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그 책임에는 더 많은 봉사도 있지만 말을 줄여야 하는 것도 있다. 큰 힘을 가진 사람의 말 한마디는 본인이 전혀 생각하지 않은 방향으로 일파만파 확산되기 쉽기 때문이다. 특히 비유나 상징을 심해야 한다. 보통사람의 경우는 비유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지만, 큰 힘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현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평소에 말 잘하고, 글 잘쓴다고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큰 힘을 가진 자리에서 더 조심해야 한다. 미국 대통령이 직접 연설문을 쓰지 않는 것도 말을 못하고, 글을 못써서가 아니라, 말 한마디, 단어 하나가 가져올 풍파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과 스탭이 충분히 토론해서 내용을 정하고, 문장 하나, 단어 하나 스크린하고 나서 내보낸다.
선의를 가지고 한 말일수록 더욱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되도록이면 구체적이고 명확한 몇개의 단어로 정리해야 하며, 부연설명이나 수식어나 수사법을 줄여야 한다.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수식어가 많으면 많을수록 해석의 여지가 많아지며, 이는 결국 현장의 혼란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조희연 교육감의 화법에 아쉬움이 많다. 교육감이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그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현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올 3월 "일 안해도 월급나오는 사람" 으로 곤욕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또 스크린 되지 않은 비유법으로 현장이 아수라장을 만들고 있다. 보좌관들은 제발 교육감이 즉흥적인 말을 하지 않도록 연설문이나 메시지를 철저히 관리하기 바란다.
이번에 일으킨 평지풍파는 '실시간 쌍방향 원격수업'이다. 6월 12일 교육감이 교장들에게 편지를 돌렸다. 그런데 편지의 메시지가 모호하다. 이 편지는 보기에 따라
1) 교장들은 “예산 운용을 유연하게 하여 온라인 수업 기자재를 구입할 때 예산 항목에 구애받지 말라”
로 읽힐 수도 있고,
2) 교장들은 “실시간 쌍방향 수업을 기반으로 원격수업을 구성하라.”
로 읽힐 수도 있다.
물론 평소 교육감의 스타일로 봐서 2)는 아닐것이다. 만약 실시간 쌍방향 수업이 많이 이루어지기를 바랬다면 이걸 교장이 아니라 교사들에게 뿌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모로 봐도 교장들더러 교사가 특정한 유형의 수업을 하도록 시키라고 주문하는 것은 진보교육감 스타일이 아니다.
실제로 편지의 내용 대부분은 기자재와 관련된 내용이다. “교수학습용 태블릿 PC(펜, 키보드 등 부자재 포함) 구입, 원격수업 컨텐츠 제작을 위한 기자재(마이크, 짐볼, 삼각대, 웹캠 등) 구입, 원격수업용 유료 소프트웨어 구입, 학생용, 교사용 디바이스 유지 보수를 위한 소프트웨어 구입" 등을 예산에 구애받지 말고 쓰라는 것이다. 여기에 '실시간 쌍방향 수업'을 강요하는 내용은 없다. 당장 '원격수업 컨텐츠 제작을 위한 기자재'라는 말이 나온다. 컨텐츠 제작과 실시간은 당연히 같이 갈 수 없다.
문제의 실시간 쌍방향은 나중에 비유로 등장한다.
"실시간 쌍방향 기반 원격수업’이 인프라 환경이 부족해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서 재정을 운용해 달라”
라고 당부한 것이다. 그리고 이 한 마디 때문에 이 편지의 주제는 "원격수업 기자재 구입을 적극적으로 하라"에서 "실시간 쌍방향 수업을 하라"로 바뀌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원격수업 기자재 구입을 적극적으로 하라."로 해석하면 교장은 을이 된다. 교사들이 이런거 저런거 사달라고 하면 적극적으로 예산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시간 쌍방향 수업을 하라."로 해석하면 교장이 갑이 된다. 교사들에게 지금 하는 원격수업 때려치우고 실시간 쌍방향으로 하라고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든 메시지가 모호하면 자기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사실 실시간 쌍방향이 원격수업의 정도이거나 왕도인것도 아니다. 이는 방송에 사전제작 프로그램이 있고 생방송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생방송이 사전제작보다 더 우월하다는 식의 망발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스포츠 중계나 행사중계는 당연히 생방송을 해야 한다. 그러나 드라마나 다뮤멘터리는 사전제작이 훨씬 월등하다. 결국 목적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수업도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무엇인가를 하면서 그것을 교사가 확인해야 하는 수업이 있는가 하면, 교사가 제공한 내용을 여러번 곱씹은뒤 그 결과물을 제출해야 하는 수업도 있다. 가령 무엇을 만들거나 그리는 활동 같으면 교사와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직접 물어보고 보여주면서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읽고 이해해야 하는 수업이라면 일단 자료를 받아 충분히 소화시킨 뒤에 그 결과물을 교사에게 제출하여 검사받는 쪽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교사는 수업의 목적, 학생의 상태에 따라 가장 적절한 교수방법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이게 바로 교권이다.
심지어 EBS링크조차 그렇다. 이미 입시문제를 EBS문제에 맞춰서 출제하고 있다. 그러니 등교수업을 해도 어차피 그 문제집 풀이를 해야 하는 실정 아닌가?
교육감이 이걸 모를까? 당연히 잘 안다. 하지만 교육감 주변에 있는 교육관료들은?
그들은 기자재 구입을 적극적으로 하라는 메시지보다 실시간 쌍방향 수업을 하라는 메시지가 더 좋을 것이다. 그래야 교장들은 교사에게 실시간 쌍방향 수업을 하라고 윽박지르고, 교육관료들은 학교에 공문 보내서 실시간쌍방향 수업 비율을 높이라고 윽박지라고, 그 비율을 매주 보고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공문
총수업 시수 중 다음 수업 유형의 비율을 자료집계 시스템에 입력하시오
1) 자체제작 콘첸츠 수업 2)외부 콘텐츠(EBS등) 재구성 수업 3)외부 콘텐츠(EBS등) 활용(재구성 안함) 수업 4) 실시간 쌍방향 수업
이미 이런 공문이 왔는지 모르겠다. 설사 안 왔더라도 금명간에 이런 공문 올 것이다. 그게 그들의 생리니까. 그래서 1)번과 4)번의 비율을 높이는 것이 자기들 실적이라고 보고할 것이고.
민주 진보 교육감의 사소한 비유법 하나가 온라인 수업 국면에서 마치 서울의 봄처럼 자리잡아가던 학교 민주주의의 기반을 온통 흔들게 생겼다. 엄밀히 말하면 특정한 유형의 수업을 교육청이 강요하는 것 자체가 비교육적이고 비민주적이다.
조희연 교육감은 정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아닐 것이라고 믿는다. 일단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