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패드를 팔았다. 그것은 그림에 대한 나의 늦은 이별이자, 지난 미련들과의 헤어짐이었다.
어렸을 때를 생각하면 늘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서늘한 거실 마룻바닥,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엎드려 그림을 그리는 어린 여자 아이의 뒷모습.
나는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할머니는 경로당에, 언니오빠는 각자의 학업과 직장으로, 부모님은 자신들의 삶의 현장을 누비느라 늘 바빴기 때문이다. 그렇게 집에 홀로 남겨진 나는 종종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흰 도화지 위에 크레파스로 뭔가를 그리긴 했지만 그게 뭐였는지는, 그것들을 가족에게 보여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림에 대한 타인과의 대화가 전혀 기억나질 않으니, 아마도 이 그림이란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어린아이가 큰 공간과 적막을 견디는 자기만의 방식이었으리라.
그 뒤로 학교에 들어가고 가족문제로 삶이 흔들리게 되어 공부 외의 모든 자극을 꺼버리게 되자, 그림은 자연스레 나의 삶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이 그림이란 것은 어른이 된 나에게 붕어똥처럼 늘 뒤꽁무니에 붙어 다니는 귀찮은 미련이 되어 버렸다.
마음 한 구석에는 이런 생각들이 둥둥 떠다녔다.
'나는 왜 그림을 계속 그리지 않았을까, 남들 다 가는 미술 학원을 왜 한 번도 보내달라 말하지 않았을까'
'내가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고 열심히 해봤다면, 내 미래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나에게 그림에 대한 재능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걸 계발해 줬더라면 내 삶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 덩어리들이 붕어똥처럼 떠다니길 오래,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오래 쉬는 동안 유화를 시도해 보았다. 학원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에너지가 없어 사람들과 섞이기 싫었던 나는 혼자 화방에 들러 캔버스와 유화 물감, 각종 도구들을 사서 집으로 실어 날랐다. 그리고 나의 작은 시도에 잠시 뿌듯해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리고 싶은 것들을 그리길 며칠.. 생각 외로 그림에 대한 흥미는 오래가지 못했다. 원래 변덕이 잦으니 이번에도 그렇겠거니 여기며 남은 도구와 재료들을 서랍장 구석진 곳에 오랜 기간 처박아 두었다.
어느 날, 친언니에게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나름 용기를 냈다)
"어렸을 때, 나도 그림을 혼자 그리곤 했었는데, 그때 제대로 배워봤으면 어땠을까 싶어. 그러면 지금이 좀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
— 그래? 근데 넌 그림에 재능 없었어.
"......"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더라? 그냥 좀 띵-한 느낌? 처음으로 타인에게서 내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객관화였겠지만, 인정할 순 없었다. 매정하게 말하는 말들이 그저 무심하게만 느껴졌을 뿐.
그렇게 시간이 흘러, 온라인 강좌를 통해 연필 스케치 강의도 들어보고, 책도 사서 따라 해 보고, 나름 끊길만하면 한 번씩 그림에 대한 미련을 떨어댔다. 그러다 지른 게
아이패드 프로 12.9인치.
그림 그려보겠다고 가장 고사양, 가장 큰 화면으로 골랐다. 디지털 드로잉을 해봐야겠다 결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