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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에는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게 결국 이거야

by 하영

나는 항상 ‘처음’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시작도 못 하는, 세상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는 생각들이 참 많다.

브런치만 해도 첫 글을 멋지게 장식하고 싶었다. 그래서 매번 글을 썼다 지웠다, 정확히는 썼다 임시저장 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고, 내 계정은 텅 빈 채 몇 년의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있다. 시작이 얼마나 큰 일인지 설명해 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나에게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그 반이나 되는 일을 대충 해서는 안된다는 부담감. 시작이라도 하라는 의미가 아닌, 시작은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내게 읽히는 것이다.


내 이런 편집증적 사고는 어릴 적부터 계속되었던 것 같다. 다이어리를 쓸 때 첫 장에서 글씨를 틀리면 나는 그 장을 찢어버리고 새로 시작해 버리곤 했다. 그나마 만년 다이어리는 그렇게 다시 시작할 수나 있었지, 날짜가 적혀있는 다이어리는 그냥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20대 초반 애인과 첫 관계를 갖게 됐을 때도 나만의 ‘처음’에 대한 기준이 있어서, 절대 모텔은 안됐다. 무조건 집이나 호텔이어야 했달까. 사실 시설로 따지면 큰 차이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처음이 항상 완벽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애초에 나는 완벽하지 않다. 완벽할 수가 없다. 완벽함에 집착한다는 것부터가 완벽하지 않다는 방증일 것이다.

지금까지의 많은 처음을 떠올려 본다. 대부분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는 그 기억도 나지 않는 것들에 얼마나 많은 힘을 쏟아 온 걸까.

그리고 기억 나는 몇 처음을 떠올려 본다.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완벽했던 것이 있다고 한다면 오만함이고 나의 완벽하지 않은 시선을 보여주는 것일 테다.


그래서 이제는 처음에 힘을 조금 빼보려 한다. 물론 내가 처음을 세 번째, 네 번째와 똑같이 대할 정도로 강박적이지 않은 사람은 못 되는지라 아주 편안히 시작하지는 못할 것이란 것을 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브런치에 첫 글을 올린다. 이렇게 시작하니, 두 번째도 올릴 수 있겠지! 시작이 반이랬으니 나는 벌써 반이나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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