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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우너 Jun 08. 2022

존재 양식

고장난 바이올린을 타면 깐따삐야에 간다_16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리마 <D.P.>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제58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자조연상을 받은 배우 조현철. 조연이라고 하지만 드라마가 끝나고 그 배우의 역할이 가장 기억에 남을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그의 시상식 수상소감 역시 인상적이었는데 투병 중인 아버지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인 조중래 교수는 며칠 후 돌아가셨습니다)

 

"아빠가 지금 보고 있을지 모르겠는데, 아빠가 눈을 조금만 돌리면 마당 창밖에 빨간 꽃이 보이잖아. 그거 할머니야. 할머니가 거기 있으니까 아빠가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죽음이라는 게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냥 단순히 존재 양식의 변화인 거잖아.... (중략).... 그러니까 아빠 무서워하지 말고 마지막 시간 아름답게 잘 보냈으면 좋겠어."


그가 언급한 것처럼 죽음은 '단순히' 존재양식의 변화일 뿐입니다. 물론 인간으로서 죽음을 마주하는 고통과 슬픔을 무시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생겨나는 감정은 감정대로 느끼지만 존재 양식이 인간이 생각하는 오직 두 가지 형태 있음(1)과 없음(0) 형태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릴 적 부터 숫자는 100 넘도록 셀 수 있으면서 특정 부분에 있어서 인간은 2이상을 넘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랜 기간 성별이 그러했습니다. 남자와 여자 이 두가지 범주를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은 예전에 비해 많이 좋아졌습니다만) 비정상이라 여기고 핍박과 차별이 있었습니다. 존재양식 또한 아주 아주 강력하게 이진법, 혹은 이분법으로만 생각하는 영역입니다. 있음과 없음, 왜 이 두가지로 끝인가요? 인간의 지각 범위 안에 있으면 '있음'이 되고 지각범위 밖에 있으면 '없음'되는 것 뿐인데요. 칼 세이건의 말처럼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니까요(The absence of evidence is not evidence of absence.)


이렇게 존재양식을 두가지로만 규정하고 죽음, 없음(0)은 슬픔, 공포의 대상이 되고 회피하려 안간힘을 씁니다. 그리고 죽음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삶을 온갖 있음(1)으로 채우려 합니다. 삶을 있음으로 채우기 위한 인간의 노력을 굳이 열거하지 않아도 아시지요? 0과 1 안에서 온갖 희노애락이 생기고 이 이진법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존재 양식이 '있음과 없음'의 두가지로만 한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확장하자면  N개라고도 말할 수 있고 셀 수 없는 무한∞ 혹은 값을 정의할 수 없는 X. 우리는 알 수 없을 뿐입니다. 이쯤되면 "나는 죽을 때까지 인간이라서 있음과 없음으로만 지각하는데 그래서 어쩌라구?"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답은 성경책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는 책 <어린왕자>의 유명한 구절로 대신해보겠습니다.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내가 죽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정말 그런 건 아니야"


절대적이라고 믿는 세계, 눈에 보이는 세계, 있음의 세계, 즉 현실, 실재라는 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형태로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는 아닙니다.  있음이라는 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없음이란 것도 있음과 쌍으로 생긴 고작 두 가지 개념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Take it easy 하시라는 늘 같은 이야기를 또 길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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