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디지털 영상 PD가 되었나
<영상 PD 긴 한데요, 그냥 짜치는 거 만들어요 - 2> 보러 가기
디지털 영상 PD로서 느끼는 불안감 3가지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1. 젊은데요, 안 젊어요.
올해부터 나는 캐릿을 구독하고 있다. 캐릿은 직접 운영하는 10대 ~ 20대 자문단을 통해 그들의 트렌드를 리포트해주는 서비스다.(광고 아니다.) 뭐하러 그런 서비스까지 돈을 내며 구독을 하냐고 묻는다면, 업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디지털 영상 PD로서 트렌드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막에 쓸 단어 하나, 말투를 고를 때도 요즘도 이런 말 쓰는지 찾아봐야 한다. 당연히 젠더, 비하 이슈 있는 표현은 절대 금지다. 자막 하나로 나락 가버린 수많은 유튜버들을 보라.
다만 트렌드를 공부한다는 것은 글로 연애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모태솔로가 글로 배운 지식으로 갑자기 카사노바가 될 수 없듯이, 단순히 밈을 몇 개 안다고 젊은 사람들의 트렌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트렌디한 콘텐츠에 대한 감은 떨어진다.
일례를 하나 들어보겠다. 나는 과거에 한 어플리케이션 회사에서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했다. 콘텐츠 기획 회의 도중 인턴분이 콘텐츠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 'OOO에 가장 중요한 3가지!'라는 짧은 쇼츠 영상인데요. 두 가지만 설명하고 세 번째 건 설명하지 않고 끊는 거예요!"
"어.. 왜요?"
"이런 형식이 요즘 쇼츠에 많아요! 한껏 기대감을 올려놓고 끊어버려서 반응을 유도하는 거죠!"
... 일단 나는 당연히 이해가 안 갔고, 나보다 4살 어렸던 동료 직원도 나지막하게 "이게 세대차이인가 봐요.."라며 탄식했다. 아이디어를 냈던 인턴 분은 나보다 8살이 어렸다. 나야 그렇다 치고 고작 4년에도 세대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워낙 트렌드가 빠르게 변하다 보니, 비슷한 나이대라고 해도 서로를 파악하기 점점 어려워진다.
만약 타깃이 Z세대인 기업이라면 30대 PD가 그들에게 적합한 영상 콘텐츠를 만들기는 힘들다. 트렌디하고 젊은 기업일수록 그들의 톤에 맞는 젊은 인력을 원하고, 나이 든 PD의 설자리는 점점 줄어든다.
2. 5년 차에도 2-3년 차가 만든 영상의 퀄리티와 큰 차이가 없다.
"꼭 DSLR로 찍어야 돼요? 핸드폰으로 한번 찍어보죠."
디지털 영상 PD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특히 이커머스 업계에서는 비주얼적으로 예쁘거나 스토리 라인이 좋은 영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공수가 적게 들어가면서 제품의 특장점이 잘 드러나고, 잘 팔리는 게 장땡이다.
그러다 보니 비싼 장비가 많이 들어가는 촬영보다는 가성비 좋은 촬영을 권장한다. 심지어 모델비를 아끼기 위해 PD들이 직접 영상에 출연하기도 한다. 수년 전 블랭크의 약 빤 실험실에 출연하던 긴 머리의 실험남을 기억하는가? 뇌피셜이지만 분명 블랭크 영상팀에 소속된 영상 PD였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영상들만 찍다 보면 영상적으로 발전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 분야에서 연차가 몇 년이 쌓였든, 촬영, 편집 스킬적으로는 1-2년 차 이상부터는 큰 차이가 나지 않아 보였다.
물론 어떤 포인트를 잡아야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고, 더 많은 구매를 유발하는지에 대한 인사이트가 쌓일 수는 있다. 하지만 크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어쨌든 PD는 포트폴리오로 자신을 설명한다. "이 영상이 전환 값이 엄청 좋았어요!" 같은 말들은 사실 객관적으로 신뢰성이 없다. 솔직히 말하기 나름 아닌가? 조회수 역시 광고만 집행해도 올릴 수 있다.
이러다 보니 내 포트폴리오에 어디 가서 보여주기 민망하고, 짜치는 영상들 밖에 없는 순간,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3. 롤모델이 없다.
사실 멘토니 롤모델이니 하는 단어는 이제 구식이다. 감성적인 위로에 속이 뻥~! 뚫리던 시기에나 통용되던 단어이지만, 개인적으로 커리어에 있어서 롤모델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개념보다는 내가 이 일을 계속하면 대충 저렇게 되겠구나 하는 부표 같은 느낌이다.
어떤 분야든 (성공한) 선구자들은 시장의 독보적인 존재로서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 우리나라에 김연아, 임요환이 없었다면 피겨선수, 프로게이머를 하려고 마음먹는 학생들이 있었을까? 이처럼 롤모델들은 각 분야의 초년생들이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준다. 지금 당장 혼란스럽고 어렵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그 사람처럼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디지털 영상 업계에서 잘된 롤모델은 찾기 힘들다. 상술했던 마약 베개의 블랭크? 모두들 남대광 대표만 기억할 뿐, 그 영상을 촬영하고 편집한 PD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고,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일부는 콘텐츠 기획 강의 쪽으로 빠진 것으로 보인다.)
징징거리기만 해서 뭘 하겠나, 이제 이렇게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들은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회사를 위한 콘텐츠는 골머리를 싸가면서 기획하면서, 정작 본인을 위한 기획은 안 해보지 않았나 반성해봐야 한다. 마지막 4편에서는 디지털 영상 PD로 살아남기에 대한 3가지의 대안을 제시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