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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Mar 01. 2023

질투의 향기


 나는 오늘 아름다운 향기와 어울리지 않는 구질구질한 기억을 하나 꺼내 보려고 한다. 향수에 대한 이야기를 쓰자면 어쭙잖은 나의 지식을 늘어놓으며 멋진 적 쿨한 척 글을 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떤 일을 겪었음에도 그게 아무렇지 않은 척 덮어두고 행복한 기분만 편집해서 보여주는 것에 싫증이 난다. 향수를 사야만 했던, 나의 덮어둔 기억을 꺼내보고 지금도 내가 그때와 달라진 게 없는지 짚어 보고 싶다.


 가장 먼저 생각난 향수는 입생로랑 베이비돌이다. 내가 가장 버리고 싶은 향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뚜껑은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로고는 거의 지워져 있다. 이걸 산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으니 내가 가지고 있는 향수 중 가장 오래된 것이리라. 더 오래된 향수도 있었지만 미국에 올 때 다 버리고 왔었다. 그럼에도 차마 이걸 버리지 못하고 미국까지 가지고 온 이유는 뭐였을까?



 오랜만에 이 향수를 손목에 뿌려보았다. 알싸하면서도 달콤한 과일향이 상쾌하다. 한번 맡으면 결코 잊기 어려울 매력적인 향기다. 잔향은 파우더리 하게 남아서 따뜻하게 코에 맴돈다. 향수병은 마치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고, 그 안에 일렁이는 알코올 액체는 연한 핑크색이다.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향수병 안에 든 핑크색 향기가 앙칼지고 도도한 매력을 가진 20대 초반의 아가씨를 연상시킨다.


 사실 이 향기로 기억하는 실존하는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현재 내 남편의 전 여자친구. 나는 남편과 연애를 시작하고서 그분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대학 때 만나 오랜 시간 연인으로 지내다가 미국으로 유학 가서 헤어지게 되었다는 분. 당시 남편은 그분에게 미련이 남아있어 보인다거나 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그분의 존재가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온라인상에서 그 분과 남편의 흔적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급기야 나는 SNS를 통해 그분이 입생로랑의 베이비돌 향수를 좋아한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그분이 좋아한다는 그 향이 궁금해서 이 향수를 샀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얼마나 어리고 어리석은 일인지. 사진으로 본 그분은 하얀 피부에 긴 생머리가 어울리는 전형적인 대학 새내기였다. 나는 그분의 아름다운 모습과 다정했을 당시 나의 남편의 모습을 베이비돌 향수의 달콤한 향기로 박제시켜 버렸다. 어느새 20년 남짓 시간이 흘러 그들의 풋풋했던 첫사랑은 이미 지나간 일이 되었다. 그런데 향수에 가둬버린 그 이미지는 시간이란 무한 속에서 켜켜이 덧입혀 가는 게 아닌지. 달콤 알싸 한 향기 속 그분의 모습은 육아에 찌들지도, 세월에 주름이 생기지도 않은 영원히 풋풋한 20대의 얼굴 그대로이다.


 나는 연애를 하면서도 상대방의 사랑을 잘 믿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사람 자체를 잘 믿지 못했다. 그 사람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고 누구를 만났었는지 현재 나와 만나지 않을 때는 어떤 모습인지... 여러 방면에서 오래오래 그 사람을 지켜보고 나서야 천천히 신뢰가 생겼다.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겨우 사랑이 싹트곤 했다. 당시 나는 남편에게 인간적인 믿음이 쌓인 상태였지만, 그의 과거까지 다 알아야 정말로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과거의 연인의 얼굴과 좋아하는 향수까지 알아낼 만큼 집요했었나 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남편의 첫사랑 자체를 질투했었다. 당시에 그가 얼마나 그분에게 헌신적이었을지, 진심이었을지 그게 상상이 되고 부러웠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인데 말이다. 10년 전 남편의 기억을 내 멋대로 향수에 가두고, 다시 10년이 흘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질투는 어느새 우스운 과거 이야기가 되어있다. 이제 나는 실제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 대한 허상의 이미지를 가지고 질투했던 과거의 감정을 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과거의 나는 사람을 대할 때, 상대 마음의 수심을 몰라 노 저을까 말까 머뭇거리곤 했다. 하지만 남편과 만나 연애하고 결혼생활을 해오면 질투, 부정,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정면으로 끌어안는 과정을 거쳐왔다. 사랑 대신 날 선 말투와 침묵, 단절로 표현하는 못난 나를 끝까지 믿어주는 남편 덕분에 '사람을 못 믿는 병'도 고쳐진 듯하다. 나의 좋은 점들을 꾸준히 찾아내어 칭찬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기에 나 자신에게 좀 더 자신이 생겨서일까.


 이 글을 쓰기 전에, 남편에게 이 향수에 대한 숨겨둔 이야기를 먼저 했다. 그러면서 내가 그렇게 당신의 과거를 캐냈던 것이 미안했다고 사과도 하려고 했는데 하지 못했다. 이게 남편에게 미안한 일인지, 아니면 바보 같았던 과거의 나에게 미안한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사실 가장 미안한 건 모르는 사람에게 제멋대로 파헤쳐지고 기억돼 버린 '그분'이기 때문이다.


 사죄하는 마음을 담아, 미안하다는 말 대신 그분의 구남자 친구이자 나의 현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더 해보려고 한다. 오늘 아침에도 첫째 아들 도시락 준비와 아침밥 차리기를 동시에 하면서 둘째 딸이 엄마 찾는 울음소리가 더해져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남편에 건조기에서 빨래를 말없이 꺼내 개고 있는데 사실 어찌나 고맙던지. 홀로 이겨내야 한다고 자기 앞의 생을 무거워도 낑낑대며 들고 달려가는데, 옆에서 무겁지 않냐고 나눠들 자고 덜컥 짐을 가져가는 느낌이랄까.


  마지막으로 오늘 이 향수를 한번 더 뿌려본다. 달콤한 향기가 아름답지만 결코 40대에게 어울리는 향기는 아니다. 미국으로 보낼 짐을 정리할 때에도 나는 이 향수가 내 취향이 아님을 알았지만, 차마 버리지 못했었다. 쓰레기통에 이 아름다운 향수병이 버려졌을 때 마음이 황폐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향수를 버리더라도, 그 빈자리가 슬프게 느껴지지만은 않을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지나간 질투의 향기 대신에 사죄해야 할 과거의 시간을 깨달았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혼자 가는 길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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