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비눗방울이 가끔 생각난다. 뜨거운 여름날, 하늘에 자유롭게 떠다니던 연약하고 맑은 비눗방울.
지난여름 나는 매 주말마다 가족과 함께 캠핑을 갔다. 캘리포니아 산호세는 바다와 산이 가까워서 1시간 이내로 갈 수 있는 조용하고 깨끗한 캠핑장이 많다. 남편과 아들이 지겹다 할 정도로 나는 매주 새로운 캠핑장을 예약했다. 캠핑을 가면 사람을 만날 일이 없다는 점이 편했다. 집에 있고 싶지만 야외 활동도 즐기고 싶은 우리 가족에게 캠핑은 최고의 휴식이었다. 금요일 저녁이면 미니밴 트렁크 한가득 들어갈 짐을 챙겼다. 캠핑에서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어김없이 새로운 캠핑장을 검색하고 예약했다. 그렇게 매주 새로운 캠핑을 떠났다.
선선한 바람이 반가웠던 그 여름날 토요일 저녁 무렵에도 나는 캠핑장에 있었다. 아직 두 돌이 안된 둘째 딸은 낮에 더웠는지 윗옷을 벗고 맨발로 캠핑장을 누비고 있었고, 일곱 살이 된 아들은 막대기로 땅을 한참 파고 있었다. 나는 두 아이들 가운데 자리 잡고 작은 의자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영어를 쓸 일도 없고 들을 일도 없었다. 미국의 대 자연을 즐기고 있다는 편안함만 있었다.
만약 아는 사람을 만났다면 나는 한참 부끄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 손과 얼굴은 더럽고, 옷에는 흙이 가득 묻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정돈하지도 않고 그냥 쉬고만 있었다. 예의 바르고 똑똑한 아이들, 부지런한 엄마, 능력 있는 남편. 이런 평가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 아늑했다.
나는 그때 내가 비눗방울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아롱다롱 한 커다란 비눗방울이 우리 가족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 안에서는 아무 시선도 느껴지지 않았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노는 아이들만 보였다. 마치 장대비가 내리는 날 우산을 나눠 쓰고 걸으며 이 세상에 둘 밖에 없다고 여기는 연인들 같았다. 비눗방울 막은 아슬아슬 연약하지만 잠시라도 세상과 단절될 수 있다.
비눗방울 밖은 여전히 전쟁터이다. 미국에 온 지 2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나의 일상은 위태롭다. 나는 하루종일 괄호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서성거린다. 나는 괄호 밖에 있는 이방인이다. 이방인임을 들키긴 싫지만 인정은 받고 싶다. 괄호를 껴안고 등을 돌리고 어떻게든 맞붙어 원이 되려고 아둥거린다. 그러다 숨이 턱턱 막힌다. 해가 지면 괄호 밖에 꿈틀대던 이들끼리 집에 모여 부둥켜안는다. 그리고 우리는 주말이면 그렇게 괄호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산과 바다로 두둥실 비눗방울을 타고 멀리멀리 떠나곤 했다.
그럼에도 비눗방울은 쉽게 터지기에 아름답다. 언제라도 비눗방울은 사라져 소리도 자취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 가족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캠핑장으로 숨어들지는 못할 것이다. 여름은 짧고, 밤은 갈 수록 길어진다. 아이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자랄 것이고 그만큼 남편과 나도 늙을 테다. 하지만 쉽게 터짐을 알기에 우리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절실히 깨닫는다.
매일 뒷마당에서 비눗방울 부는 재미에 든 둘째 딸은 비눗방울을 살짝 건드려 그것이 '팝!'하고 터질 때 까르륵 웃음을 터트린다. 어쩌면 비눗방울은 터트리기 위해 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터져야 꾸역꾸역 괄호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아슬아슬 연약하게 떠다니는 비눗방울 속에서도 나는 기꺼이 터지길 바란다. 괄호 밖 그림자는 그제야 사라질 것이다. 그 날을 기다리며 나는 맑고 투명한 막 속에 앉아있다. 이 맑고 투명한 막 속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자주 오지는 않을 것임을 확신하며, 이것이 두꺼운 벽이지 않음을 감사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