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니 May 18. 2023

#02

그럴 수도 있지.

 믿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사실 나는 공부가 잘 안 맞다. 시험이 있다든지,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하려고 마음먹는 데 걸리는 시간이 50%, 자리 잡고 앉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45%, 공부하는 시간 5% 정도.

 

 예전엔 분명 이렇지 않았다. 대학만 가면 된다던 그 말만 믿었다가 배신당하기 전까지는 수학은 심지어 좋아했고, 밤새 공부해도 싫지 않았고, 집중도 잘했는데. 앞에서 한 말은 농담이고, 솔직히 이렇게 된 데는 전공의 특성이 문제인 것 같다. 이해를 해야 흥미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편인데, 외워야 할 양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이해할 시간이 없고, 눈으로 읽는 것만 해도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안 맞는 공부를 꾸역꾸역 버틸 수 있었던 건 어이없지만 의대 공부는 몇 배는 더 심하다,라는 상대적인 믿음 때문이었다. 어차피 해야 되는 거고, 저것보다는 이게 낫지 않나 하는. 사실 입학만 하면 대다수는 남들이 다 하니까 휩쓸려서든 어떻게든 졸업은 하고, 면허는 딸 수 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절대, 절대 쉬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는 건 적응의 동물이고 생각보다 재시와 유급을 할지언정 낙오자는 많지 않다.


 나의 대학 생활은 용허리쯤이냐 뱀머리냐의 선택에서, 사실 어느 집단에서나 결국 허리쯤 있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불안감을 이유로 뱀머리를 선택했었고, 결국 뱀 허리로 끝났었다. 절대 자교를 비하하는 건 아니고, 잘 먹고 잘 살면서 꽃놀이 다니는 행복한 뱀이었기 때문에 아마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지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공부든 뭐든 예전만큼의 노력을 하는 것 자체가 잘 안 된다는 것. 뱀머리로 시작해서 뱀머리로 끝날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보다는 뱀 허리가 뭐가 문제인가 하는 것으로 전반적인 가치관이 바뀐 게 영향이 큰 것 같다.


 경쟁이라든지 마찰을 좋아하지 않는 성향도 있지만, 도대체가 지금 이 상황이 법적이고, 도덕적인 관점에서 문제 되지 않고, 남에게 피해 주는 것도 없다면 무엇이 문제가 될까, 하는 생각. 내가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결과에서 무언가 배울 게 있고 받아들일만하고, 나름의 의미가 있다면 뭐든 괜찮지 않나 하는 가치관이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에 들어앉아서는, 한창 의욕 넘치게 살아갈 30대에 해탈한 사람처럼 세상을 관망하고 있게 된 것이다.


 어떻게 표현하면 다른 사람이나 상황이 내 기분을 좌우하도록 두지 않는 것이고,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행복하게 지내고 있지만(누군가는 게으른 낙오자의 생각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걱정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게 있다면 수련이 끝나고 언젠가 내 병원을 차리게 되면 이 험한 경쟁사회 속에서 빚만 질 것 같다는 것. 사실 이건 나보다는 주위에서 더 걱정하는 부분인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시작부터 공부하기 싫은 것처럼 말을 해놔서 덧붙이자면, 지금 내 일상에서 그럴 수도 있지, 가 허용이 안 되는 부분은 진료에 관한 것이 거의 유일하고(일상이라는 게 95%는 병원이다) 그래서 그 부분만은 계속 공부하고 반복하고 노력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길.


공부를 안 한다는 건, 몇 년째 새해 목표인 영어회화 같은 것들

매거진의 이전글 #0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