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의기억 Jul 18. 2023

암밍아웃에 대하여(1)

나는 결혼을 앞두고 암진단을 받았다. 

자궁내막암 증상(출혈)으로 조직검사를 위해 소파술을 받은 것이 작년 10월이었는데, 소파술 바로 3일 뒤에 스튜디오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막 암 진단을 받아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고, 결혼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또한 소파술 후에도 출혈이 멎을거란 보장이 없었기에 플래너를 통해 스튜디오 촬영을 미루었다. 약간의 위약금을 물고 촬영은 그 한달 뒤로 겨우 변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암진단 후 정밀 검사를 위한 입원 일정과 스튜디오 촬영일이 또 겹쳐 버렸다. 굳건히 옆을 지켜주기로 한 J덕분에 우리는 '결혼'이라는 목표를 함께 완주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웨딩 촬영을 더는 미룰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입원을 하고 검사를 받고, 수술을 하고... 하다 보면 스튜디오 촬영을 할 수 있는 '때'가 없을 것 같다. 나는 반드시 결혼을 완주해야 했다. 그런 목표가 필요한 시기였다. 목표가 없다면 온전한 정신으로 하루 하루를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나에게 닥친 상황을 견딜 힘이 필요했다. 


다소 철이 없어 보였을지 몰라도 나는 울먹이며 그 주에 웨딩 촬영이 잡혀 있다고 말했다. 교수님이 잠시 바깥에 나가 있으면 날짜를 다시 잡고 알려주겠다고 했다. 의자에 앉아 대기하고 있는데 간호사 분이 내 이름을 불렀다. 


"00일로 날짜를 미뤘어요. 촬영 잘 하시고요."


라고 말하며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돌아서서 가다 말고 몸을 다시 돌려, 내게 화이팅 포즈를 취해주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결혼을 아니 정확히는 결혼식을 준비했다. 


입원 검사일은 스튜디오 촬영 바로 다음 날로 잡혀 있었다. 그래서 스튜디오 촬영 전 날, 여행용 캐리어에 입원 준비물을 차곡차곡 정리해야 했다. 남들은 촬영을 위해 마사지니 네일아트니 이런저런 관리를 받느라 바쁠 시기에, 입원 준비물을 챙기고 있자니 서럽기도 했다. 인생에 단 한 번, 행복해야 할 시기에, 온전히 그 행복을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 기분과 마음이 울컥 가라앉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들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찾아보니 짧게는 4시간, 길게는 6시간 정도 촬영을 한다는데 과연 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스튜디오에 미리 양해를 구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암환자라고. 좀 짧게 진행을 해달라고. 물론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아직 다른 사람에게 암밍아웃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날 그냥 제일 예쁜 신부였으면 했다. 아픈 신부가 아니라. 예쁘고 행복한 신부_결과적으로 걱정과 달리 웃으면서 즐겁게 촬영을 잘 마칠 수 있었다. 열심히 내 옆에서 웃겨주는 J 덕분에 힘든 것도 모르고 촬영했다. 


수술대에 올라서는 신혼여행에 대해 생각했다. 눈을 감은 채 몰디브 지중해의 푸른 바다를 떠올렸다. 거기에는 행복한 나와 나의J가 분명히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자꾸 눈물이 흐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수술을 하고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나에게는 대략 3개월의 시간이 있었다. 그동안 나는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열심히 운동을 하고 신혼 집을 구하고 우리의 신혼 집을 꾸몄다. 신혼 집은 수술 후 회복기에 있던지라 직접 보지는 못했고 J가 혼자 보러 다녔는데 사진과 영상으로 집을 겨우 둘러보는 게 전부였다.


청첩장 모임도 했다. 덕분에 그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도 오랜만에 만났다. 


3-4년 전에 결혼을 하고 벌써 애가 둘인 친구가 있었는데 내 얼굴을 보자마자 "난 다시 태어나면 결혼 안해" 라고 말해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암진단을 받고 수술을 하고, 회복기를 거치기까지 4개월~5개월 정도 걸렸다. 그러는 동안 가족들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처음 수술을 하고 나서는 자리에 똑바로 앉는 것도 힘들었다. 식탁 의자에 겨우 앉아 들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밀어넣고, 집 거실을 10분 정도 뱅뱅 걸었다. 겨우 1000보를 찍으면 침대로 가 다시 몸을 뉘었다. 조금 더 회복이 되면서부터는 집 근처를 산책 했는데 10분 거리를 걷는 데 40분의 시간이 필요했다. 빨리 걸을 수 없어 신호등이 초록불에서 빨간불로 바뀌기도 했다. 


자리에 똑바로 앉아서, 수술을 받은 적이 없는 것처럼, 별일 없었던 것처럼, 할 수 있게 된 시기가 되었을 때에야 친구들을 만나 청첩장을 돌릴 수 있었다. 결혼을 한달 정도 앞둔 시기였다. 결혼 준비가 그렇게 바쁜 거냐며 섭섭해 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원래 정신없는 거라며 두둔해주는 친구들도 있었다. 너무 유난 아니냐고 하는 친구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바빴네, 라고 말하며 웃었다. 암 치병 중이야, 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결혼식 날 누구보다도 행복한 신부이고 싶었다. 색안경을 끼고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이 싫었다. 나에 대해 떠돌 이런 저런 말들과 결혼식장에서 우리 커플을 바라보는 연민 어린 시선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냥, 다른 커플들처럼.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 마냥 행복한 날이고 싶었다. 그래서 암이라는 사실을 숨겼다. 


사실 위로 받고 싶은 마음도 많았다. 


수술 전, 호르몬 치료냐 표준치료(수술적치료)냐를 놓고 고민하던 시기, 한 친구에게 암밍아웃을 했다. 그녀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전화로 이런 저런 정보를 공유하다, '나 암이래'라고 말해 버렸다. 어떤 선택을 해야할 지 쉽사리 결정이 내려지지 않아 괴로워 하던 때였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라고 묻고 싶었는데 그럴 틈이 없었다. 전화기 너머로 친구가 대성통곡 하듯 우는 것이었다. 결국 나도 길에서 엉엉 울었다. 암 진단을 받은 날을 빼고 그렇게 소리 내어 운 것은 처음이었다. 


이후에는 수술도 받고 회복도 하면서,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싶어 소수의 친구들에게 암밍아웃을 했다. 대부분 울었다. 수술을 받은 이후부터는 눈물을 많이 흘리지도 않았고 마음과 상황 모두 어느 정도 안정된 듯 하여, 나는 내가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친구들을 따라 엉엉 울면서 아직은 괜찮은 게 아니었구나, 알 게 되었다. 그래서 입을 닫았다. 내가 정말 괜찮아지면 그 때 얘기 해야겠다,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굳이 얘기를 해야 하나 싶다. 


암진단 후 암밍아웃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렇고... 그런데 지내고 보니,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다 싶다. 서로를 위해서 말이다. 오히려 내가 암환자라는 것을 알림으로써 서로가 불편한 상황이 생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아기를 출산한 친한 언니가 내게 연락할 때 조심스러워한다든지. 내 아픔을 공감해 주지 못하는 친구를 보며 내가 상처를 받는다든지. 하는 그런 일들.... 그 일로 인해 나는 최근 오랜 친구를 잃기도 했다.


나는 앞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암밍아웃을 하지 않기로 했다. 


암밍아웃을 함으로써 상대방에게 받는 상처도 상처지만, 그들에게서 상처를 받는 내가 싫어서다. 나의 아픔을 위로해 주고 공감해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 그렇지 않다고 해서 실망하고 섭섭해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은연 중 상대에게 기대를 품게 되는 것 같다. 그런 모습이 싫다. 



어쨌든. 나는 결혼식 날 최고로 행복한 신부가 될 수 있었고, 결혼식을 완주하겠다는 목표를 훌륭히 완수했다. 그리고 지금은? 건강히 나의 신랑 J와 오래오래 같이 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결혼식을 그렇게 끝냈듯, 다음 목표도 멋있게 이룰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


작가의 이전글 선택장애와 확률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