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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우너 Apr 07. 2022

언니가 필요한 시간

얼마 전 <서울 체크인>이란 TV 프로그램에서 가수 이효리가 엄정화에게 "언니는 언니 없이 어떻게 버텼어요?"라고 묻는 장면이 있었다. 한국 연예계에서 나이든(?) 여성 댄스가수를 현역에서 거의 볼 수 없기에 롤모델이나 의지할 선배없이 어떻게 지냈냐는 후배가수의 질문에 엄정화는 "몰라, 술마셨어"라고 답한다. 이에 효리는 짠하다며 갑자기 눈물이 터지고 엄정화는 그런 이효리를 안아준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나도 눈물이 터졌다.  


언니. 언니가 무엇이길래.

여기서 말하는 언니는 사전적 정의의 1번인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이, 혹은 혈연관계 손위 자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사전적 정의 2번 '남남끼리의 여자들 사이에서 나이가 위인 여자를 정답게 일컫는 말'이라고 한정짓기에도 충분하지 않다. 내가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존재들은 이런 느낌이다.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여 나에게 안전감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들. 황선우 작가의 인터뷰집 <멋있으면 다 언니>의 프롤로그에 언급된 것처럼 "불안과 자기 불확신의 시기를 관통하면서 실패와 실수까지도 고스란히 겪고 고유한 삶의 무늬로 만들어낸 시간"을 가진 사람들. 언니라는 단어는 이런 느낌의 압축적 표현일 뿐, 오빠 혹은 동생이라도 이러한 언니같은 사람들이 있다.

 

언제부턴가 책을 읽거나 방송을 보면서 '언니'라는 말에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엄정화에게 언니가 없었다는 말에 내가 울 일인가. 얼마 전 책방 모임에서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의 원문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었는데 다 안다고 생각했던 인어공주 이야기였지만 내 마음이 머무는 문장들은 가히 새로웠다.


- 인어공주는 슬픔을 견디다 못해 한 언니한테 모든 얘기를 털어놓았어요. 그러자 다른 언니들도 금세 알게 되었어요.

- 언니들이 말했어요. "막내야, 같이 가보자꾸나!" 인어공주들은 다 같이 왕자의 성이 있는 바닷가로 가서 서로 어깨에 손을 얹고 물 위로 나왔어요.

-인어공주는 이제 말도 할 수 없는데다 이대로 영영 이 곳을 떠날 생각이었기 때문에 차마 인어들을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요. 공주는 살며시 꽃밭으로 가서 언니들이 기르는 꽃을 한 송이씩 꺾었어요.

-어느 날 밤, 언니들이 손을 맞잡고 바다 위로 올라와 물결 사이를 떠다니며 슬픈 노래를 불었어요. 인어공주가 손짓하자, 언니들도 인어 공주를 알아보았어요.

-그 때 물결 사이로 언니들의 모습이 보였어요. 그런데 언제나 바람결에 나부끼던 언니들의 아름답고 긴 머리카락이 싹둑 잘려있는 게 아니겠어요?


 마녀에게  막내 인어공주를 살려달라고 부탁하며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주고 온 언니들이 등장한 부분에서는 오열할 뻔 했다. 나도 모르게 인어공주의 서사가 아닌 조연인 줄만 알았던 언니들의 서사를 따라가게 되었는데 새삼스럽게 너무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인어공주를 읽으며 내 마음을 알아차렸다. '아...내가 언니들이 필요했구나...언니들이 그리웠구나' 하고.


되돌아보면 내 주변에도 묵묵히 곁을 지켜준 언니들이 있었다. 10살, 15살 많은 언니도 있었고, 20살 많은 '남자언니'도 있었고, 20살 어린 '동생언니'도 있었다. 그런 다양한 언니들이 내가 어떤 고비들을 지나는 순간 순간 가만히 손을 잡아주었던 기억이 난다. 나에게 신용카드를 주었던 언니, 술 마시고 까만 봉지를 귀에 걸어주었던 언니, 안 입는 옷을 챙겨주던 언니, 나랑 잘 맞을 거 같다며 이상한 사람과 소개팅을 해주었던 언니...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언니들에게 더이상 손을 내밀지 않았던거 같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내가 누군가의 언니 입장이 되면서부터, 사람들이 주로 나에게 하소연하는 걸 들어야하는 상황에 놓이면서부터, 나는 기대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했고, 징징거리는걸 되도록 안하려고 했던 것 같다.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은 것도 있고 내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그러고는 이제와서 언니 소리만 들어도 그리워한다.


그날 밤, 내 삶의 추억 속에 있었던 언니들에게 생뚱맞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연락을 안한지 7-8년도 넘은 언니에게도, 지난 주에 봤던 언니에게도. 모두 내 연락을 반갑게 받아주었고 안부와 이런 저런 이야기로 몇시간이나 수다를 떨었다.


오랜만에 통화한 한 언니는 나에게 "수영씨가 올해 몇살이지?" 라고 묻기에 "저도 이제 나이 많아요~ 올해 마흔셋이에요" 라고 답했더니 "아이고~ 아직 얼라네~"라며 웃었다. 그 말이 참 좋았다. 얼라. 나도 아직 '얼라' 니까 응석을 부려도 될 것 같았다.  또 한 언니는 왜 그렇게 연락을 뚝 끊었냐며 나더러 '싸가지'가 없다고 하는데 그 말도 참 좋았다. 난 아직 싸가지가 없으니까 지랄을 부려도 될 것 같았다.


나이와 상관없이 인간은 연약한지라 살아가면서 언니가 필요한 순간들이 있다. 나의 부족함에 대해 따지지 않고 그냥 옆에 있어주는 부드럽고 단단하고 진실한 사람들. 한 존재에게 언니가 필요한 순간들, 그 순간에 언니가 되어주는 존재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는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얼라들이 언니가 되고 싸가지들이 바가지의 품을 갖게 된다. 언니를 필요로 하는 시간들은 자연스레 언니가 되어가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 서로에게 다 언니가 되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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