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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고 Jun 30. 2018

17. 그 겨울의 새벽

Miles Davis, <Kind of Blue>

이제 갓 대학생이 되었던 나는 겨울방학을 맞이해서 토익을 따기 위해 매일 새벽 종각에 있는 모 영어학원에 다녔다. 집에서 종각까지는 넉넉잡아 1시간 정도 걸렸고, 학원 갈 준비까지 해야 됐기 때문에 나는 그보다 더욱 일찍 일어나야 했다. 집을 나서면 하늘에는 아직 별이 떠있었고, 동이 틀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만 유난히 밝게 길을 비추어주던 그 새벽, 나는 시린 손을 비비며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종각의 학원으로 향했다.


종각역 지하 쇼핑센터의 11번 출구로 나와서 깨끗하게 정돈된 보도를 걸으며 하늘을 보면, 이제 막 잠에서 깬 새벽이 눈을 비비고 있었다. 아직 어두운 새벽임에도 종각 부근에는 학원에 가는 사람, 출근하는 사람, 퇴근하는 사람이 뒤엉켜 복합적인 공기가 흘렀다.


길을 따라 걷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학원이 보였다. 특징 없이 네모나고 우뚝 솟은 건물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인사동 내에서도 가장 숨 막히고 어지러운 장소였다. 아마 내가 처음으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아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졸음과 짜증이 섞여있었고, 그나마 팔팔한 대학생들의 얼굴에도 여유는 없었다. 이러한 풍경들만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건물만 바라보면 속이 답답한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럴 때면 항상 나는 학원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악기점 앞에서 악기를 바라보곤 했다. 나는 꽤 오랫동안 트럼펫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내가 항상 지나치던 악기점은 이른 새벽에도 쇼윈도의 불을 켜놨기 때문에 트럼펫이 아름다운 백열등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학원 때문에 숨이 턱 막히다가도 트럼펫만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고,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나 쳇 베이커(Chet Baker)처럼 트럼펫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그 악기를 들고 자유자재로 연주하는 상상만으로도 답답한 가슴을 달랠 수 있었다. 직접 불어볼 수는 없었으니 스트리밍을 통해 노래를 듣는 것으로 대신 만족해야 했지만 마음속 한편에는 항상 트럼펫을 들고 멋지게 연주하는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대학교 1학년이 생각하기에 아저씨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많이 들어왔던 말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 그런 걸 신경 쓴다고 아저씨 같은 취향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받아들였다.


그러다 최근에 와서 한 가지 목표가 생겼다.

지금 당장은 내가 해야 될 것도 많고, 악기에 돈을 쓸 여력은 없으니, 나중에 직장인이 되면 꼭 트럼펫을 사서 재즈 동호회에 들어가는 것이다. 지금 그렇듯, 미래의 나도 분명 힘든 일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무기력하게 앉아서 불평을 하거나 술을 마시면서 달래고 싶지는 않다. (애초에 술을 많이 못 마시기도 하고) 트럼펫을 불면서 마음을 달래고 꽤 괜찮게 분다 싶으면 스튜디오에서 녹음도 한 번 해보고 싶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가는 파주 헤이리에 위치한 <황인용 뮤직 스페이스 카메라타>, 엄청난 오디오와 수 많은 바이닐들이 끊임 없이 귀를 즐겁게 해준다.


이번에 파주 헤이리의 '황인용 뮤직스페이스 카메라타'에서 열리는  <Let's Talk About Jazz>로 가는 길에 나는 재즈 칼럼니스트 황덕호 선생님과 만나서 얼마 안 되는 길이지만 같이 걸어갈 기회가 생겼다. 감사하게도 한 달이나 지난 내 얼굴을 기억해주셨고, 내려가면서 간단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와중에 내가 '직장인이 되면 재즈 동호회에서 트럼펫 부는 게 꿈'이라고 말씀드렸더니, 트럼펫은 아주 좋은 악기라고, 대신 많이 힘들 수도 있다고 말씀해주셨다.   


마침 이번 토크의 주제가 트럼펫 연주자들에 대한 이야기여서 더욱 흥미진진했다. 루이 암스트롱부터 디지 길레스피까지, 스윙 시대부터 비밥 시대까지 아우르는 트럼펫 연주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노래를 들으면서 트럼펫에 대한 꿈이 더욱 커졌다.




본 이야기가 너무 길었지만, 위에서 봐도 알다시피 오늘 추천할 노래의 주인공은 트럼펫이다.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의 대표 앨범으로 평가받고 있는 <Kind of Blue>는 연주를 위해 모인 라인업만 봐도 당대 최고의 연주자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마일즈 데이비스, 존 콜트레인, 캐논볼 애덜리, 폴 챔버스, 빌 에반스 등이 참여한 이 앨범은 당시 복잡하게 얽혀있던 코드의 진행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코드를 통한 즉흥적인 연주를 이루어냈다. 코드 중심의 코달 재즈(Chordal Jazz)에서 모드, 즉 선법 중심의 모달 재즈(Modal Jazz)로의 진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소장하고 있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Kind of Blue>. 아무것도 모를 때 사서 Columbia 바이닐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매된 앨범을 구매했다.


이 앨범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인 'So What'과 더불어서 나는 'Blue in Green'이라는 곡을 추천하고 싶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곡의 제목을 '젊은 청춘에서의 우울함'과 비슷한 맥락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창 활기차고 건강할 우리의 모습에도 가끔 우울한 모습이 많이 비칠 때가 있다. 특히 요즘 같은 때에 많은 대학생들의 모습이 그렇다. 그래서 이 곡은 항상 밝고 활기차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나를 포함한 모든 젊은 사람들에게 가끔씩은 우울해도 된다고, 당연한 거라고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Miles Davis, 'Blue in Green'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 트럼펫을 배우면 꼭 불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만의 방식대로 곡을 다시 생각해서 불어보고 싶다. 음악은 신기하게도 곡에 대한 해석이나, 연주할 때의 감정이 미세하게나마 곡 안에 다 드러나기 때문에 똑같은 곡을 연주한다고 하더라도 매번 다르기 마련이다. 나는 나의 감정과 이 곡이 만나면 어떤 소리가 날지 궁금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트럼펫을 사야 되고, 이 곡을 불 수 있을 때까지 엄청난 연습을 해야겠지만 지금의 나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하고 말 것이다. 이 글을 보는 많은 분들도 힘들고 지칠 때, 한 번쯤 연주해보고 싶었던 악기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글쓴이 / 음악 듣는 기린

소개    / Crate Digger, 어쩌다가 LP의 매력에 빠져버려서 모으기 시작한 게 취미가 되어, 블로그와 브런치를 오가며 음악을 소개해 주는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후에 개개인의 취향을 저격하는 음악들만 골라서 소개해 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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