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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고 Jun 22. 2018

16. 영감을 고민하는 분들께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 님의 바이닐 발매를 기념하며

다른 사람은 잘 다루지 못하는(또는 않는) 악기를 다루고 싶은 로망은 누구나 한 번쯤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그랬다. 나는 기타와 피아노를 제외하고는 다른 친구들이 잘 하지 않는 악기를 몇 번 다루어본 적이 있다. 초등학생 때에는 하모니카와 오카리나를 배웠고,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친형이 카혼을 사줘서 신나게 두드리면서 놀곤 했다. 이를 통해서 느낀 점은 남들이 많이 다루지 않는 악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것은 그만큼 힘들지만 매력적이라는 것이었다.


반도네온은 탱고라고 하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악기라고 한다. 초기의 탱고는 기타와 플루트, 바이올린으로 연주되었지만 반도네온이 탱고의 고향인 아르헨티나에 소개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고, 1880년대부터 탱고에 도입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 탱고에는 반도네온이 필수처럼 여겨졌고, 오죽하면 '반도네온은 탱고의 영혼이고, 탱고는 이 악기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만들어진 춤이다.'라는 말까지 생겼다고 한다. 이 정도로 탱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반도네온은 탱고에 정말 관심이 많거나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코디언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꽤 많다.


반도네오니스트 고상지 님을 알게 된 것은 19살 때였다. 영화 '여인의 향기'에서 눈먼 퇴역군인인 알 파치노(프랭크 슬레이드 役)가 레스토랑에서 처음 만난 젊고 아름다운 가브리엘 앤워(도나 役)에게 탱고를 제안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눈먼 그의 연기도 좋았지만 나는 그들이 춤을 추는 장면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부드럽고 우아하면서도 절도 있고 정열적인 탱고는 그렇게 19살 소년의 마음을 앗아가 버렸다. 한동안 탱고에 빠져 살던 나는 더 많은 노래들을 찾기 위해 유튜브를 켰고, 그곳에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고상지, 'Liber Tango'


격렬하고 아름다운 반도네온은 단지 '생소하지만 멋진 악기'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 금관악기는 아니지만 반도네온은 연주자의 숨결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연주를 하면서 열정적으로 테클라(teclas) - 반도네온에서 버튼처럼 달려있는 건반 - 를 누르는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해버렸다.


연주를 듣는 내내 '어떻게 저렇게 깊고 무거우면서도 날렵한 소리를 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나도 모르게 연주에 빠져버려서는 어느 순간, 고상지 님은 탱고 하면 바로 생각나는 반도네온 연주자가 되어 있었다.



응? 애니메이션을 보고 이런 노래들을 생각했다고?!



앨범을 구입하고 여러 가지 뉴스나 인터넷에 올라온 자료들을 읽어보면서 그녀는 일본 애니메이션게임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특히 이번에 나온 3집 <Tears of Pitou>의 1번부터 5번 트랙은 일본 만화 <헌터X헌터>에 나온 캐릭터들에게 헌정하는 곡이라고 할 정도로 애니메이션은 그녀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었다.


처음에는 '응? 애니메이션을 보고 이런 노래들을 생각했다고?!'하고 놀랐지만, 놀랄 거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애니메이션을 정말 좋아했고, 이 노래를 만화 캐릭터에게 바칠 만큼 그녀는 애니메이션을 사랑했다.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면 <에반게리온>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중 하나인 '2EM36_E16'과 '2EM38_F02'를 이어서 공연한 것도 볼 수 있다. 오죽하면 어느 인터뷰에서 반도네온보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말 까지 했을까?


고상지, "Part of the Evangelion OST, '2EM36_E16 + 2EM38_F02'"


영감의 원천은 '있어 보이는 것'뿐 만이 아니다.



나는 이전까지 영감이란 뭔가 있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내가 어떠한 행동을 하게 만든 원인이니 그 원천은 품격이 있어야 하고, 고귀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것은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허세에 불과했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에서 자신의 영감을 찾고 그것을 음악으로 표현해냈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반도네온을 택했다.


그녀의 해설을 보고서 정말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이고, 내가 무엇을 할 때 영감이 떠오르고, 도전을 하고 싶어 지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의 경우는 그것이 '노래'였다. 뭔가 특별한 경험 속에서 우러나오는 영감이 아니라 정말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런 영감들이 떠오른다. 무언가 기발한 생각이 날 때도 있고, 어떠한 행동을 취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나는 노래를 들으면 최대한 앨범 위주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는 편인데, 이는 평이 좋은 앨범이든 아니든 모든 음악에는 작곡가가 생각하고 노력한 이야기가 숨어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숨어있는 노래를 들으면서 영감을 얻는다.


그렇기에 '음악'에서 영감을 얻는 나에게 '애니메이션'에서 영감을 얻어 노래를 작곡해준 고상지 님에게 무한한 감사를 전한다.



2집 <Ataque Del Tango>, 3집 <Tears of Pitou> 바이닐 동시 발매



이번 3집은 나에게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나는 3집이 바이닐로 발매되기 4달 전, 2018년 2월에 그녀의 콘서트에 간 적이 있다. 그 공연에서 애니메이션을 이야기했을 때는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번 앨범의 이너 슬리브에 써져있는 해설을 보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앨범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특히 그때 들었던 곡 중 'Fuga For The Three'는 그녀의 해설대로 미스터리하면서 도전적이다. 난 이 멜로디가 너무 마음에 들어 글을 쓰는 지금도 흥얼거리고 있다. 당시 그녀는 콘서트를 하면서 3집에 대한 홍보도 했는데, 그때의 나는 3집이 CD 이외의 매체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온라인으로나마 듣고 많이 홍보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상지 님의 페이스북에서 2집과 3집이 모두 바이닐로 출시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나는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바이닐의 음색으로 듣는 반도네온은 어떤 느낌일지도 궁금했고 그 공연에서 느꼈던 감동들을 다시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나를 더욱 설레게 했다.


그리고 오늘 그 두 장의 바이닐을 모두 모았다. 무려 3집 <Tears of Pitou>는 사인반을 받았다.

(여기에서는 굉장히 침착하게 쓰고 있지만, 받았을 때는 방방 날뛰었다.)



이렇다 보니 3집 <Tears of Pitou>는 나에게 정말 특별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평소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을 즐겨 듣는 나로서는 이번 앨범의 구성이 정말 마음에 든다. 반도네온도 좋고, 악기들의 편성도 너무 잘 어울린다.


고상지, 'Adventure(Red)', 현악기와 일렉의 날렵하면서도 비장한 느낌과 반도네온이 잘 어우러진다.
고상지, 'Adventure(Blue)', 관악기가 추가되어 'Adventure(Red)'와는 또 다른 비범함이 느껴진다.


특히 Side A, B에 수록된 'Adventure(Red)' 'Adventure(Blue)'가 정말로 좋은데, 'Adventure(Red)'는 장대한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것처럼 웅장한 기타와 드럼, 현악기의 소리를 들으면 마치 내가 만화 영화의 주인공처럼 역경을 헤치며 나아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Adventure(Blue)'는 'Adventure(Red)'와 멜로디는 같지만 확연히 다른 곡이다. 'Adventure(Red)'가 일렉기타의 날렵함으로 무장했다면, 'Adventure(Blue)'에서는 관악기의 웅장함이 도드라지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떨림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RPG 게임의 느낌이 나게 편곡을 했다고 하는데 정말로 게임의 BGM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마무리하며



집에 돌아와 이번 앨범을 쭉 들으며,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을 하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에 영감을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노래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고, 그녀의 팬으로서 나도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음악에 대해 모르는 것이 많고 감상하는 것만 좋아하지만, 확실히 나는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고, 연주자의 생애를 찾아보는 것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아마 이것은 내가 바이닐을 모으는 동안 쭉 이어질 것이고 내가 음악을 듣는 한 내 삶에 계속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영감을 얻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글쓴이 / 음악 듣는 기린

소개    / Crate Digger, 어쩌다가 LP의 매력에 빠져버려서 모으기 시작한 게 취미가 되어, 블로그와 브런치를 오가며 음악을 소개해 주는 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후에 개개인의 취향을 저격하는 음악들만 골라서 소개해 주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러 생각들을 글로 정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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