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진격의 책팔이

by 도우너

<불도저를 탄 소녀> 라는 영화에 인상적인 대사가 있었다. 주인공 혜영은 여고생이지만 팔에 용 문신이 가득하고 툭 하면 폭력에 휘말리는 문제아다. 중국집을 운영하는 아버지가 있지만 소녀가장이나 다름없는 혜영은 초등학생인 동생에게만은 든든하고 어른스런 누나이다. 어느 날 공부안하고 셰프가 될거라는 동생에게 혜영이 이렇게 말한다.

"공부 안 하면 셰프가 아니라 주방장 되는 거야."


영어로 chef, 우리말로 주방장.

셰프와 주방장은 같은 뜻이지만 영화 속 대사가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되는 걸 보면 현실에서 두 단어의 쓰임은 완전히 다르다. 한글로 하면 별 볼일 없는 일이 되고 영어로 하면 부러움을 사는 일이 된다. 이렇게 영어로 변환만 해주면 신데렐라의 호박이 호박마차가 되는 단어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소개팅은 밥집보다는 레스토랑에서 해야하고 카푸치노엔 계피가루 대신에 시나몬파우더를 뿌려야 훨씬 잘 어울리는 이치를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터득했다.


최근 유행하는 연애 프로그램들을 보면 대부분 20대인 젊은 출연자들의 직업이 빵빵하다. 다들 외모도 준수한데다 어찌그리 능력도 좋은지 20대에 다들 전문직인 것처럼 보인다. 이를 비꼬아 인터넷 게시판에서 직업 뻥튀기 놀이하는 것을 보았다. 부모님의 작은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다면 사업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는 '재벌2세'로, 의류 쇼핑몰을 한다면 '패션CEO'가 된다. 의료기기 회사의 말단 영업사원은 '메디컬 프로덕트 마케터'로 변할 수 있다. 자신의 일을 영어 단어로 적절히 표현해주면 자연스럽게 직업이 뻥뛰기 되고 그 뒤에 초라한 자신을 숨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동네 구석 모퉁이 책방에서 일하는 나 역시 어떤 상황에서 내 본분을 부풀릴 수 있는 적절한 단어들이 있다. 간혹 외부에 강의를 가면 내 이름 뒤에 책방 '대표'라고 들어간다거나 혹은 북 큐레이터라고 불러주시는 분들도 있다. 책방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대표라는 말에 기분이 좋기도 했는데 책방을 하는 햇수가 길어질수록 그 수식어가 오글거리고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그런 소개를 받은 뒤에는 대충 '책방지기'라고 정정하곤 했는데 그것도 너무 서정적인 것 같아서 (등대지기도 아니고) 이제는 그냥 책팔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소위 00팔이라고 하면 그것을 판매하는 이를 얕잡아 표현하는 것이지만 어찌보면 그것이 내 직업의 본질과 역할을 부풀리지 않고 바로 보겠다는 어떤 다짐이기도 했다. 그 다짐이란 무엇인가. 가끔은 내가 표현하지 못하고 있던 두루뭉실한 감정을 의외의 책에서 구체적 언어로 발견하고 꽤 반가움을 느끼곤 하는데 나의 모호했던 각오를 헤르만 헤세의 책에서 발견했었다.


"또 책을 그다지 많이 사지 않더라도 바지런한 서적상과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기를 권한다. 서적상들을 폄하하여 헐뜯는 이들이 왕왕 있는데 이는 부당한 처사다. 그들은 책에 관한 조언과 안내, 추천 도서목록, 부정확하거나 잘못 알려진 책제목의 확인, 기타 등등의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 독자들은 물론이고 우리의 정신생활 전반에 실로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 <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


아마도 헤르만 헤세가 서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던 기간이 꽤 있기에 책방 노동의 본질을 잘 파악하고 있구나 생각하며 이 문장 덕분에 세계적 대문호에게 엄청난 내적 친밀감을 느꼈었다. 남자들이 같은 부대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을 때 모종의 공통분모에 반가워하며 악수하는 느낌으로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헤세는 책은 꼭 사서 봐야한다는 책팔이에게 친화적인 언급을 여러번 하기도 했는데 내가 헤세가 정말 좋은 작가라고 받아들인건 <데미안> 때문이 아니라 저 문장이었는지도. 각설하고 헤세의 글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바지런하다'는 표현이었다. 독일어 원문의 표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지런함'도 아닌 '바지런함'은 어떤 것인가. 부지런함보다 더 부지런해야 바지런하다에 어울릴 것 같다. 헤세의 문장에 비추어 나는 '바지런한 서적상'인가 되묻는다. 나는 책방에 오는 분들의 정신 생활 전반에 공헌을 하고 있는가. 책에 대한 정보를 더 수집하고 좋은 책을 선택하고 소개하고자 바지런을 떨고 있는가. 이에 언제쯤 당당히 '네'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잘 팔리지 않는 책들을 쳐다보며 매일 다짐을 한다. 언젠가는 껌 좀 씹으며 '나 책 좀 파는 여자야' 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즉 진정한 책팔이가 되겠다고.

keyword
이전 08화언니가 필요한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