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하고 온라인 수업 자료 만들어 올리느라 거의 2주간 브런치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2주만에 브런치를 다시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어마어마한 조회수가 누적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셀럽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어쨌든 처음 브런치를 열었을 때는 조회수 100 넘어가는 글 나와도 기분이 좋았는데, 이제는 조회수 2000이 넘는 글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 난데 없는 전교1등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다. 아마 의협에서 내놓았다 집어넣은 대단히 어리석은 카드뉴스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나는 1) 전교1등을 놓치지 않았던 의사와 2) 공부가 영 시원치 않았는데 하여간 자격증 딴 의사 중 누구에게 나의 생사의 순간을 맡기겠느냐고 물어보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1)번을 선택할 것이다. 나는 가능하면 내 몸을 철저히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냉철하고 정확한 의사를 원하니까. <House MD> 처럼. 세상에 싸가지가 없어도 그렇게 없을수가 싶지만, 어쨌든 나는 인술을 펼치는 의사보다는 의학을 공부한 의사를 더 신뢰한다. 물론 전교1등이 의학의 수준을 보장해 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전교1등에게 요구되는 기억력과 집요함이 의학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전교1등 +@ 라야지 @만 있어서는 곤란하다. 그럴때는 차라리 @가 없는 쪽을 선택하는 편이 안전하다. 물론 꼭 전교1등일 필요는 없다. 전교 1등이라는 것은 그건 상징적인 숫자다. 전교 2등일수도 있고, 3등일수도 있다. 하여간 공부 잘하는 학생
그런데 이런 어려운 이야기는 하지 말자. 다만 전교1등의 이미지가 영 이상한 것 같아서실제로 내가 경험한 전교1등 이야기를 좀 해 보려 한다. 내가 학생 시절에 만났던 전교 1등, 그리고 교사 시절에 만났던 전교 1등.
먼저 고등학생 시절 전교 1등 이야기부터 해 볼까? 참고로 나는 전교 1등을 한 번도 못해봤다. 전교 1등이 뭐야? 반 1등도 고등학교 내내 딱 한번 해 봤을 뿐이다. 그것도 내가 잘한게 아니라 원래 1등이 망쳐서 어부지리로 그냥 되었을 뿐.
그래도 전교 1등하고 친하게 지내는 건 잘했다.
온갖 전교 1등과 다 친했다. 우선 입학식때 선서한 녀석. 리드 오프 전교 1등이라고 하자. 나에게 어부지리를 선사한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리고 첫시험을 제외한 나머지 시험은 몽땅 몽땅 판을 쓸어버리고 늘 전교 등수가 아니라 전국 등수를 계산하고 앉아 있던 굇수(결국 전국 4등으로 마무리).
이 중 리드오프는 역시나 의대를 갔고, 굇수는 당시 유행에 따라 전국의 굇수들이 다 모이던 물리학과를 갔다. 왜그랬나 몰라? 그땐 참 순진들 했어. 의대 간 리드오프 역시 요즘 유행과 달리 굳이 어려운 전공을 선택해서 고생을 자처했다. 흉부외과던가 신경외과던가.
그런데 리드오프, 굇수 모두 인간성이 비단결이었다. 공부 적당히 잘하면서 "인문학적 소양"도 폭넓게 쌓고, 사회문제에도 관심 많은 나같은 녀석이 인성이 더 훌륭해야 마땅하겠지만, 솔직히 그 녀석들의 인성이 나보다 골백배 더 나았다.
나는 당시 어떤 면에서 지금 생각하면 학폭으로 걸리거나 동성간 성희롱이라 불러도 할 말 없을 짓궂은 장난질이나 치곤 했다. 그런데도 녀석들은 싫은 내색 하지 않았고, 늘 따뜻한 친밀감으로 나를 대해 주었다. 리드오프 녀석은 고등학교 시절에는 '친구 그 이상'(음 뉘앙스가 좀)으로 가까웠음에도 막상 대학교 3학년 이후 무심하게 연락이 끊겼다. 그러다 내가 결혼할때 어떻게 알았는지 멜로디가 나오는 카드까지 보내 주었음에도 답장하나 안 보냈고, 나중에 그 녀석 청첩장이 왔는데도 유야무야 결과적으로 씹어버린 싸가지 없는 놈은 리드오프가 아니라 나였다.
무엇보다도 굇수. 이 굇수녀석은 집도 가까워서 거의 내집 네집 구별없이 드나들었다. 아니, 주로 내가 그집을 드나들었다. 심지어 굇수네 어머니가 나를 무척 신뢰하여 (아니 뭘 믿고?) 그 집 비우고 어디 갈때 열쇠 주고 집 봐달라는 부탁도 종종 했다. 미국 영화 같으면 서로 "헤이, 브라더." 하고 부르는 사이쯤 되었을 거다. 일요일 아침이면 멀쩡한 우리집 냅두고 그집에 가서 "한지붕 세가족" 보며 게으름을 피웠다. 무서운 우리 어머니는 내가 다른데 간다고 하면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굇수네 집에 간다고 하면 무조건 허락했다.
그래서 거짓말도 많이 했다. 굇수네 간다, 굇수랑 공부하러 간다 이러고서는 다른데로 새서 진탕 놀다 들어오곤 했다. 그런데 이 착한 굇수 녀석이 거짓말을 못하는지라 어머니가 우연히 동네에서 마주치고서 "**야, 재원이는 아직 안들어왔는데 너 먼저 왔니?" 라고 물어보면 적당히 둘러대지 못하고 "어, 오늘은 재원이랑 약속 없었는데요?" 이따위로 말해서 산통을 다 깨기도 했다. 하지만 늘 웃는 얼굴이었고, 도무지 화를 내는 경우가 없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계속 같이 다녔고, 굉장히 많은 시간을 함께 했지만 정말 성내는 걸 한 번도 못봤다.
그래서 별명이 '코알라'였는데, 그러고 보니 도라에몽과 코알라가 같이 있는 모습은 꽤나 익살스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친하게 지내 놓고도 '투쟁' 한답시고, 동창들을 강남적폐로 취급하여 소식을 뚝 끊어버린 싸가지 없는 녀석은 전교1등이 아니라 전교 5등(그것도 제일 잘했을때 딱 한번. 어허 한 번 5등은 영원한 5등)이었다. 페이스북으로 치면 '줄 차단' 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차단쟁이였나보다.
아 또 있다. 문과 1등. 리드오프, 굇수 다 이과였기 때문에 문과 1등이 또 따로 있었다. 이 녀석도 중학교때 고등학교때 거푸 같은 반이 되었고, 선거따위 안하고 성적순으로 임원을 임명해 버린 담임 덕분에 반장, 부반장으로 엮여버려 별별 고생을 같이 다 했다. 거의 전우애를 느낄 지경이었다. 담임이 환경미화때 게시한 내 작품이 보기 싫다고 떼 버리라고 할때 그걸 막아내어 나의 명예를 지켜준 것도 그 녀석이고, 내가 음악과 다른 온갖 잡기에 빠져 성적이 쭉쭉 떨어지고 있을때 어머니보다 잔소리를 더 많이 했던 것도 그녀석이다. 말투가 좀 거만하게 들려서 필요 이상의 오해를 많이 사긴 했지만 사실은 마음이 여리고 배려심이 많은 녀석이었다.
다 착한 놈들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어느 경우에나 싸가지 없는 쪽은 내 쪽이었다. 그대신 나는 @가 풍부했다. 그러니까 그 놈들은 전교1등, 나는 @. 그렇다면 어느 쪽이 의사에 더 적합할까? 선택지가 그 밖에 없다면? 진보쪽 사람들은 전교1등이 상징하는 영역에 비해 @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전교1등이 상징하는 영역을 우습게 보면 안된다. 어디까지나 그게 기본이고 @는 단지 거기에 다양한 색과 맛을 입혀주는 것이다.
아니 이 엄중한 시국에 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지? 어쨌든 결론은 이거다. 전교 1등 하는 애들은 착했다. 내가 학교 다니면서 만난 전교1등들 중에 싸가지 없는 녀석은 딱 한명이었다. 누군지는 말하지 않겠다. 직업이 좀 무서운 편이라서.
그러고 보니 멀리 갈 것도 없다. 집에 가면 늘 전교1등이 있었으니까. 이 놈도 맨날 등수를 전교가 아니라 전국으로 셌다. 음. 그러고 보니 그 놈은 좀 이상하긴 했다. 내가 고3이고 그 놈이 고1일때 나보다 공부를 더 많이 하고 더 늦게 잤으니까. 그렇다고 인간성이 빻았다거나 하지는 않았고, 일상 생활에서는 좀 싸가지 없을수 있어도 직무윤리 측면에서는 늘 철저했다.
어쨌든 꼭 전교1등하고 친하게 안지내본 사람들이 전교1등이나 하는 인간성 없는 로보트 같은 놈 이런 식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왜 친하게 안지냈을까? 그냥 자격지심에 스스로 거리를 둔게 아닐까?
장담한다. 전교 1등(도대체 전교 1등을 몇번을 해야 이 호칭을 쓰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실시한 교내 시험 중 66% 이상 전교 1등? 아니면 한 번 전교 1등은 영원한 전교1등?)들을 랜덤 표집해서 인성을 검사한다면 보통사람들보다 훌륭하면 훌륭했지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