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교육의 패러다임 전환
이 논문은 2007년에 작성된 것이다. 당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본부에서 정책 연구를 담당하면서 작성하여, 전교조를 중심으로 하는 '교육복지운동'을 펼치기 위해 이론적 기초를 작성한 것이다. 내가 유튜브에 올린 김누리 비판 영상에 붙은 댓글 중 "깊이에서 비교가 안된다."라며 비아냥 거리던 김누리 지지자들에게, 이미 13년 전에 교육계에서 얼마나 이 문제가 "깊이 있게" 논의 되었는지, 그리고 김누리의 반교육론이 얼마나 "깊이 없는 뒷북"인지 보여주고자 한다.
아울러 그 사람의 강연을 자꾸 조직하는 "지~인 보 교육감"들은 이 글을 통독한 뒤, 주변 교사들과 함께 읽으며 자문을 구하라. 굳이 나의 강연을 조직할 필요는 없다. 나도 그럴 시간 없고. 비록 작성한지 13년 된 오래된 글이지만, 아직 몇몇 문제의식은 예리하게 살아남아 있다.
이하 논문 본문이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PDF 도 올렸다.
한국 교육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다는 문제의식에는 보수, 진보가 따로 없다. 학부모들은 사교육의 늪에 빠져 엄청난 초과노동을 강요당하며, 학생들은 끝도 보이지 않고 의미도찾을 수 없는 엄청난 입시교육에 시달리며 몸과 마음을 상하고 있다. 신뢰를 잃어버린 공교육과 교사들은 거의 공공의 적이 되어 온 국민의 질타를 받고 권위마저 상실해 심지어는 학생과 학부모에게 구타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그 동안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각종 대책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러한 대책들은 매우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사교육 대책, 입시제도 개혁, 공교육 강화 방안 등으로 압축된다. 그러나 이 정도의 수준에서 해결책을 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사교육’,‘입시과열’, ‘공교육의 신뢰 상실’ 등은 교육 위기의 증상이지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교육의 위기는 이미 대증요법으로 해결될 수준을 넘었다. 위기의 증상들을 관통하는 공통의원인을 찾고, 해법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위기는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이고, 어떤것이라야 하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답을 바탕으로 교육의 목적, 과정, 방법, 그리고 구체적인 학교의 상과 정책이 재구성되어야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위기는 공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이 연구는 기존의 공교육을 지배하고 있던 교육 패러다임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뒤 이들을 창조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연구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기존의 공교육을 지배하던 패러다임인 인간자본론과 전통주의의 특징을 살펴보고 이것들이 어떻게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야기했는지 밝힌다.
둘째, 이들을 극복할 대안으로 교육복지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복지 패러다임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문제점이 무엇인지 제시한다.
셋째, 교육복지 패러다임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 교육 밖에서 안으로의 관점 전환을 통해 기존 교육 패러다임을 창조적으로 지양하는 새로운 교육복지 패러다임을 제안한다.
이 연구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현재 한국교육의 위기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교육학적 지평을 제공할 수 있다.
둘째, 신자유주의에 의해 공격받고 있는 교육복지 정책의 문제가 복지에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힘으로써 새로운 복지 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
셋째, 공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함으로써 현재 한국 교육의 위기를 총체적으로 바라보
고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도를 제시할 수 있다.
이 연구의 한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연구의 범위는 패러다임을 제안하는 것이지 구체적인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이 연구는 철학적, 해석적 논의에 한정되어 있으며, 경험적 자료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에 단지 문제제기의 의의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 자체가 이 연구의 근본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정책과 자료는추후의 연구과제로 남겨둘 것이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정확한 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오래된 답변은 지식과 문화의 전승, 그리고 인재의 양성이다(김신일, 1980).이는 흔히 인문교육, 실업교육으로 비견될 수도 있는데, 각각 전통주의적 패러다임과 인간자본론적 패러다임으로 시대를 이어가며 재생산되어왔다.
전통주의 패러다임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장 오래된 교육패러다임이다. 이는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권위 있는 문화적 전승, 즉 고전(학과)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교육의중심 목적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3학4과를 중심과목으로 삼았던 과거 서양의 문법학교, 김나지움, 그리고 육예와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했던 동양의 각종 교육기관은 오늘날에도 인문계 고등학교의 기반을 이루고 있어 공교육의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패러다임은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뿌리가 깊다. 플라톤은 덕을 가르칠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전제에서 출발하여, 최상의 덕, 즉 완전한 이데아인 “선의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으로 교육을 구상하였다(Boyd, 1964). 학생들은 기하학과 철학(변증론)을공부함으로써 자신의 이데아를 달성하여 완전성에 도달한다. 그런데 이 완전성은 구성적인것이 아니라 인간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외부적이고 강압적이다. 공자는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의 교육을 통해 인간성의 완성을 추구하는 교육을 주창하였다.
그런데 이 시서예악 역시 은주시대의 전승을 계승하는 것이지 결코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것이 아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교육의 목적을 도달해야할 어떤 고정된 경지를 전제한다는것이다. 따라서 교육 내용은 학생들의 내면과는 무관하게 완전하게 제시된다. 교육 내용은비판과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며 학생들이 무조건 도달해야 할완전성의 전범이 된다.
이렇게 학습내용을 학생의 외부에서 부과하는 전통주의 교육은 학생들의 구체적인 삶과유리되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Dewey, 1944). 전통주의 교육은 인간성의 완성을 향한 도야라는 고유의 목적에 복무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전승된 학과와 지식을 규범화 함으로써 학습자의 삶과 유리된 고답적 교리문답에 그쳤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전통주의 교육 패러다임은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온존하고 있으며, 특히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고, 보다 손 쉽게 가르치기를 희망하는 교육자들에 의해강하게 지지받고 있다. 물론 이들은 교리문답을 벗어나 ‘지식’ 대신 ‘지력’을 강조하면서 나름 변화를 꾀하였지만, 이 ‘지력’의 바탕 역시 전통적인 지식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여전히 전통주의적이다. 브루너, 피터스 등에 의해 이른바 ‘학문중심 교육과정’, 혹은 ‘교과중심 교육과정 이 현대화된 전통주의의 ’ 대표적인 사례다. 이 지력은 비판적 사고력, 반성적사고력이 아니라 인류의 지적인 유산과 학문을 터득하고 계승할 수 있는 능력인 것이다.
“인간 자본론”은 오늘날 마치 교육을 위한 유일한 방향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보편화 되어있는 패러다임이다. 이 패러다임은 흔히 말하는 “인재 육성”이라는 말 속에 가장 농축적으로 표현된다. 물론 이 인재는 교육이 필요로 하는 인재가 아니다. 교육에 비용을 투자하는 주체가 요구하는 인재다.
이 패러다임에서 교육은 일종의 투자며 그 결과 만들어지는 “인재”의 능력이 산출이 된다. 당연히 산출은 투자보다 커야 한다. 교육은 이 산출을 얻어내기 위한 과정이며, 최소화 되어야 할 일종의비용에 불과하다. 따라서 인간자본론에서는 교육의 결과를 분명하게 명시하고 그 결과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학생은 생산품이 될 재료로 간주되며 완성된 학생은 국가와 기업이 유용하게 사용한다. 그 최종 결과는 교육을 통한 질 높은 노동력의 생산과 이를 통한 국민수준 향상으로 사회통합력 증대가 될 것이다.
이 역사는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리아드에서 등장하는 “말과 행동”을 배운다는, 즉 연설과 무술이 교육의 거의 전부라는 속에서, 시민에게 필요한 기술인 웅변, 수사를 중심으로 모든 학문을 배치한 로마의 교육 제도 속에서, 훌륭한 신민을 양성하여 나라를 융성하고자 했던 카를루스 대제의 학교조례 속에서 이 패러다임은 계속 반복된다. 이는 교육은그것을 받는 사람의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기본 바탕에 전제해 있다. 그 능력은 경우에 따라서 전투력이 될 수도 있고, 지력이 될 수도 있으며, 혹은 생산력이 될 수도 있다.
인간자본론은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관철된다. 사회적으로는 투자된 결과 산출되는능력이 그 당시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관철된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개인이그 능력을 획득함으로써 사회에서 자신의 지위와 보상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관철된다.
즉 인간자본론은 개인 차원에서는 “많은 보상을 받기 위해”교육을 받게 만들며, 사회 차원에서는 “쓸모 있는 구성원을 생산”하기 위해 교육을 하게 만든다.
19-20세기를 거치는 동안 인간자본론은 공교육의 비용을 전담한 민족국가에 의해 사실상유일한 패러다임으로 강요되었다. 이미 18세기 라 샬로트(La Chalote)는 평화시에는 유능한 일꾼이며, 전시에는 맹목적 충성으로 무장한 군인을 양성하는 것이 공교육의 목적으로공공연히 선언하였다. 또 라 샬로트는 표준화된 교육과정, 교과서 등을 이용해 숙련된 교사의 필요를 줄임으로써 투자를 줄이는데 성공하였다(Boyd, 1964). 이는 공교육 체제의 선두적인 나라였던 프로이센과 프랑스에 의해 채택되었고, 이를 수입한 일본에 의해 우리나라에 수입되었다.
후기산업사회에서는 그 비인간적 속성 때문에 전통주의와 진보주의 교육학 양측의 공격으로 거의 섬멸된듯 했던 인간자본론은 지식·정보사회의 도래와 함께 다시 일어서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과거 인간자본론이 교육의 과정 속에서 습득되는 노동자로서의 규율 등의 훈육적 요소도 강조했다면 새로 등장한 지식·정보사회의 인간자본론은 지식교육 그 자체를 생산력으로 간주하고 잇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적자본론은 21세기 공교육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공교육의 주요한 목적은, 경쟁적이고 점증하는 세계화와 지식정보사회의 변화되는 요구에 맞춘 국가노동력의 생산이다.”(Cochran-Smith, 2005).
오늘날 세계은행, IBRD, OECD, APEC 교육 포럼, 그 외 수많은 국제경제 기구들이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다 국제 무역기구의 . 서비스 무역에 대한 일반 협정(GATS)에 교육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도 이 견해에 대한 강한 지지를 암시한다. 이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노동력의 교육, 재교육 비용이 증가하자 이를 사회에 떠넘기고자 하는 기업들의 욕구가 반영된 것이다.
인간자본론 패러다임에 가장 적합한 교육과정 모델은 목표중심 교육과정이다. 주지하다시피 목표중심 교육과정은 최종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교육 활동의 체계적 배치를가장 중요시하며, 특히 목표의 달성여부를 측정하기 위한 평가가 활동의 핵심을 차지한다.
목표중심 교육과정은 행동주의 학습이론과 결합하여 교육을 하나의 공학적 조작의 대상으로만들어 놓았으며, 정밀하고 양적으로 측정 가능한 평가에 교육 목표와 과정을 종속시키고말았다. 이런 의미에서 목표중심 교육과정은 사실상 평가중심 교육과정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또 목표중심 교육과정은 오늘날 한국의 거의 모든 교육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되고있다. 개인적 차원에서 관철될 경우 맹목적인 입시교육과 영어 광풍의 원인이며, 사회적 차원에서 관철될 경우 획일적 강제의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이홍우, 1992).
오늘날 공교육의 이 두 패러다임들은 모두 강한 도전과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 두 패러다임은 사실상 모두 실패했다.
인간자본론은 교육에의 투자가 실제 그 만큼의 경제적 산출이 되지 않는다는 여러 경험적 증거들에 의해 심각한 비판을 받았다. 우선 교육의 목적이 어떤 생산력으로 규정될 경우 이는 학습자 외부에서 부과되는 강제력이 되어 심각한 무기력과 소외의 원인이 된다는 점이
지적되며, 지나친 기능주의로 인해 정서와 인성을 경시하는 문제도 지적되고 있다. 오늘날교육을 받을수록 학생들의 생각이 편협해지고 인성은 황폐해지는 저변에 인간 자본론적 교육 패러다임이 깔려있다(Kuehn, 2005).
인간자본론은 교사와 학생의 관계, 그리고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인간자본론은 오직 “산출”에만 초점을 맞춘다. 의도된 산출을 정의하고 그러한 산출과 관련되는 결과의 피드백 시스템을 유지함으로써 교육 통제의 권력은 소수의 손아귀로 집중된다. 교사들은 다른 사람이제시한 교육의제를 수행하는 자동인형 노릇을 요구받는다. 자동인형 교사는 자동인형 학생을 길러내며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이 되는 공중의 생산을 가로막는다. 게다가 인간자본론은인간을 판매 가능한 노동력과 등치한다. 만일 사람이 시장에서 팔 수 있는 무엇인가를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은 우선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이 되어야 한다. 교육이 상품이 된다는 것은표준화되고 측정을 통해 수치로 비교 가능해야 함을 의미한다(Kuehn, 2005). 평가의 내용이 가르쳐지는 내용과 방법을 정의한다. 깊이 있는 비판적 사고보다 평가에서 중요한 것이실제가 되며, 교육학적 접근은 단지 학생들에게 평가될 것을 학습케 하는 전달 수단이 된다(이홍우, 1992).
그 결과 교사와 학생간의, 또 학생들 간의 복잡한 관계들은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되고,교사의 능력은 목록화되고 평가는 획일화된다. 평가된 수치가 중요할 뿐, 학습의 영역을 확장하고 학습자와 공동체를 만들고 학습 환경을 풍부하게 하는 것은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버려진다. 이렇게 인간자본론적 교육 패러다임이 도달하게 되는 최종지점은 삭막하고 메마른 숫자로 가득 찬 교실이다 . 인간자본론은 미래의 생존수단 제공을 미끼로 이 삭막한 교실로 아이들을 끌어들인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는 인간자본주의가 전통적인 입신양명(立身揚名)교육관과 결합하면서파괴적인 위력을 발휘 했다. 이렇게 되면 교육의 내용과 목표는 지극히 협소한 개인적 성공과 출세에 종속되게 된다. 만약 그것이 성공과 출세에 도움이 된다면 유교 교육이든, 서양학문이든, 친일교육이든, 심지어 부도덕한 교육이든 가리지 않고 투자하는 것이 한국 교육의 현실이다. 이제 입신양명을 위한 개인주의적 인간자본론은 가히 교육광기의 경지에 이르러 학생들의 신체와 정신을 파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반면 전통주의 패러다임은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고답적이라서 학생들의 현실과 동떨어져있다는 비판을 많이 들어왔다. 또 이는 교육을 통한 신분제의 관철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비판을 받았다. 전통주의 교육은 학교를 학생들의 삶과 경험과 전혀 무관한 의미 없이 강요되는 공간으로 만들어버렸다. 최근 전통주의 패러다임의 가장 중요한 축인 인간 정신의 부소능력들의 훈련과 전이효과라는 형식 도야론의 명제들이 경험적 연구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또 다중지능 이론 등의 등장으로 고전을 중심으로 편성된 인문학의 특권적 지위 주장이 어렵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전통주의 교육의 목적과 과정이 모두 추상적이라서 교육자의책무성을 부과하기 어렵고, 학습자 성과를 확인할 수 없어 엄청난 국고를 사용하는 공교육에 적합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이는 곧바로 생산과 직결되지 않는 학문과 교과의 축소,직접적인 산학협동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 주장으로 연결된다.
두 패러다임의 실패의 원인은 공교롭게도 동일하다. 그것은 교육을 다른 가치 있는 것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 목표가 유능한 노동자가 되었든, 아니면 좋은 문화적 전승을 받은 교양인이 되었든 그것은 교육 밖에서 설정된 좋음이다. 이렇게 교육이 다른 좋은 것의 수단으로 사용되면 교육은 짧을수록 좋은 것이 되며 장차 얻게 될 좋은 상태를 위해 거쳐 가야 하는 필요악과 고역이 된다.
교육을 통한 입신양명의 욕구가 강한 한국의 부모들은 한 결 같이 자녀가 인문교육을 받아 고위직에 진출하거나 정신노동에 종사하기를 희망하였다. 그 결과 교육의 목적 전반이 왜곡되었다. 개인주의적 인간자본론과 전통주의 교육이 결합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육의 근원 문제를 야기시킨 최악의 조합이다.
이 최악의 조합은 국가, 기업이 유포시킨 인간자본론이 개인 차원에서 엉뚱하게 수용된결과다. 사실 국가나 기업의 입장에서는 인문교육을 받은 학생이 늘어나는 것이 달가운 일이 아니다. 소수의 엘리트만 그런 교육을 받고 대다수는 직업교육을 받아서 유능한 노동력으로 성장하는 것이 인간자본론 패러다임의 핵심이다. 그러나 부모에게 내면화된 인간자본론은 전혀 엉뚱한 것이다. 그들 역시 교육의 과정보다는 산출에 모든 것을 걸었다는 점에서는 인간자본론을 공유하고 있다. 만약 대학을 가지 않고도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면 자녀를 굳이 대학에 진학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은 전통주의자들은 아니다. 다만 전통주의 패러다임에 입각한 인문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사회적 대우가 더 높기 때문에 자녀가 그 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 문화적 전승, 인격의 도야 따위는 관심사가 아니다.
그 결과는 교육 내용과 학습방법에서는 획일적이고 답답한 전통주의적 패러다임이 거의고착화되어있는 반면, 교육 목적에서는 개인주의적 인간자본론이 기승을 부리는 최악의 조합이 탄생하였다 . 전자로부터는 최악의 관료주의와 획일성이, 후자로부터는 살인적인 입시경쟁이 파생되었다. 전통주의와 인간자본론의 기묘한 결합은 한국 교육문제, 아이들의 고통의 근본악이다. 차라리 원래의 인간자본론은 어쨌든 생산력에는 기여하지만, 한국의 인간자본론은 생산력에 기여하지 못하는 고등실업자만 양성한다. 어쨌든 원래의 전통주의는 문화의 전승에는 기여하지만 한국의 전통주의는 문화적 전승을 시험점수 받고 나면 잊어버려도 되는 것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기존의 두 교육 패러다임들의 한계가 드러나고, 개인의 삶의 질을 국가가 보장·증진해야한다는 복지(Welfare)의 개념이 보편화 되면서 인문교육과 생산력 교육의 차원을 넘어선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였다. 이를 교육복지패러다임이라 통칭할 수 있다. 이 패러다임의 중핵은 교육은 교육받는 사람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에 있다. 즉 교육의목적은 사회적 생산력과 필요도 아니고, 문화의 전승도 아닌 개인의 삶의 질에 놓이게 된다. 이 경우 교육은 학생들이 수행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국가가 제공하는 공공의 서비스가된다. 즉 교육은 받으면 “좋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시민들에게 국가가 이를 공평하게 제공하는 것이다.
교육이 가진 이러한 복지적 기능은 중세가 해체되면서 빈부차가 본격화되기 시작하던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루터는 교육을 통해 모든 어린이들을 타락에 구렁텅이에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산업혁명과 함께 빈부차가 극도로 커지고 인간소외현상이 나타나자 아담 스미스 등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은 교육을 통해 이런 고통을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바제도브를 비롯한 독일 박애학교의 설립자들은 경제적, 도덕적으로 열악한 상태에 있는 빈곤층 아동들을 국가가 수용하여 교육함으로써 빈곤의 구렁텅이가 재생산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페스탈로찌에게도 일부 이어지면서 마침내 독일 공교육의 기본 바탕이 되었다(Boyd, 1964).
사회보장제도의 확대와 함께 이는 더욱 강화되었다. 빈곤층, 취약지역에 대한 교육적 지원이 강화되었고, 이를 통한 사회 불평등의 해소를 기대하였다. 그 결과 교육은 복지사회이념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활동되면서 국가의 개입도 증대되었다(김신일,1980, p. 141).
교육복지를 그 목표와 적용대상에 따라 소극적 복지와 적극적 복지로 분류할 수 있다. 소극적 복지는 사회적 취약계층에게 동등한 교육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며, 주로 의무교육 제도를 통해 구현된다. 복지의 대상은 주로 사회적 취약계층과 빈곤층이다. 즉 이는 사회적 취약계층과 빈곤층이 이른바 공정한 게임에 참가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는 기회의 평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홍봉선, 2004).
최근 영국과 미국은 교육복지를 고용과 연결시킴으로써 기회의 평등이라는 측면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미국의 교육 복지는 교육 . 혜택의 제공에서 숙련기술 획득을 통한 일자리 획득기회 증가로 선회하였다. 그 결과 취약계층의 숙련기술 획득을 위한 교육복지정책이 강화되었다.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계급 재생산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 영국의 EAZ역시 이와 같은 복지 개념을 사용하여, 저소득층, 취약지구에서의 기술교육, 직업교육에 국가 지원을 집중하였다(천세영, 2002). 그 결과 교육복지는 취약계층의 노동력을 생산하는정책이 됨으로써 인간자본론과 융합되었다.
적극적 복지는 여러 사회집단들이 교육의 과정과 결과에서도 평등에 수렴하여 궁극적으로 사회정의를 구현 할 때 달성된다. 여기에는 교육이 빈곤층 학생들의 생계를 위한 기술 제공 이상의 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넓은 차원의 교육복지 개념이 작용하고 있다. 애플(Apple)은 그 이상의 것으로서 "사회적 교육, 민주적 교육”을 제시하였다. 이는 교육이 학생들로 하여금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지식 형성 과정에 참여할 기회와 능력을 제공해야 하며, 또한 자신의 삶과 관련한 중요한 결정과정에 참여하고 결정할 기회와 능력을 제공해야 한다는 의미다.
교육복지는 교육을 중심으로 어떤 위치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교육 안에서의 교육복지관과 교육 밖에서의 교육복지관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이는 교육에 대한 관점, 그리고 복지에 대한 관점에서 모두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교육 밖에서의 교육복지란 복지와 교육이 별개의 것인데 교육이 복지에 도달하는 한 방편으로 사용된다는 의미다. 저소득층에 대한 교육지원을 확대하여 사회 불평등을 해소한다거나 교육을 통해 사회 통합력을 높여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등의 정책이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이에따라 교육은 주로 생존 혹은 삶의 개선에 기여하는 기술과 능력을 제공받는 행위가 된다. 따라서 사회적 약자나 빈곤층에게 양질의 교육 서비스가 제공된다면 장차사회 불평등은 해소될 것이라 기대한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면 필연적으로 복지정책이 교육의 구조, 내용, 방법, 심지어는 존폐 여부까지 결정하게 된다(이홍우, 1999).
공교육은 사회적 평등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재구성되며 특히 저소득층이나 취약지역 아동·청소년의 갱생을 위한 특별한 학교나 프로그램 등의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주로 무상 의무교육에 이어 다양한 실업, 직업교육을 담당하는 학교의 각종 저소득층 자녀 혜택 등이 제공된다. 이 관점은 불평등 해소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성을 교육에 강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자본론을 극복했다기 보다는 또 다른 변주에 가깝다. 미국의NCLB 정책은 교육이 복지의 수단으로 사용될 때 인간자본론에 얼마나 쉽게 포섭되는지 잘보여준다.흔히 사람들은 이런 의미로 교육복지라는 용어를 사용해 왔으며 지금까지 국가 중심의 교육복지는 대개 이러한 관점에 서 있었다(남미정, 2003).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교육 안에서의 교육복지 관점은 교육이란 것 자체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여러 복지 혜택, 즉 행복을 주는 것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을 통해 얻은 결과가 아니라 교육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복지가 된다는 것이다(한국교육학회 편, 1980, p.99).
이 관점에서 교육은 문화적 혜택이며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페라나 전시회 등의 문화적 체험을 통해 다른 결과를 얻고자 하지 않는다. 또 이런 경험을 저소득층에게 제공할 때 이를 바탕으로 불평등이 해소될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경험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불평등의 해소로 간주된다. 교육 역시 복지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복지의 내용으로 간주되며, 경제적 자원과 교육은 모든 국민들에게 충분히 제공되어야 하는 동일 차원의 자원이 된다.
이 관점에 서게 되면 저소득층이나 사회적 약자에게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실업교육을 강화하는 것은 오히려 반복지적 교육이 된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차별 없이 수준 높은 인문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인문교육은 그 자체의 쓰임새 때문이 아니라 앎과 깨달음을 통해 삶의 의미를 풍성하게 하는 행복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學而時習之不亦說乎에는 인문교육의 이상이 가장 함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복지는 돈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분배하는 것이며, 그렇다면 이런 배움의 행복은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기존의 두 교육 패러다임의 문제점을 극복할 것으로 기대되었던 교육복지 패러다임은 뜻밖에도 많은 암초를 만났다. 이는 비단 교육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복지국가 패러다임 전반의 좌초와 관련되어 있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할 것이라 기대되었던 복지국가 패러다임은 체제 자체가 가진 모순과 여러 부작용으로 인해 다시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여기에 대한 공격이 신자유주의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가 그 대안이 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60-70년대의 유럽식 복지국가 모델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Habermas, 1992).
교육복지에 대한 비판들은 사실 신자유주의보다 오히려 진보진영에서 더 먼저, 그리고 섬멸적으로 제기되었다. 이 비판들은 크게 교육복지가 동기저하, 비효율성, 관료주의로 인한억압의 증가로 요약된다(이기범, 1996).
동기 저하는 교육복지가 너무도 쉽게 무상으로 주어진 결과 대부분의 국민들이 교육에 대한 심각한 동기저하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복지만을 요구하게 되며 거기에 따른합당한 업적을 회피하게 된다(Offe, 1984, pp.67-73, 이기범, 1996 재인용). 비효율성은 교육복지 정책이 거기에 투입되는 예산에 비해 실제 사회 양극화, 불평등 해소에 그다지 기여한 바가 크지 않다는 것이다(Offe, 1984, p.154, 이기범, 1996 재인용).
관료주의는 이미 수 없이 지적된 병폐로 교육복지 정책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교육에 대한 국가의 관여가 증대하고 그 결과 정부와 관료들의 교육통제가 심화되어 결국 교육이 체계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Habermas, 1989).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교육 복지 정책이 오히려 그 수혜자인 빈곤층, 소외계층을 철저하게 대상화함으로써 그들을 수동적으로 만들어 자립의기반을 제거하여 복지 제공자의 기준과 규범에 순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Foucault, 1979, p.184).
이러한 비판들은 결코 가볍게 넘겨들을 것들이 아니며, 1970년대 사회복지국가의 근본적인 모순을 지적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양극화를 재생산하는 자본축적의 확대를 통해 양극화를 해소하고자 했던 70년대 사회복지 모델은 국가의 무제한적 채무확장을 통해서만 유지될수 있는 모순적 체제였고, 신자유주의는 더 이상 손쓰기 어려울 정도로 확장된 국가 채무를 이른바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려는 자본가들의 공격적 운동에 다름아니다(Dyer-Witherford, 1999).
따라서 무상으로 제공되는 획일적인 공교육, 균등한 기회와 결과의 평등이라는 과거 모델을 고수하는 것만으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자유주의가 요구하는 인간자본론과 전통주의의 분할 교육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과거의 두 패러다임의 복귀를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교육복지가 아직까지 유력한 대안이라고 보아야 하며 그것의 ,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까지 국가가 주도한 교육복지는 교육 밖의 복지 관점에서 실시되었으며, 소극적 복지에 치중하였다. 따라서 앞에서 제시한 여러 문제점들은 교육복지 자체의 문제점이라기보다 특정 교육복지 관점의 문제점으로 간주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육복지의 패러다임은 유지하되 그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그런데 많은 문제점을 야기한 지금까지의 교육복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는 결국 소극적 복지의 문제이며 교육 밖에서의 복지 정책의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다. 교육 밖에서의 복지관점에 서게 되면 교육복지의 달성여부는 그 결과 산출하게 될 교육 외적인 목표의 달성여부에 의해 결정된다. 그 척도는 경영학이나 행정학적인 것이 되며, 만약 교육이 평가지표상의 사회 양극화 해소 등 여러 복지정책의 목표에 기여했다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교육의과정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이는 인간자본론과 섬찟할 정도로 닮은 모습이다. 앞에서 지적한 교육복지의 파탄은 사실상 교육복지가 아니라 인간자본론의 파탄인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교육복지는 아직 제대로 실현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교육복지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육 밖에 있는 복지 관점을 교육 안으로 교정할 필요가 있다. 이는 또한 생존에 필요한 기본 기술과 능력을 학습할 권리라는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교육을 통해 공공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완성될 권리,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교육을 받을 권리, 알고자 하는 것을 배울 적극적인 복지관점을요구한다.
교육의 권리는 국가로부터 제공받는 최소한의 서비스가 아니라 국가의 주인으로서 요구하는 최대한의 권리다. 모든 국민은 좋은 주거환경을 요구할 권리가 있듯이 좋은 교육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렇게 관점을 전환하면 교육복지는 소극적 복지가 아니라 적극적 복지의모습을 가지게 된다. 또한 그 척도는 교육 밖의 목표 달성을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잘 배웠는가”, “좋은 교육을 받았는가”의 차원, 즉 교육학적 문제가 된다.
이제 교육 안에서의 교육복지를 교육 그 자체만으로도 복지가 된다는 의미에서 간단하게 복지로서 교육이라 부르기로 하자. 그렇다면 복지로서 교육은 인간자본론과 전통주의 패러다임을 전면 부정하는가 아니면 이들을 포괄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 패러다임이 선행한 두 패러다임을 포괄하지 못한다면 구태여 국가가 돈을 대는 공교육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며, 개인 입장에서는 굳이 이러한 교육을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 차원에서 볼때 복지로서 교육은 고차적 욕구를 충족시키며, 그 자체 보다 고차적인 욕구를 생산한다. 이는 저소득층의 갱생에만 집중한 소극적 교육복지가 놓친 지점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근대 사회의 문제는 단지 빈곤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행복의 기회를 물질적 충족과 소비로 축소시켜버렸다는 것이 더욱 큰 문제다.
사실 제도를 통해 혹은 교육을 통해 경제적 평등을 달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과제다. 다양한 욕구의 차원을 열어줌으로 인해 행복의 평등을 달성할 수 있다. 복지로서 교육은 바로 이 부분을 해결해 줄 수 있다. 행복은 어떤 물질적 조건을 갖추어 주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은 자유로 향하는 길은 배워야 하는 것이다. “가난해도 마음이 부자인 사람”은 그저 가난하다고 해서, 혹은 가난한 사람에게 약간의 경제적 기회를 더 제공한다고 해서 생겨나지 않는다.
물론 복지로서 교육은 이런 정신적 행복에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질적인 경제적 평등에도 기여할 수 있다. 복지로서 교육을 받은 사람은 창조적이고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가되며, 인류의 지적·문화적 유산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이는 협소한 몇몇 산업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훨씬 넓고 큰 가능성을 열어준다. 기술은 학원에서 배워도 되지만 이런 지적·문화적 유산과 창조적인 유산은 공교육이 담당해야 하며 그 혜택은 모든 계층에게 골고루 돌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복지로서 교육의 패러다임 전환이 가져오는 가장 큰 효과는 비로소 교육이 시민의 권리로서 자리잡는다는 것이다. 인간자본론의 입장에서 교육은 생존경쟁을 위한 외적 압력이다. 전통주의에서 교육은 문화적 전승과 공동체의 유지를 위한 강력한 강제로 나타난다. 게다가 교육 밖에서의 교육복지는 사실상 사회적 평등이라는 목적을 위해 정부에 의해 강제되는 교육 통제가 되었다. 그러나 복지로서 교육은 그 목적이 교육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학습자의 욕구와 상태가 중요하게 고려될 수밖에 없다.
이때 비로소 학습자는 자신이 교육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며 진정한 복지에 이르게 된다. 이 관점에 설때 비로소 교육은 사실상 선택지를 인간자본론으로 제한하고서 수요자의 선택권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교육 이데올로기의 후안무치함을 극복할 수 있다.
복지로서 교육은 생산력에도 기여한다. 인간자본주의 패러다임은 산업사회의 혹은 포드주의 시대의 생산력 개념에 기반하고 있다. 그러나 지식·정보사회에서는 그러한 집체적이고 획일적인 지식과 기능은 더 이상 생산력의 핵심을 이루지 못한다. 지식과 창조적 노동이 생산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이다(Dyer-Witherford, 1999). 산업 생산물 역시 19-20세기와 같은 물질적 생산물이 아니다. 이미 생산은 물질적 의미를 넘어 정서적(sentiment) 영역으로 넘어서고 있다. 이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소통(communication)과 창조의 능력이다. 물론 인간자본론적 입장에서 창의성 교육을 강요하는 정책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이러한 능력은 투입과 조작을 통해 달성되지 않는다. 교육의 과정 자체가 지식의 창조이며 소통일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복지로서 교육은 인간자본론보다 지식·정보 사회에서 생산력 측면에서도 더 탁월하다.
국가적 차원에서 복지로서의 교육은 민주주의의 터전이 된다. 여기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좋은 국가는 좋은 시민에 기반한다.”라는 명제의 진정한 의미에 도달하게 된다. 이는 단지 유능한 인간을 의미하지 않으며, “시민으로서” 좋음을 의미한다. “시민으로서”좋기 위해서는 생존에 필요한 기능을 익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사려깊음”, “관용”, “현명함”같은 덕목들이 요구된다. 당연히 이런 덕성을 갖춘 시민들이 많은 나라는 훌륭하게 민주적으로 운영될 것이다.
만약 교육복지를 소극적이고 교육 밖의 관점에서 주장하는 정부가 있다면 이는 사이비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이 속에는 빈곤층의 자녀들은 지극히 편협한 생산적인 일에 종사하면서 생존만 유지하면 된다는 차별의식이, 그들이 공공영역에서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을 전혀 바라지 않는 편협함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사려있는 시민들을 바탕으로 한다. 사려있는 시민들은 그저 태어나지 않으며, 그저 교육받는다고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그들은 교육다운 교육을 받아야 하며 그 교육은 단지 생존기술을 익히는, 혹은 자신을 노동력으로 생산하는 그런 교육이 아니라야 한다. 그 교육은 자신의 지적, 정서적 성장과 완성에 기여하는 그런 교육이라야 한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시민은 자신의 삶이 “지킬만한 가치가 있음”을, 그리고 그런 삶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구현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단지 과거의 유산을 통해 조국의 자랑스러움과 긍지를 강요받은 학생보다 실제 자신의 행복을 통해 자랑스러움과 긍지를 획득한 학생이 더욱 공동체에 헌신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이런 의미에서 복지로서 교육은 전통주의 패러다임보다 사회 통합적 효과와 문화적 전승에서 더 탁월하다.
또한 실용적 측면에서 바라볼 경우 복지로서 교육은 국가로 하여금 공교육이 구체적인 산출을 내어야 한다는 압력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인적자본론은 공교육의 결과 생산성의 향상, 혹은 학력의 향상이 구체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전통주의적 교육은 공교육의 결과 사회적 통합과 문화적 전승이 더 확고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1970년대 교육복지 패러다임은 사회 불평등의 감소가 구체적으로 입증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러나 복지로서 교육 관점을 취할 경우 국가는 이런 요구에 응답할 이유가 없다. 오직 교육자와 학습자가 교육을 통해 만족하고 행복하면 그만이다.
지금까지 복지로서 교육의 관점 전환이 개인, 생산력, 국가 차원에서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였다. 복지로서 교육은 지식·정보 사회에 적합한 창조적이고 자발적인 인간을 육성함으로써 탈산업사회에서 인간자본론보다 생산력에 보다 효과적인 교육패러다임이 된다. 복지로서 교육은 문화전승에 대해 스스로 동의하고, 스스로 가치 부여 하도록 함으로써, 문화전승과 전통이 개인의 행복과 연결되게 함으로써 공동체 통합의 힘에서 전통주의 교육 패러다임보다 오히려 탁월하다. 또한 복지로서 교육은 과거 교육복지 정책의 문제점들로 제기되었던 부작용들, 즉 사실상 교육이 책임 질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질책으로부터 교육을 해방시킨다.
이와 같이 복지로서 교육 관점을 취할 경우 교육복지 패러다임은 인간자본론과 전통교육 패러다임이 목표로 하고 있는 바를 더 훌륭히 달성하며, 구 교육복지 패러다임의 문제점도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복지로서 교육이라는 관점을 취할 경우 교육복지 패러다임은 전통주의와 인간자본론을 극복하면서 통합하는 포괄적 교육패러다임으로 자리잡을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공교육이 제공하는 교육 복지의 관점을 교육 내적으로 돌림으로 인해 교육복지는 구체적인 산출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취약계층과 빈곤층에 한정되는 편협한 교육복지를 넘어섬으로써 복지로서의 교육을 전통주의나 인간자본론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교육 패러다임으로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복지를 중심으로 공교육을 재편하기 위해 무엇이 해결되어야 하며, 이렇게 될 경우 어떤 공교육의 상을 가지게 되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교육이 그 자체로 복지로 기능하기 위해서 해결되어야 하는 선결과제는 수용자의 상태와 여건을 개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클레멘트 운동 등의 고무적인 사례들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배우고 익히는 기쁨은 그저 주어진다고 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칙센트미하이(Czikszentmihayli, 1991)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고차적인 활동을 통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동에너지는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따라서 복지로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회적 취약계층, 빈곤층, 문화적 소수자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다. 이들에게 무작정 보편적 가정하에 교육이 주어진다면 아무리 그 내용과 목적이 복지에 바탕하고 있다 하더라도 무의미한 강압에 불과할 것이다.
복지로서 교육의 관점을 취하면 교육복지의 범위는 크게 확대된다. 이를 비교하면 <표 1>과 같다. 이는 기존의 좁고 관료적 교육복지를 넓고 자율적인 교육복지로 확대해야 함을 의미한다. 교육복지는 기존의 빈곤층을 대상으로 하는 의무교육과 직업교육 수준의 최소한 교육기회 제공에서 배우고 성장하고자 하는 모든 시민들의 교육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으로크게 확대된다. 또 교육의 주체도 국가기관에서 배우고 가르치고자 하는 모든 개인과 단체로 확대된다. 그 내용도 단지 최소한의 교육내용을 넘어서서 평생교육과 삶의 질의 영역을 포괄하게 된다.
이렇게 교육복지의 범위가 확대될 정부는 교육복지의 수혜자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야 한다. 일부 빈곤층만을 대상으로 하던 협소한 교육 복지 모델에서 그 대상자는 국가의 혜택을 받는 수혜자에 불과하였다 . 따라서 이들은 국가가 정한 절차와 기준에 따라 엄격히 선발되어야 했으며, 여기에 선발되고 혜택을 계속 받기 위해서는 일정 수준의 규제와 통제도 감내해야 했다. 이렇게 되면 교육복지의 수혜자는 철저히 객체로 다루어진다. 교육의 내용, 범위, 방법은 모두 국가가 결정하며 수혜자는 여기에 의견을 제시 할 수도 이의를 제기 할 수도 없다. 실업계 고등학교로 집중되는 학비지원을 과학고나 외국어고에도 확대하라는 요구는 혹은 각종 예체능 학원에도 확대하라는 요구는 이러한 좁은 관점에서는 거의 받아들여지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복지로서의 교육은 시민들의 삶에 기여하고 행복을 증진할 수 있으며, 그것이 반사회적이 아니라면 어떠한 교육적 욕구에도 국가가 응답하여야 한다.
물론요구가 있다고 해서 모두 시행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응답하고 소통해야한다는 의미다. 복지는 국가가 제공하는 혜택이 아니라 시민과 국가간에 주고받는 욕구와 수혜의 상호작용의 결과다.
기존의 교육패러다임들은 모두 질이 아니라 양에 기반하고 있다. 전통주의 패러다임은 학습자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이수시간과 평가 성적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인간자본론은 최종 산출과 최초 투입의 양적인 비례에만 관심을 가진다. 기존의 사회복지 모델 역시무상교육, 무상의료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수혜자의 최소한의 기준을 설정, 수혜의 정도 등을 철저히 양적으로 규율한다. 그러나 복지로서의 교육은 그 수혜자의 수, 그 수혜액의 양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복지는 교육이 행해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수혜자의 삶의 맥락, 희망, 욕구와 무관하게 양적으로만 주어지는 혜택은 전혀 복지가 아니다.
진정한 복지는 학생, 학부모의 삶의 맥락과 욕구의 맥락 속에서 주어져야 하며, 이는 정부가 획일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교사와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즉 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내용, 교육방법과 교육복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육 복지는 양이 아니라 질적인 개념이 된다.
물론 기존의 교육복지의 양적 획일성을 비판하고 질적인 수준까지 그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주장은 신자유주의에서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철저히 인간자본론의 입장에서 교육의 질을 논의한다. 이는 증폭된 양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교육의 질은 학생과 교과의 관계, 학생과 교사의 관계의 질에서 결정되어야 할 것이다. 복지로서의 교육은 이 질의 수준을 높이는 것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복지로서 교육의 관점을 취하면 정부가 지원해야 할 교육의 범위가 크게 늘어난다. 이렇게 될 경우 가뜩이나 비대해진 정부의 문제점을 확대하지 않을까 하는, 따라서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더욱 강화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자극한다. 그러나 복지로서 교육은 복지 수혜자의 능동적 위치를 강조하기 때문에 오히려 지원이 늘어나는 만큼 정부의 통제는 줄어들게 된다. 다양한 교육적 욕구에 일일이 조응하는 국가기구와 제도를 수립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또 복지로서 교육은 결과의 산출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행복에 의해 평가받는다. 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상호작용, 상호 공유하는 배경지식, 생활세계의 맥락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당사자가 아니면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따라서 국가는 여기에 직접적인 개입이 불가능하며 지원과 조정의 역할만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 통제는 오히려 교육복지의 범위가 좁아서 국가의 통제 범위 내에 있을 때 즉 수혜의 , 대상과 범위를 국가가 선택할 수 있을때나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복지로서 교육은 국가의 지원을 받지만 국가가 주도하는 총체적이고 거대한 프로그램이 아니라 학교 안팎에서 행해지는 자발적이고 작은 교육 실천들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다양한 교육적 욕구는 다양한 삶의 맥락에서 나타날 것이며, 그 맥락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정부 담당자가 아니라 교육자와 피교육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복지의 주체는 정부가 아니라 학생들, 학부모들, 그리고 교사와 교직단체들이 된다.
지금까지 교육을 지배해 온 두 패러다임인 전통주의와 인간자본론이 가져온 재앙을 살펴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교육복지 패러다임의 가능성을 모색해 보았다. 그 결과 취약계층의 갱생이라는 협소한 관점의 교육복지는 앞의 두 패러다임과 함께 교육을 단지 어떤 산출을 내기 위한 수단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교육복지의 관점을 교육 밖에서 안으로 돌림으로써, 즉 교육을 복지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 복지로 바라봄으로써 이러한 문제점이 해결되면서 전통주의, 인간자본론 두 교육패러다임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은 교육복지의 위상의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이제 교육복지는 공교육이 다루어야 할 한 부분이 아니라 공교육이 궁극적인 준거로 삼아야 하는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을 수 있으며, 그 범위는 학령기, 학교를 넘어 전 생애와 사회로 확대된다. 반면국가는 지원은 하되 통제는 하지 않는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로서 교육은 지식·정보사회에 적합한 생산력, 사회통합력, 그리고 개인의 행복에서 모두 전래의 패러다임보다 탁월하다.
그러나 살펴본 바와 같이 복지로서 교육 패러다임의 핵심은 교육복지의 객체가 주체로 전환됨에 있다. 피교육자들이, 그리고 교사들이 단지 복지의 수혜자가 아니라 복지의 요구자로서 또 참여자로서 적극적으로 욕구를 조직화하고 이를 공론화 할 때 비로소 공교육 패러다임의 변화가 가능할 것이다. 이는 공교육의 중심 관점을 복지로 설정해야 함을 의미하며, 이 복지는 무상교육 수준을 넘어서서, 교육의 내용, 교육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학생들의 ‘행복’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재구성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패러다임은 가치관과 방법론의 저변에 깔린 전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패러다임의 전환은 그것에 수반한 교육 전반의 재구성을 의미한다. 물론 그 동안 우리 교육은 수많은 크고 작은 변화를 겪어왔다. 그러나 패러다임 전환 없는 변화는 지엽적인 것으로 그치거나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이제 복지로서 교육을 중심으로 신중하지만 분명한 공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 변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최악의 관료주의와 최악의 입시지옥 문제는 그 근본에서부터 해결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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