물론 소부르주아 근성을 버리라는 요구 따위는 들은 바 없다.
1989년 북방외고 정책에 따라 소련 음반 수입이 허가되어 쇼스타코비치의 음반들이 대량 유입되었다. 그러나 즉좌적 성향으로 악명높은 pd지도부 조차 쇼스타코비치만 듣고 다른 부르주아 취향은 버리라는 어떤 비판도 요구도 하지 않았다.
어떤 진보인사가 자신은 대학교때 감히 클래식 음악 듣는다는 말도 못 꺼내고, 그래서 이불 속에 숨겨놓고 듣곤 했다고 쓴 것을 보았는데, 기가 막혔다. 내가 다닌 학교는 학생운동의 메카와 같은 곳이고, 그가 다닌 학교는 학생운동이 거의 없었던 학교였기 때문이다. 이후 나는 그가 대학교때 학군단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는데, 클래식 음악 듣는것이 반민중적 부르주아 취향이라 꺼린다고 하면서 군복을 입고 캠퍼스를 활보하는 일은 어떻게 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는 80년대때 그 pd그룹 한복판에서 한때 노동자계급의 혁명을 외치고, 그러다가 투옥직전까지 가기도 했지만, 늘 클래식 음악을 들었고, 음악회를 갔으며, 당시 나의 동지들 중 그 누구도 그런 취향을 가지고 문제삼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나는 음악회를 가면서 저렴한 좌석을 '프롤레타리아 지정석' 이런식으로 지칭하는 일따위는 하지 않는다. 나는 클래식을 즐기는 것이 부르주아적 취향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마르크스도 밥은 굶어도 딸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시켰으며, 무너져가는 다락방에 살면서도 목돈이 생기자 생필품이 아니라 피아노를 샀다. 마르크스의 딸들은 노동자들의 모임에서 음악회를 열기도 했으며, 이때 연주된 음악은 노동가요, 혁명음악 따위가 아니라 모차르트였다. 누군가가 여기에 대해 문제제기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그룬트리세' 서설에 옛시대의 예술작품을 즐기는 취향은 그냥 취향이라고 설명했다. 이걸 가지고 문제 삼는 것은 어른들이 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을 어린이 시절로 퇴행하려는 시도라고 문제삼는것 만큼이나 어리석으니까. 불행히도 마르크스는 이 이상의 미학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80년대 당시 극렬 운동권이었던 나에게 클래식은 들으면 좋은것이며, 모든 계급이 평등하게 누려야 할 것이었다. 내가 꿈꾸던 세상은 클래식 같은 부르주아 취향을 가진 자가 뽕짝 취향인척 해야 하는 세상이 아니라, 노동자들도 부르주아 취향을 얼마든지 누릴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