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디지털 영상 PD가 되었나
나는 어떻게 디지털 영상 PD가 되었나
<영상 PD 긴 한데요, 그냥 짜치는 거 만들어요 - 1> 보러 가기
종합대행사 인턴 시절, 나는 서울 중앙에 위치한 고층 빌딩으로 8시 반까지 출근했었다.
비록 인턴이었지만 빌딩 숲과 사원증, 정장.. 나름 성공한 직장인이 된 느낌이었다.
스타트업으로 이직 후 출근 시간은 10시로, 출근지는 성수동에 위치한 한 주유소 건물 2층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때 주유소 건물에도 세를 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아침형 인간과 거리가 멀었던 나는, 일단 출근 시간이 늦춰진 것부터 마음에 들었다. 출근 시간 9호선 지옥철을 피할 수 있는 건 큰 메리트였다. 당시 힙의 메카였던 성수동도 좋았다. 사무실 근처엔 예쁜 맛집, 카페가 즐비했고 창밖을 보면 친구들과 놀러 나온 젊은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점심시간에는 맛있는 밥을 먹고 서울숲 산책을 나갔다 오기도 했다. 무채색이었던 삶에 다시 생기가 차오르는 느낌이었다.
근무 환경은 그랬고, 업무적으로 나는 몇몇 브랜드의 SNS에 올라가는 이미지/동영상 게시물을 만들었다. 퀄리티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지금도 내 포트폴리오에 당시 제작한 영상들은 없을 정도이니.. 돌이켜보면 어떻게 이런 콘텐츠가 브랜드 계정에 올라갈 수 있었을까 싶다. 아마 당시엔 그 브랜드들도 SNS 마케팅에 그다지 진심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음, 그런데 어떻게 회사에서 영상 PD로서 일할 수 있었냐고?
사실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PD라면 영상 제작 외에도 추가적인 롤을 맡는 경우가 많다. 당시 회사에서 나는 클라이언트 미팅, 오프라인 행사 진행, 인플루언서 컨택, 택배 발송 등의 부가적인 업무들을 했다. 영상 전문 인력이라기보다는, 영상도 가능한 전천후 마케터 같은 느낌이었다. 그 회사만 그랬던 게 아니냐고?
그다음 회사에선 텍스트 콘텐츠 피드백을 보고, 강의 녹화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다음 회사에선 유튜브 채널 운영과 광고 운영까지 맡았다. 인원이 적고 상황이 급변하는 경우가 많은 스타트업 업계에선 흔한 일이다. 특히 "마케팅적 감각을 키우기 위해 데이터를 분석해서 소비자들이 반응할 수 있는 영상을 만들어라!" 같은 경영진의 바람은 PD 입장에서도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페이스북 광고 관리자쯤은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PD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렇게 잡다하게 업무 커리어를 쌓다 보면, 영상 PD로서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가 발생한다. 바로 전문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혹자는 요즘 시대가 제네럴리스트의 시대라고 하지만, 나는 아직까진 장기적으로 봤을 때 스페셜리스트가 좋다고 생각한다. 아, 물론 '잡캐'같은 커리어 덕분에 이직 성공률이 높기도 했다.
"OO님은 영상 만드는 사람들의 곤조가 없어서 좋아요!
데이터도 볼 줄 아시고.. 영상 퀄리티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고..
저희 회사랑 결이 잘 맞을 것 같아요."
실제로 내가 면접 때 종종 듣는 말이다. 일반화할 순 없지만 광고업계에 영상인들에 대해 널리 퍼진 인식이 '쪼'가 있다는 거다. 자신의 작업물에 프라이드가 있고 피드백을 쉽게 수긍하지 않는 영상인들에게
"저 사람 곤조가 있어, 쪼가 있어" 식의 표현을 하며 달갑게 보지 않는다.
사실 나는 프라이드를 갖기에는 예술적으로 거리가 있는 영상들을 만들어 왔기 때문에, 마케터나 회사의 의도에 맞는 영상을 제작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영상 퀄리티적으로도 최소한의 노력은 했다. 촬영에 대한 이론이나 장비에 대해서는 틈틈이 유튜브를 통해 공부하면서 조금이나마 때깔 있는 영상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것이 그나마 내가 지금까지 스타트업 영상 PD로서 살아남을 수 있던 비결이었다.
'전문성이요? 사수나 선배들을 보고 배우면 되지 않나요?'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연하다.
당신이 만약 사수가 있다면 말이다.
대부분의 스타트업에서는 혼자 기획, 촬영, 편집까지 모두 할 수 있는 1인 영상 제작자를 원한다.
"기획부터 제작까지 직접 모든 프로세스를 진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을 찾습니다."
최근 PD 취업 공고를 살펴본 사람이라면 익숙한 문장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프로세스란 무엇이냐, 보통의 영상 제작 프로세스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1. 프리 프로덕션(기획과 섭외, 촬영 준비)
2. 촬영
3. 포스트 프로덕션(편집, 색보정, 사운드)
일반적인 영상 제작자들은 각 분야에 전문성을 가지고 커리어를 쌓아나간다. 물론 요즘은 혼자 모든 것을 처리하는 1인 제작자들도 많지만, 드문 케이스다. 또 개인적으로는 촬영의 전문성과 기획의 참신함은 양립하기 힘들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유튜버 용호수와 솔파를 떠올릴 수 있다.
어쨌든 디지털 채널에 올라가는 단순 광고 콘텐츠를 필요로 하는 회사에서 기획, 촬영, 편집 단계마다 전문적인 인력을 구성하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또한 싸고 빠르게 많은 소재들을 만들어 테스트해봐야 하기 때문에 적당한 수준에서 3가지를 한 번에 할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 사실 이커머스나 디지털 환경에서는 팔려는 제품이 특출 나게 좋거나 신선하다면, 광고 소재의 퀄리티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영상 퀄리티를 신경 쓰느니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 한 명을 섭외하는 게 더 효율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영상 PD들이 이렇게 회사의 입맛에 맞춰 3가지를 두루두루 하다 보면 어느 한 가지에 특출 나지 않은 "제너럴리스트"가 된다. 이러다 보니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회사에선 나보다 촬영이나 편집을 월등하게 잘한다고 느낀 사람을 보지 못했다. 고만고만한 주니어끼리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영상을 만든다. 이른바 내 커리어의 NEXT LEVEL을 위해서 보고 배울만한 사수가 많지 않다는 이야기다.
이러다 보니 나와 같은 포지션에 위치한 PD은 늘 자신의 커리어에 대한 불안감을 갖게 된다.
나만 해도 요즘 "커리어 망했다" "이번 생은 글렀다" "1년 뒤도 보이지 않는다"와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말이 길어졌다. 다음 편에서는 현업 디지털 영상 PD로서 느끼는 불안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래서 이 불안감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