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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el Oct 14. 2022

팬케이크는 안 탔다. 대신...

그래서 결론은, 또다시 나에게로...

우리 집 아침은 보통 아이들이 좋아하는 요거트나 빵이다. 오늘은 요거트를 먼저 내어주고 팬케이크까지 굽기 시작했다.

 

팬에 반죽을 부어 올려놓으면 나는 보통 가만히 서서 팬케이크가 구워지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씻어놓은 식판을 아이들 가방에 넣는다거나 과일을 깎는다거나 어린이집에 보낼 감기약을 챙긴다거나 하는 자잘한 일들을 틈틈이 이어간다.


그러다 보면 올려놓은 팬케이크는 종종 조금씩 너무 익거나 살짝 탄 냄새로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다행히 오늘은 팬케이크가 멀쩡했다. 그 대신 옆에 있던  프라이팬 뚜껑이 탔다.



급하게 움직이며 가스레인지에 올려놓다 보니 가장자리 고무에 살짝 불이 붙었던 것이다. 얼른 후 하고 불어 끄고는 싱크대 물에 담갔다. 불에 덴 고무 가장자리는 하얗게 색이 바래어 약간의 흔적을 남겼다.


순식간에 일어난 당황스러운 일이었지만 이크~ 하 고는 바쁜 아침시간에 묻혀버릴 정도의 사소한 일로 지나갔다.

아이들은 요거트와 따끈한 팬케이크로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때쯤 남편이 일어났다. 요 며칠 독감 비슷한 증상으로 몸살을 앓았던 터라 기운도 기쁨도 없어 보였다.


"오빠 나 방금 프라이팬 뚜껑 태웠다?!

치우다가 옆에 놨는데 불이 붙은 거 있지?

금방 껐어~"


"그러게 뚜껑은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두지 말라고 했잖아,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대체 몇 번 째야... 뚜껑이란 뚜껑은 다 해 먹네

 

나와 아이들은 순간 얼음이 되었다.

그렇게 싸한 아침을 열어주고 그는 출근해 버렸다.

아빠가 나가자마자 아이들은 얼른 나에게 와서 나를 다독였다.

 

그럴 수도 있지~

엄마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할 수 있는 거야.

괜찮아. 엄마! 아빠는 왜 그러냐~

엄마~ 괜찮아? 하고 나를 안아주었다.

 

매번 팬케이크를 태울 때마다 오늘도 또 태웠네 하면서 나를 놀리던 녀석들이 서둘러 나를 위로하는 것을 보면 아이들도 아빠의 말에 적잖이 놀랐던 것 같다.

 

나 역시 놀랐다.  

원래 그렇게 쏘아붙이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러니  당황스럽고, 그리고 그게 뭐 그리 큰 잘못이라고 예전 일까지 꺼내어 한데 묶어 뭐라고 하나 하는 생각에 또 당황스러웠다.

 

아이들을 등원 버스에 태워 보내고 평소처럼 동네 한 바퀴를 걷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선 또다시 남편의 말이 웅웅거렸다.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쁘고 서운하고 괘씸하기까지 했다.


지난 한 주간 남편 아프다고 아이들 나 혼자 보며 당신은 쉴 수 있게 배려해줬는데! 하는 쪼잔한 생각까지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니 뚜껑 좀 태운 게 뭔 대수라고...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바쁘게 움직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자기는 실수 안 하나! 누군 뭐, 말할 줄 몰라 지적 안 하니?!"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려 무던히도 애쓰고, 또 그 노력이 눈에 보이는 사람인데, 반면 나에게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너무 편하게 대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순간, 성대한 파티에서 유리잔으로 높은 삼각형 모양의 탑을 쌓아놓고 맨 위에서 샴페인을 붓는 장면이 떠올랐다. 저기 맨 아래에 있는 잔에까지 샴페인을 골고루 채우는 방법은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부어나가야 하지 맨 밑에 있는 잔에만 붓는다고 채워지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 환경, 사랑을 전해주고 싶다면 맨 위에 있는 우리 부부에게서부터 그 모습이 흘러나와 아이에게 스며들어야 하지 아이에게만 좋은 것을 쏟아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남편은 좋은 육아를 하고자 한다면 나와의 관계에 더 초점을 맞춰 생각해야 한다. 아이들이 아닌 나에게 먼저 잘해야 하는 것이 맞다.


오늘 아침처럼 그렇게 내 실수를 지적하고 당황하게 하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었단 말이다. 암~ 그렇고말고!

아 명쾌해!

 

잠깐의 명쾌함 뒤에 곧바로 이런 생각이 따라왔다. 가만... 그럼 나는? 


혹시 나도 그랬을까? 나 역시 아이들에게는 무던히도 잘하려 노력하고 애쓰지만, 남편에게는 하던 대로 편하게 대한 건 아닐까? 남편도 나에게 말은 안 했지만, 아이들이 먼저고 자신은 뒷전이라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진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드니 더는 남편에게만 화살을 돌릴 수가 없었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그 시작점인 부부의 관계가 좋아야 하고 부부간의 관계가 좋으려면 결국 내가 나와의 관계가 좋아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래. 그래서 결론은 또다시 나에게로... 내가 잘하면, 내가 잘 지내면 저기 끝에 있는 내 아이에게 그 좋은 것이 자연히 간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돌고 돌아 다시 본질로 들어온 느낌이다.

 

그때쯤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침엔... 미안..."


짧은 한마디에 나의 뾰족함이 스르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차분히 그러나 솔직하게 내가 아침부터 좀 전까지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 모두 이야기해주었다. 프라이팬 뚜껑부터 샴페인 잔까지 모두...


남편은 조용히 나의 말에 공감해주었으며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했다.

"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이 새삼 감사하고 든든했다.


금세 내 세상이 좀 더 환해졌다. 동네 한 바퀴를 채 다 걷기도 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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