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의혹 속에 유명을 달리한 권력자가 있다. 그런데 어느 유명한 페미니스트 교수가 뜻밖에 그를 추모하며 "진보는 도덕적으로 너무 결벽증이라 문제다."라는 식의 말을 했다. 심지어 서울시교육감도 그런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래서 어느새 그 분이 저질렀다고 의심받는 성폭력은 "별 거 아닌 사소한 잘못"으로 치부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아니 겨우 그깟 일 가지고 죽고 그래?"
이런식의 분위기. 하지만 이게 피해자에게는 다른 식으로 들린다. 어떻게 들리냐 하면, 이렇게 들린다.
그 동안 해 오신 게 이렇게 산더미 같은데, 그 정도 허물 정도는 좀 덮어줄 수 있지 않느냐?
이렇게 피해자는 별 거 아닌 피해를 침소봉대해서 크나큰 어르신을 죽음으로 몰고간 나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직접 그렇게 이야기 한 적 없다고? 사람이 죽었다. 더구나 피해자에게 사과 한 마디 안하고 죽었다. 그렇다면 피해자는 그 죽음을 자신에 대한 엄중한, 최상급의 질책이자 반박으로 들을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이런 저런 사회적 저명인사들, 그리고 지지자들이 가세하면 사실상 사회적 2차가해라 불러도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분의 지지자들도 그걸 의식했는지, 처음에는 피해자를 거론하고, 피해호소인이라는 해괴망칙한 용어를 만들더니, 이제는 피해자 대신 피해자의 변호사를 집중 공격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을 변호하는 사람을 공격하고, 그 사람의 저의가 수상하다는 괴담을 퍼뜨리는 것이 2차가해가 아니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물론 나는 그 분이 죽어야 할 정도로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해하지 말라. "그 까짓 실수"로 생각해서가 아니다. 어떤 잘못도 그 처벌로 '생명'을 요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분의 행동은 절대 그 까짓 실수가 아니며, 피해자가 느꼈을 심리적 타격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모든 성폭력 사건에는 비탈길 이론이 적용된다. 말장난, 사소한 접촉, 불쾌한 추행, 성폭행, 살인이 한 비탈면에 있는 것이다. 만약 불쾌한 성적인 농담을 함부로 하는 상대 앞에 불쾌감이나 거부 의사를 드러낼 수 없는 상황이라면, 결국 그 상대는 다음단계까지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상황이다. 그 사람이 다음 단계까지 가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게 달려있을 뿐, 피해자의 뜻과 무관하다. 따라서 불쾌감이나 거부의사를 밝히기 어려운 상대가 저지르는 성폭력에는 '사소한 것'이라고는 없다. 상대가 단지 남성일 뿐 아니라 거대한 권력을 가진 남성일 경우에는 그 비탈길이 훨씬 가파를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이 외신에서도 크게 다루어지고, 한국에서 두번째로 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소개되는 상대 앞에서 저 비탈길은 얼마나 아득하고 가팔랐을까? "그 동안 해 오신 훌륭한 일들" 역시 "사소한 실수"를 덮어주는 면죄부가 아니라 그 비탈길을 더 가파르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진보 인사들은 도덕적으로 결벽증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분은 특히 더 그런 존재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피해자가 아무리 피해사실을 호소해도 아무도 그것을 귀담아듣지 않을 것이다. "거짓말 하지 마"라 안하면 다행이다. 아마 대부분은 "그런 뜻으로 하신 행동이 아닐거야.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지 마." 이런 식의 반응과 만날테니 말이다.
그 분이 정말 지나칠 정도로 도덕적 결백에 집착하는 성품이었는지 여부는 판단을 유보하겠다. 하지만 피해자에게는 그 도덕적 결벽증이라는 것, 그런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기존의 엄청난 정치적 권력에 보태지는 도덕적 권력으로, 거대한 벽으로 다가왔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진보의 도덕적 결벽증 - 진보가 정말 그런 증상을 가지고 있다고 믿지 않지만, 그렇다고 전제한다면- 을 무슨 핸디캡이라도 되는양 말하지 말자. 진보가 그 도덕적 결벽증 때문에 늘 손해만 보며 살아왔나? 그럴리가 없다.
정치판에서는 도덕도 자본이다. 도덕적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얼마나 큰 정치적 자원인지 모를 리가 없는 사람들이 그런 말들을 한다. 그리고 그 분은 그 자본을 아끼지 않고 널리 사용했고, 더구나 여러 사람들에게 대여하고 분양하기까지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니 그것은 핸디캡이 아니라 힘이다.
그리고 마블 시네마에서 자주 나오는 대사처럼,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다.
자본을 사용했으면, 이자를 낼 일이며, 이자를 내지 못한다면 부도처리 되는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