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교사 Aug 24. 2020

공부만 잘하면 뭐해, 인성이 발라야지?

이 글은 인성교육법이 발효될 무렵, 이를 비판하면서 쓴 글이다. 월간지 <민들레>에 게재되었던 글이다. 그런데 최근 '민주시민교육법' 과 관련하여 시사점이 있을 것 같아 월간지 글을 전체공개글로 공유해 본다. 


공부? 인성! 의 신화

공부? 인성! 의 신화

나는 군사정권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녔다. 덕분에 일주일에 두 시간씩 교련이라는 군사학 수업을 들어야 했다. 선택과목이 아닌 필수과목이었고, 내신에 반영되었으며, 소총을 30초 안에 분해하거나 운동장에서 각종 포복 자세로 기어다니거나 총검술 자세 따위의 시험을 치르었다. 물론  “다음 중 총격전 상황에서 엄폐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따위의 필기시험도 쳐야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학생들 모두에게 점수를 주려고 그랬는지 교련 지필고사 주관식 문제가 “다음 중 박정희 대통령이 창안한 새마을 정신 세가지는?” 이었다. 학교 현관에 태극기와 함께 나란히 걸린 새마을 깃발에도 적혀 있는 ‘근면, 자조, 협동’ 이 답인 문제였다.  나는 고등학생이나 되어서 이런 문제나 풀어야 한다는 게 짜증이 나서 학교 근처 카센터에서 봤던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라는 구호를 써 넣었다.

시험이 끝나고 교련선생이 나를 불러내렸다. 전교권에 들고 부반장이라는 놈이 이걸 모르고 썼을리는 없으니 자초지종을 캐보려 한 것이다. 나는 솔직하게 답을 알았지만 그런 문제를 풀기가 싫어서 그렇게 썼다고 대답했고, 진노한 교련선생의 몽둥이 찜질을 받아야 했다. 그때 들었던 말이 바로 


공부만 잘하면 뭐해? 인성이 제대로라야 사람이지?


 정말 상투적인 클리셰였다. 하지만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말씀을 잘 외워 쓰는 것과 인성이 도대체 어떤 관계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교련선생의 상투적인 말은 본인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대중매체 등을 통해 공유된 일종의 통념이었다. 당시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고교생 일기’ 따위의 드라마, ‘얄개 시리즈’ 따위의 영화는 한결같이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인성이 별로라는 설정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체로 이기적이고 공부만 알아서 친구들과 사이가 나쁜 캐릭터, 아니면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쑥맥이었다. 반면 비록 공부는 못해도 인정많고 의리가 있어서 친구들의 사랑을 받는 썩 괜찮은 놈, 혹은 비록 양아치로 찍혀 있지만 알고보면 착한(과연 그게 가능할까?) 캐릭터는 전형적인 주인공이었다. 


이 “공부? 인성!” 은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다. 보수주의, 진보주의도 가리지 않는다. 지난 2015년 7월에 발효된 인성교육 특별법의 발의자의 면면을 보면 진보계열 의원과 보수계열 의원들이 망라되어 있고, 의결 과정에서도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사실상 만장일치로 통과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당장 서울대학교 총장이 수능 점수보다는 인성을 위주로 신입생을 선발하겠다고 발표하면 여야, 보혁을 망라하는 뜨거운 환영을 받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공부? 인성!”은 하나의 신화나 다름없다. 교육과 관련하여 진보 보수가 모두 동의할수 있는 구호를 하나 만들라고 한다면, 바로 “지식교육이 아니라 인성교육을!”이 될 것이다.


물론 이때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주장하는 인성교육이 약간 다르기는 하다. 보수진영에서는 이른바 "버르장 머리" 담론을 통해 인성교육을 말한다. 인성교육이 제대로 안되어서 애들 “버르장 머리”가 나빠졌다는 것이다. 특히 흉악한 범죄가 일어나기만 하면 보수주의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인성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며 핏대를 올린다. 2004년 전방부대에서 무차별 난사사건이 일어났을때, 그리고 세월호에서 선원들이 승객들을 버리고 도주했을때 보수주의자들이 내건 주장이 바로 “인성교육 강화”였다. 


보수주의자들은 과거에서부터 가치있게 여겨진 그런 덕목들이 무시당하고 가르쳐지지 않아서, 혹은 진보주의자들이 도덕 상대주의를 유포해서 학생들 인성이 망가졌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복고적인 덕목들을 되살리는 것이 이들의 인성교육 목표다. 그 덕목은 효, 예절, 협동, 봉사, 준법 등과 같이 수직 상하적 규범 혹은 집단에의 순응을 강조하는 덕목인 경우가 많으며, 그 교육 방식 역시 8대 덕목이니, 4대 주요 품성이니 하는 식의 구체적인 덕목을 훈육하거나 훈련, 수련하는 방식을 취한다.


한편 진보주의자들은 한결같이 지식 위주의 입시교육 때문에 학생들의 인성이 망가지고 있으니, 지식교육을 인성교육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대학 입시는 물론, 교원 임용고시에도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보다는 인성이 얼마나 훌륭한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곰곰히 살펴보면 진보주의자들의 인성교육 역시 구체적인 덕목을 지정해 두고 그것을 가르치거나 함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덕목론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진보주의자들은 관용, 정의, 공감, 소통 등을 강조하는 등 덕목의 종류가 다르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자와 구별될 뿐이다.


이른바 인성교육의 내용적 앙상함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서로 다른 종류의 덕목을 내세움에도 불구하고 굳건하게 공유하고 있는 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인성’에 해당되는 덕목이 ‘공부(지식)’와 별개의 것이라는 즉 “공부와 별도의 인성교육”의 신화다. 보수주의자는 공부로는 부족하니 인성교육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진보주의자는 공부는 줄이고 인성교육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정도의 차이만 보여줄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학교의 정규교육과정에 추가하여 별도로 인성교육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가지고 있으며, 그 결과가 진보보수가 모두 합의하여 처리, 통과시킨 인성교육 특별법이다. “공부? 인성!” 이 “교육과정만 잘 운영하면 뭐해? 인성교육을 잘해야지.”로 확장된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각 학교에서 넘쳐나는 ‘인성팔이’ 비즈니스다. 정규 교육과정 이외의 별도의 인성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해야만 하기 때문에 ‘인성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각종 교육업체(주로 타이틀은 협회나 연구소)와 전문 강사들의 비즈니스가 활발해진 것이다. 더구나 인성교육법에서는 구체적인 덕목들을 지정해 놓고 있기 때문에 각 덕목별 전문강사들까지 활동하고 있다. 협력적 리더십 강사, 효행 강사, 봉사성 강사 등등. 하지만 그 효과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미 미국에서는 인성교육 프로그램들 중 실제 효과를 발휘한 것은 거의 없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우리나라는 프로그램들을 평가할 준비도 안되어 있지만,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는 매우 당연한 결과다. 공부, 즉 지식과 대비되는 인성교육이라는 것이 사실 매우 앙상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착함이란 단지 성품의 문제가 아니다. 착함은 어떤 성품이 아니라 자신에게, 타인에게, 그리고 사회에게 어떤 바람직한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타인에게 그리고 사회에게 바람직한 것, 바람직한 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한 ‘앎’은 착함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가 된다. 착함이란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앎’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의 역시 무엇이 올바른지 무엇이 그른지 ‘앎’에서 비롯된다. 도덕정치를 표방한 유교에서도 수신제가에 앞서는 것이 격물치지다. 공자도 아리스토텔레스도 모두 중용을 인성의 핵심으로 보았는데, 어디가 중용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사물의 시작과 끝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지식 없이 베푸는 선행은 “좋은 뜻으로 했는데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변명을 늘어놓을 무수한 맹목적 충동적 위해의 원인이 될 뿐이다.


진보쪽에서 인성교육의 주요 내용으로 제시하는 공동체 의식이나 민주시민성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가치와 그 공동체가 처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공동체 정신을 발휘하겠는가? 그런 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발휘하는 공동체 정신은 다만 맹신적 집단주의에 불과하다. 경제학에 대한 바른 지식 없이 어떻게 부의 공평한 분배와 정의를 논하며,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 없이 어떻게 환경과 관련하여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겠는가? 


결국 공부와 따로 떨어져 있는 인성, 지식교육과 별도로 이루어지는 인성교육의 내용은 거의 없다. 공부는 인성의 한 부분이며 그것도 매우 크고 중요한 한 부분이다. 이는 학교현장에서 학생들과 생활하는 교사들의 경험칙으로도 확인된다.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 만나는 학생들은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드라마나 영화와는 달리  ‘인성’도 좋은 경우가 많다. 물론 자기 공부만 챙기면서 공동체의 의무를 등한시하고 예의도 없는 이른바 ‘까진’ 학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보기 드문 캐릭터다. 이른바 공부 잘 하는 학교에서는 통상 다들 기피하는 생활지도 담당교사가 그 학교에서는 가장 일이 없고 한산한 자다. 


반면 학업 성취도가 많이 떨어지는 학교의 교사들은 수업은 둘째치고 절도니, 폭력이니 등등의 각종 사안으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낸다. 실제로 학교에서 이른바 문제학생, 폭력학생을 지도해 보면 다들 착한 아이들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량하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결과적으로 나쁜 아이들이 된 원인은 무엇이 좋고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무지함이다. 이 세상의 미덕과 악덕은 인성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문제인 것이다.  


또 다른 반례도 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가장 시위를 많이하고 격렬하게 투쟁했던 대학은 다름 아닌 서울대학이었다. 서울대학생들이 초중고등학교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했을 학생들임에 분명한데, 그들이 냉정한 이기심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굳건한 신념과 용기를 보여준 것이다. 그 시절 중고등학교에서 인성교육을 특별히 실시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독재체제를 정당화 하는 세뇌교육이 부지런히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현재 자신들이 처한 부당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어디서 가져온 것일까? 이들은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공부한 현실과 실제의 현실간의 간극을 예리하게 느낄수 있었고, 그만큼 고민하고 분노했던 것이다. 


정규교육과정의 운영이 곧 인성교육

공부는 어떤 방식으로든 인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 인성이 훌륭한 학생이 반드시 공부를 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은 인성도 훌륭해질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 정규교육과정만 살펴봐도 이른바 ‘공부’가 인성과 전혀 무관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이미 인성교육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가수준 교육과정 총론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 국가의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말을 요약하면 “우리나라 교육은 인성교육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가 된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의 여러 교과목과 내용들은 입학시험을 치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성’을 함양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의 교과들은 이른바 주지과목, 실업과목, 그리고 예체능과목이 총 망라되어 있다. 문자 그대로 지덕체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인성교육의 문제가 있다면 이는 ‘공부과잉’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공부결핍’ 혹은 ‘공부왜곡’ 떄문이다. 공부의 목적 자체가 훌륭한 인성을 갖추는데 필요한 각 분야의 소양을 기르는 것이지, 그 결과를 확인하는 평가에서 높은 점수, 나아가 우월한 등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점수와 등수가 목적으로 탈바꿈하면 공부의 과정은 사라지고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한 각종 편법만을 익히게 되고 이걸 공부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 결과 ‘덕체’에 해당되는 교과들은 훌대를 받고 ‘지’에 해당되는 과목에만 치우치고, 그 지 마저도 진짜 앎이 아니라 아는 것 처럼 위장하는 편법을 익히는 교육이 되었다.


알베르 카뮈는 “세계의 악은 거의가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선의도 총명한 지혜 없이는 악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입힌다.”라고 했다. “총명이 없다면 참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다.” 라고 하면서. 그러니 공부, 지식과 대비되는 별도의 인성교육 따위의 이야기는 꺼내지 말자. 오히려 특정한 유형의 덕목이나 행동방식을 ‘인성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조작하려는 불순한 시도를 경계하자. 


그런데 카뮈는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는 무지의 악덕”이라고도 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다. 시험을 잘 치는 것이 앎, 지식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시험을 잘 치는 학생은 자신이 실제로 앎, 지식을 얻었다고 착각한다. 실제로는 무지한데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는 최악의 무지라는 악덕이 발생하는 것이다.


인성교육이라는 이름의 인성교육은 없다. 제대로 된 공부, 그것이 인성교육이다. 따로 돈 들이고 시간 들여서 인성교육 프로그램이란 것 돌릴 필요 없다. 공부만 제대로 하면 그게 바로 인성교육이다. 인성교육 프로그램 따로 돌리기 전에 수능과목에만 치우치고, 소위 예체능 교과가 훌대받는 현실, 그나마 수능과목조차 EBS문제집 풀이 연습따위나 하는 현실부터 정상화 하자. 참된 앎, 진정한 지식을 깨우쳐 나가는 것, 그게 인성교육의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김원웅 연설이 틀린 내용 하나 없다고? 맙소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