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졸업을 앞두고
‘청소년 여러분의 고민을 들어드립니다’
구청 앞 현수막에 써져 있던 문구였다.
청소년 (9세부터 24세)
우리나라 청소년 기본법에 의한 기준이라고 한다.
4월에 처방받은 약봉투에 적힌 내 나이는 분명히 24세. 그러니까 나도 청소년에 속한다는 거다. 사회가 인정한 ‘어림’에 속했다는 기쁨보다도 내가 아직도 청소년이라니 하는 당혹감이 먼저 들었다.
내 고민과 아홉 살 청소년의 고민은 너무도 다르고, 나의 아홉 살은 기억나지도 않는다. 하루가 다르게 고민의 종류가 바뀌어 가는 그 시기들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
얼마 전, 종강을 앞두고 마지막 수업에서 교수님과 불투명한 미래와 대해 이야기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을 때의 일이다.
그 시간이 하교 시간과 겹쳤는지 교복 입은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덥고 습한 날 지하철 안은 약간의 땀냄새로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학생들은 모두 웃음을 띤 얼굴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선후배 관계로 보이는 중학생 두 명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하.. 어릴 때가 좋았는데.’
‘야 너도 어려.’
‘아니 더 아주 어릴 때요.’
‘음… 내가 볼 때 제일 좋은 건 초등학생 때 까지고, 그다음은 중1, 중2 팔자 좋고 중3 힘들고, 고1 잠깐 좋고 고2, 고3 힘들고 대학교 1, 2 학년 좋고 3,4 학년 힘들고 딱 이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정확히 간파당한 인생의 사이클, 그리고 정확히 힘든 시기에 놓인 대학교 3학년이 바로 나였다.
생각해 보면 나도 늘 어릴 시절을 그리워했다. 고등학생 때는 중학생 때를, 20살 때는 고등학생 때를. 요즘에도 중학생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 딱 3년만, 아니 1년만이라도 다시 살게 해 준다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한다. 왜 우린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걸까. 막상 과거는 아름답지만은 않은데. 이 친구들도 대학생 3, 4학년이 되고 나면 지금을 그리워하겠지.
다시 돌아와서 나는 이제 청소년의 마지막 6개월을 앞두고 있다. 생각하다 보니 억울해졌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주지. 나는 20살이 되면서부터 그냥 바로 어른으로서의 의무와 경제 활동으로 한 사람의 사회인의 몫을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려웠고, 해마다 늘어만 가는 나이와 시간을 붙잡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무얼 하든 이젠 너무 늦은 거 같다는 생각에 지배되어 있었다. 내가 아직 청소년이란 걸 알았다면 조금 더 안정적으로, 동시에 더 대담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어도 마음 한구석 청소년이라는 울타리가 내심 마음에 들었을 텐데.
그리고 이제는 졸업을 앞두고 있다. 청소년 졸업과 동시에 진정한 의미의 ‘성인’이 되어버린다. 청소년은 늘 어딘가에서 벗어나야 한다. 학교에서, 집에서, 그리고 알고 있던 자신에게서.
결국 우리 청소년들의 고민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있어도 한 살 한 살 늘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부담감. 이제 청소년으로서의 시간이 6개월 남은 입장에서,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는 9세에서 24세 사이의 누군가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그냥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것은 청소년기 내내 반복되는 일일테니, 너무 매몰되지 말고 그 시기를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