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화장실 선반에 두루마리 휴지 4개를 채워 넣으며 문득 생각했다. 이걸 다 쓰게 되면, 아니 어쩌면 그전에 이 집을 떠나겠구나. 그때쯤부터 나는 내 다음에 이곳에 머물게 될 사람을 상상하곤 했다.
남자일까, 여자일까?
내가 찾은 기가 막힌 선반 활용법을 이 사람도 눈치챌까? 해가 정말 잘 드니까 암막커튼부터 사라고 말해줘야 하나? 벽지의 누런 자국과 냉장고 소음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비 오는 날 큰 창에 퍼지는 빗소리에 유난히 감상에 젖게 되는 건 아마 금방 알게 되겠지.
이곳에 이사 오면서 구매한 디퓨저가 이제 딱 새끼손톱만큼 남았다. 3년간 알뜰히도 썼다. 백향과와 멜론 향이 나는 디퓨저는 이 집에, 내 몸에 배어 이제 나는 알아채기 힘들지만 가끔 친구들은 내 몸에서 우리 집 향기가 난다고 종종 말해주었다.
그리고 이 향도 옅어지고 내 숨결도 지워지면서 그 사람만의 304호를 꾸려가겠지.
304호는 나의 두 번째 자취방인데, 첫 번째 자취방 410호에서부터 그 집에서만 일어나는 법칙 같은 것을 찾아내고 기록하는 것에 소소한 재미를 가졌다.
예를 들어 이전 410호에 살 때의 법칙은 이랬다.
• 비 오는 월요일이면 반드시 눈물 흘릴 일이 생긴다. 그런 날이면 Rainydays and mondays를 들으며 더 깊게 잠기곤 했었다.
•재활용 분리수거는 꼭 낮에 할 것. 밤에 종종 내어져 있는 마네킹 때문에 심장이 떨어질 뻔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304호의 법칙
•안경이나 렌즈를 끼지 않은 날엔 꼭 복도의 등이 켜지지 않는다. 안 그래도 시야가 흐릿한데 센서등마저 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더욱 어둡게 반겨주곤 한다.
•잠들기 전 냉장고 소음이 사라지면, 그날은 유독 잠들기가 힘들다. 언제 다시 냉장고 소리가 나기 시작할까, 내심 계속 주의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둘 쌓여간 나만의 법칙은 교류이자 기록이었다. 머지않아 내가 떠나면, 이곳은 또 다른 누군가의 304호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만의 법칙을 만들어가며 이 공간을 채워가겠지.
나는 괜히 디퓨저 통을 흔들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