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둘 다 흔히 '말 잘 듣는 모범생'으로 자랐다. 싫은 소리 잘 못하고, 싸우는 것도 잘 못하는 그런 전형적인 한국형 모범생. 이런 내 성격의 단점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내 자식만큼은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목도 못 가누는 신생아 시절부터 '엄마가 지금 기저귀 갈려고 하고 있어.', '엄마가 지금 너를 침대로 데려가고 있어' 하며 아기를 인격체로 존중해 주려고 노력했다. 강압적인 교육 방식보다는 자존감을 높이는 방식으로 아이를 키우고 싶었다. 남들이 어쩜 그렇게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아들을 키우냐고 할 정도로 아들에게 화를 낸 적도 없었다. 실제로 3-4살 무렵까지는 화를 낼 일조차 없었다.
아들이 5살부터는 평일에 엄마, 아빠와 따로 살아야 했다. 나는 서울로 회사를 복귀하여 아들과 함께 지냈고, 남편은 진주에서 회사를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들이 좀 말을 안 듣더라도 안쓰러운 마음에 그걸 혼내거나 고쳐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한국 나이로 7살이 된 지금, 우리 아들은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말 안 듣는 장난꾸러기'가 되어 있다.
강압적으로 아이를 키우고 싶지 않았지만, 막상 아이가 교육기관에 들어가서 ‘모범생'의 범주 안에 들지 않자 실망스러워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아이의 자존감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부모의 권위를 제대로 세우지 못한 건 바로 나 자신인데 말이다.
한국에서는 맞벌이로 바쁘게 사느라 하루에 겨우 세네 시간 정도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미국에 와서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나는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간에는 말로만 아이를 키우는 것이었지 사실 유치원과 학원에 아이를 맡겨만 둔 것이 아니었을까. 진짜 교육은 하지도 못한 채 말이다.
아들이 미국 학교에 입학한 후 학생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두 줄로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들이 모두 얌전하게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거기다 다른 아이들은 우리 아들을 보고 먼저 'Good morning', 'Hi, Jimi'하고 인사를 건네기까지 했다. 미국에 와서 처음에 깜짝 놀란 건 마트나 식당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먼저 말을 거는 모습이었는데, 6살밖에 안된 아이들도 'small talk'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어리기 때문에 그것을 자연스럽게 한다기보다, 옆에 서있는 부모들이 가르쳐서 하는 것 같았지만 그걸 부모들이 알려주고 아이들이 따라 한다는 것조차 나에게는 작은 충격이었다. 아.. 이런 걸 가르쳐야 하는 것이구나.
미국 학교는 ‘Kindness'를 중요한 테마로 삼아 학기 내내 다양한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부모에게는 'Family kindness checklist'를 주고 어떤 것이 친절한 행동인지 실행할 수 있도록 알려준다. Kindness에 대한 영화와 책을 추천하면서 아이와 함께 Kindness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도 한다. 만약에 당신의 아이에게 영화와 책이 맞지 않는 것 같다면, 이런 식으로도 대화를 이끌어 가보라며 아주 구체적으로 말이다.
어릴 때부터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고 먼저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는 아이와 모르는 사람은 위험하니 피하라는 것을 먼저 배우는 아이는 앞으로 어떻게 다르게 자라게 될까? 나는 Kindness 교육 캠페인을 경험하면서 왜 미국, 특히 캘리포니아의 실리콘밸리가 세계 기술 혁신을 이끌어가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우선 미국은 여러 인종이 섞여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kind'와 같이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기본 인성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특히 실리콘밸리는 미국 동부보다 동양인 거주 비율이 높고 진보적인 정치 성형이 강하다. 반면, 단일민족 국가인 한국은 어차피 모두 비슷한 사람들이기에 오히려 남과 비교하고 계급을 나누는 문화가 발달해 온 것 같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저자 브라인언 헤어/버네사 우즈는 ‘인류문화는 친화력을 갖춘 사람들이 밀도 높게 결집했을 때 뛰어난 기술을 발명해 왔다'라고 한다. 나는 이 문구를 보자마자 다양한 인종이 섞여서 엄청난 속도로 기술 발전을 일으키고 있는, 바로 여기 실리콘밸리가 떠올랐다. 쓸데없이 서로 견제하느라 에너지를 소모하는 대신에 공동의 목표를 향해 서로 협력하며 어우러져 가는 능력은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에 더 필요한 인성이 될 것이다.
내가 과거 한국에서 교육받았던 것을 생각해 보면 나도 어릴 때 '예의범절'을 중요하게 배웠던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예절은 위계관계 안에서의 공손함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면에 어른에게 반말을 하거나, 호칭을 제대로 쓰지 않으면 예의가 없다고 한다. <언어의 높이뛰기>의 저자 신지영 작가는 '한국어의 높임법에는 나이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비대칭적인 권력관계가 담겨있다'라고 한다. 실제로 우리 아이가 5살, 처음 한국 유치원을 다녔을 때 6살 형에게 형이라고 부르지 않아서 '형'에게 혼난 적도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 놀이터에서는 처음 만나는 친구에게 몇 살이야?라는 질문을 항상 먼저 했었다. 나중에는 “나는 5살이야!!”하고 소리 지르며 놀이터에 뛰어들어갈 정도로 나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영어에는 높임말이 없고 심지어 선생님께도 'teacher'이라고 하지 않고 실제 이름을 부른다. 그래서 우리 아이도 미국에 와서는 나이 상관없이 그 아이가 나보다 키가 더 큰 지, 달리기가 더 빠른지와 같은 실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brother'이라고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의 생태계를 이루는 수많은 요인이 있겠지만, 실력 중심의 문화를 만들어낸 중심에는 이런 개방성, 타인에 대한 친절함이 근간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대등한 관계 안에서 자유롭게 행동하되, 'kindly'한 태도를 가지라는 미국의 사고방식은 내가 한국에 돌아가서도 꼭 잊지 않고 교육시키고 싶은 것이다.
또 내가 어릴 때 받았던 예절 교육을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 '착한 아이가 되어라'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다. '착하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는 뜻으로, kind와 뜻이 유사하다.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 '착하다'는 단어는 웃어른의 말을 잘 들을 때, 정해진 규칙에 예외 없이 잘 따를 때 들었던 것 같다. 착하다는 것과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의미인데, 단순히 정해진 규칙에 토를 달지 않고 잘 지킨다고 해서 착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kind 하다는 것은 손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강압적으로 명령하고, 그것을 그대로 수행하는 모습이 아닐 것이다.
다시 본질로 돌아와, 내가 정말로 내 아들에게 원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건 '말 잘 듣는 모범생'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모습이다. 미국 학교는 이런 마음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배워야 하는 중요한 '능력'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이 능력을 키우려면 나부터 kind 한 행동을 어떤 건지 잘 알고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닐까. "똑바로 줄 서!"를 버럭 외치는 엄마를 보고 내 아이가 과연 kindness를 배울 수 있을까?
그래서 요즘 우리 집에서는 '친절 대회'를 열고 있다. 주요 참가자는 아빠, 엄마, 여동생이고 심판은 아들이다. 아들의 행동을 내가 하나하나 평가하는 것보다는 내가 먼저 그 행동을 보이고 아이가 스스로 판단을 하게 해 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kind 한 행동을 하면 별표 스티커, 못하면 빨간색 스티커를 붙이는데 엄마인 내가 빨간 스티커를 제일 많이 받았다. 아이가 보기에도 엄마가 제일 kind 해 보이지 않나 보다. 내가 아이에게 일상 속에서 하는 지시, 잔소리들은 분명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지만, 그 태도는 분명 'kind'해야겠다는 걸 이 '친절 대회'를 통해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나부터 떼어내 보자, 빨간딱지들... 그리고 자유롭지만 결코 '분방'하게는 키우지 않는, 미국 와 한국 사이 그 어딘가쯤 위치할 다정한 시간들을 다져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