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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우너 Jun 02. 2022

자기중심적 사고(5)

고장 난 바이올린을 타면 깐따삐야에 간다_12

자기 중심성 확장하기


전체 글의 서두에서 '모든 생각은 기체처럼 날아간다' 고 했습니다. 그 말이 100% '아.. 실로 그렇구나...' 라고 흡수되면 그다음부터 한 이야기들은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도 하나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으면 '자기'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중심적 사고이고 뭣이고 말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해체며 확장이며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했듯이 그것이 단시간에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여러 관점에서 이해를 돕기 위한 접근법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다 쓸데없는 말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굳어져있는 생각을 유연하게 하기 위해 쓰는 도구들입니다)

 

바로 앞의 글에서 자기를 해체함으로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는 접근에 대해 말했지만 이 역시 머리로는 이해가 가는 듯해도 마음으로 와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그래서 이 문제, '나'에 대해서도 나중에 여러 각도로, 여러 번 말하게 될 것입니다). 해체가 힘들 때는 역방향으로 접근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오히려 자기 중심성을 적극 이용하는 겁니다. 더운 여름에 뜨거운 음식을 먹어 열을 다스리는 이열치열처럼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자기 중심성을 이용해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익숙함의 문제이기도 한데 사람들이 자아에 있어 획득, 혹은 확장(+)의 방향으로 습관이 잡혀있어 이건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소멸(-)의 방향은 익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리상담을 해봐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는데 많은 내담자들이 자신의 단점에 초점을 맞추고 그걸 소멸하고 싶어 하지만 아무리 작은 단점이라도 없애기 쉽지 않습니다. 이때는 오히려 내담자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강점에 주목해서 강점을 키우라고 합니다. 강점이 커지면 커질수록 단점이 작아져 주목하지 않게 되니까요. (가수 싸이나 JYP 박진영의 외모가 오히려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자기중심적 사고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쓸 때 잘 쓰면 됩니다. 여기서 문제시하는 것은 대부분 '자기'란 것을 몸뚱이를 경계로 안과 밖으로 나누고, 그 안으로만 아주 작게 설정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이게 완전 코미디입니다. 코미디 중에서도 슬랩스틱 같은 어처구니없는 상황극입니다.

보통 '나'라는 경계를 내 신체 기준으로 정하는데 이렇게 작게 '나'를 설정해버리는 건 동시에 너무나 많은 '너'역시 자동 설정하는 일입니다. 게임에서도 '나'를 설정해야 GAME START 됩니다. 게임은 이겨야 끝납니다. 이기려면 '수많은 너'보다 잘해야 합니다. '수많은 너'보다 잘나고, '수많은 너'를 이기려면 괴로움이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나라는 고정불변으로 여기는 개념이 상황에 따라서 확장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자식에게 그렇습니다. 아이가 죽을 위기에 있으면 많은 부모들이 차라리 나에게 죽음을 달라고 합니다. 아이가 나의 확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티브이나 영화에서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이나 비극에 빠진 주인공을 보며 함께 엉엉 울기도 합니다. 그 아픔이 내 아픔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월드컵 경기 응원할 때 보면 전 국민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나를 확장해서 골을 넣고 안 넣고에 따라 괴성을 지릅니다. 이렇게 자기라는 개념이 상황에 따라 확장이 된다면? 그렇다면 자기를 크게 설정하면 됩니다. 배포가 크시다면 우주 끝까지. 내 몸을 경계로 나를 설정하지 말고 경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를 크게 설정하고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면 됩니다. 내가 너무 크고 넓어서 자기중심이 사라지는..팽창시켜 소멸.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저 말을 쓰는 상황은 자기밖에 모르는 아주 이기적이고 못돼 처먹은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지칭할 때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석가모니가 태어날 때 오른손과 왼손으로 각각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외친 탄생선언(탄생게)입니다. 부처가 왜 저렇게 싸가지 없는 소리를 했을까요. 자기 밖에 모르는 오만함으로, 자기애에 단단히 빠져서 한 소리가 아닙니다. 부처의 나(我)는 우리가 생각하는 작디 작은 '나'의 범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10살짜리 아들이 밤에 동네 공원에서 달리기를 하다가 날아다니는 벌레가 얼굴에 부딪혔나 봅니다. 아들이 저에게 달려와서 이마에 벌레가 부딪혔다며 흔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아무렇지 않다고,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엄마, 그 벌레도 나랑 부딪혀서 아팠겠죠?"라고 묻더군요. 그 말이 참 따뜻하고 좋았습니다. 나도 부딪혔지만 벌레의 입장도 헤아려보는 마음. 그 마음이 시작 아닐까요. 내가 있으니까 벌레를 만날 수 있었고 벌레가 있으니까 내가 벌레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한 발짝만 멀리서 보면 벌레와 나는 떨어진 무언가가 아니라 동시에 펼쳐진 한 그림입니다.  

나는 소중하기에 내 생각도 옳지만 나만큼이나 너도 소중하니까 니 생각도 참 옳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주의 깊게 살피다 보면 내가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그 판단을 옳다고 똥고집 부리는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주 작고 단단한 천상천하에서 지 혼자 잘난놈 말입니다. 자기의 개념을 조금씩 확장해 주변의 것들로 넓혀 가보세요. 바로 옆에 있는 너1, 너2, 너3, 너4의 파일명을 나2, 나3,나4, 나5로 바꾸는 겁니다. 실은 너와 나는 따로 떨어진 무엇이 아니라 하나의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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