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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고 May 24. 2018

12. 여름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Hisaishi joe, 『Summer』,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 中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대안학교였다.

청주의 엄청 작은 마을 옆에 위치한 우리 학교는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바로 앞으로 작은 하천이 흐르는 - 근데 냄새는 엄청났다 - 자연 속에 있는 학교였다. 학교는 두 개의 동으로 분리되어있고, 본관 1층부터 2층은 교무실, 교실 등이 위치해 있었고, 3층은 남학생 기숙사가, 그리고 1,2,3 층이 뻥 뚫려 가운데가 비어있는 중앙 홀 구조였다. 별관은 본관과 구름다리로 이어져 있고 1층의 도서관과 함께 2층은 여학생 기숙사가 있었다.


고등학교의 모습. 뒤로는 산이 우거져있고, 여름에는 푸른 잔디밭이 넓게 펼쳐지는 곳이다.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지 않은 나에게 대안학교는 말 그대로 천국이었다. 학교는 3시면 끝났고 야자도 없어서 그 이후로는 내가 하고 싶은 것에 몰두할 수 있었다. 대부분은 낮잠을 자거나 친구들과 탁구, 배드민턴 등을 치면서 놀았는데, 이것도 하다 보니 꽤 질려서 다른 놀이를 찾기로 했다. 당시 2층에는 중앙 홀을 앞에 두고 피아노가 한 대 놓여있었는데, 쉬는 시간이나 수업이 끝나면 복도를 오고 가며 마음껏 칠 수 있었다. 덕분에 피아노 한 곡 정도는 칠 수 있는 아이들이 많았고, 나도 그 중앙 홀에서 피아노를 치고 싶어서 수녀님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배웠던 곡은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나온 쇼팽의 왈츠였다. 정확히는 쇼팽의 왈츠 7번 Op.64 No.2로 알려져 있는데 이 곡이 영화의 피아노 배틀 장면에 나옴으로써 많은 인기를 끌었다. 특히 그 빠른 속도감은 과시하기 좋아하는 당시의 내 모습을 볼 때 빠져들 수밖에 없는 곡이었다. 하지만 초등학생 때 콩나물 보는 게 어려워서 피아노를 그만둔 나는 악보를 볼 수 없었다. 플랫과 샵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악보는 정말이지 지옥이었다. 천천히 한 음씩 친다면 악보를 볼 수 있었지만 효율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나는 수녀님이 한 마디씩 치시면 그걸 보고 외워서 치는 방법으로 연습을 했고 2~3주 만에 그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 내가 친 부분이 쇼팽 왈츠 전곡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나온 부분인 것을 감안해도 초등학생 이후로 피아노를 한 번도 만지지 않았던 내가 하루 2~3시간 연습으로 한 곡을 칠 수 있게 된 것도 정말 기적이었다. 한 곡을 다 치고 나니 다른 피아노 곡들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매일 복도를 오가며, 혹은 학교가 끝나고 울리는 피아노 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몇 학년 때인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무더운 여름날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1학기 기말고사 기간이었을 것이다. 당시 우리 방의 친구들은 나를 포함해 공부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는 친구들이 많았기에 -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의 우리는 매번 벼락치기 수준이었다. - 무언의 약속같이 시험을 보고 한 숨 자고 다음 시험공부를 하는 게 정해져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기숙사에 올라와서 우리는 베란다 문을 활짝 열어두고 각자 이불을 들고 나와 거실에 펼쳤다.


녹음이 무성한 숲에서는 매미가 귀를 찢을 듯 발악을 했지만
무더운 날씨에 정신이  몽롱해진 탓인지 그 소리마저 편안했다.


기숙사 방에서 찍은 그 날의 사진.

한 번 자면 대충 2시간은 잤는데, 한 시간 정도 잠을 잤을까, 대부분의 친구들이 시원하게 잠을 자고 나는 거실 벽면의 옷장에 기대서 비몽사몽간에 정신을 붙잡고 잠에서 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때, 매미 소리가 작아지면서 중앙 홀에서의 피아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로, 히사이시 조의 'Summer'였다.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의 삽입곡으로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이 곡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으며 아직까지도 히사이시 조의 대표곡 중 한 곡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 곡은 말 그대로 여름에 들어야지 제맛인 곡이다. 통통 튀는 피아노 음색은 무더운 여름에 계곡에서 시원한 산 바람을 맞으며 물 수제비를 뜨는 것처럼 모든 분위기가 여름에 걸맞는다. 스타카토로 시작하는 초반부는 끈적끈적한 여름날을 털어내기라도 하는 듯이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https://youtu.be/_t1KvFMUNws

Joe Hisaishi - 『Summer』,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 中


그리고는 방 안의 풍경이 너무나도 달라 보였다. 내가 보고 있던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노래와 어우러져서 평화로운 풍경으로 머리 속에 남았고, 아직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열어놓은 베란다의 창문으로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차가운 이불의 감촉, 시끄러운 매미의 소리도 무더운 여름날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처럼 느껴져 짜증 나지 않았고, 그와 반대로 지금 이 순간을 다시는 느낄 수 없지 않을까 라는 마음에 절로 가슴이 시큰거렸다. 정말 고등학생 같지 않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노래 자체는 마음속에 남았다. 이따금 인터넷이나 TV에 이 노래가 나올 때면 난 아직도 그때를 생각한다. 시험 점수가 잘 나왔던 못 나왔던, 친구들과 같이 이야기하며 떠드는 것이 전부였던 고등학생 때. 쓸데없는 것에도 웃음이 나고 미래에 대한 걱정은 하지도 않던 그때의 나를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리워한다.




Joe Hisaishi의 <Encore> 앨범. 바이닐로는 처음 출시되었다.


히사이시 조의 바이닐이 발매되었다는 것을 이틀이 지난 후에 알아서, 자주 가는 레코드 샵에 달려갔을 때에는 이미 내가 원하는 <Piano Stories Best '88 ~ '08>은 품절이 된 상태였다. 이 앨범에 『인생의 회전목마』가 들어있어서 굉장히 갖고 싶었는데, 처음 발매된 히사이시 조의 바이닐이다 보니 그 인기가 어마어마했나 보다.

대신 다른 앨범도 이번에 발매되었다고 하시면서  <Encore>을 보여주셨다. 수록곡을 보니 첫 번째 곡이 그렇게 많이 듣던 『Summer』라는 곡이었고, 그 곡을 본 순간 기분이 좋아져서 구입을 하게 되었다. 여전히 <Piano Stories Best '88 ~ '08>를 구하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언젠가는 구할 수 있지 않을까.


<Encore>에 수록된 곡들. 주로 작업한 작품들의 곡들이 대부분이다.


히사이시 조는 일본 영화의 거장인 '기타노 타케시'를 비롯해서 애니메이션계의 거장인 '미야자키 하야오'까지 그 영화의 곡들을 자주 담당하는데, 영화는 물론이고 노래까지 바로 유명해진다. 그만큼 히사이시 조는 영상에 꼭 필요한 노래들을 만들어낼 줄 아는 재주가 있다. 그것도 엄청나게 좋은 노래로.


또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대부분의 작품부터 기타노 타케시의 소나티네, 하나비, 기쿠지로의 여름, 그리고 한국 작품에서는 웰컴 투 동막골과 태왕사신기의 음악도 그가 담당했다. 태왕사신기는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나머지 영화들에서는 분명히 노래가 주는 감동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그의 수많은 작품들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커버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글쓴이 / 음악 듣는 기린

소개    / Crate Digger, 어쩌다가 LP의 매력에 빠져버려서 모으기 시작한 게 취미가 되어, 블로그와 브런치를 오가며 음악을 소개해 주는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후에 개개인의 취향을 저격하는 음악들만 골라서 소개해 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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