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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Mar 07. 2023

영어는 용기가 필요해

2023.3.6(월)

 보통 주말이 다가오기 전 금요일이 되면 마음이 한껏 가벼워져 있지만, 이번 주말은 달랐다. 토요일에는 아들의 학교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오기로 되어 있었고, 일요일에는 또 다른 학교 친구들과 공원에서 같이 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밖에 나갈 약속이 생기면 항상 긴장이 먼저 되는데, 약속이 두 개나 있는 주말인 것이다. 토요일은 아이만 우리 집에서 놀 예정이라 크게 걱정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요일에는 부모와 아이들이 다 같이 공원에서 놀기로 한 거라 영어도 잘 못하는데 또 어찌 이 고비를 지나가야 할지 앞이 막막했다.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과는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다. 항상 이어폰을 끼고 앞만 보며 종종걸음으로 다녔었다. 그런데 미국에 와보니 여기는 모르는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농담도 잘한다. 아이들끼리 플레이데이트 약속을 잡아서 집에 초대도 하고, 파티도 하는 문화가 나는 너무 낯설었다. 그래서 하교길에 미국인 학부모들을 만나면 혹시 나한테 말을 걸까 봐 슬슬 피하기도 했다.


 그런데 등원을 맡고 있는 남편은 나와 달랐다. 오늘은 누구 아빠랑 이야기를 했고, 또 다른 날은 누구 엄마랑 이야기를 했다는 둥. 영어실력은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 잠깐이라도 학부모들과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모르는 사람이 길을 물으면 나는 모른다 하고 그냥 지나쳤다면, 남편은 꼭 길을 자세히 알려주려고 노력했었다. 이건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사람 성격의 문제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번 일요일에 만나기로 한 아이의 부모도 남편이 등원길에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 분들이다. 나도 하교하면서 그 아이의 엄마를 종종 보기는 했는데 먼저 말을 걸어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었다. 그분은 얼굴은 아시아계이지만 영어 발음을 들어봤을 때 미국에서 태어나신 분 같았다. 마른 몸에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여유 있어 보이는 모습을 멀리서 보며 그냥 아 멋지다 이렇게 생각만 했었다.


 남편 말에 따르면 그 친구의 엄마는 BTS의 팬이고 앞으로 한국에 여행 갈 계획도 있다고 했다. 나는 정작 한국 사람이면서 BTS를 잘 모른다. 만약 나도 BTS를 좋아했다면 서로 이야기하기가 편할 텐데... 이럴 때 보면 BTS에 대해 미리 좀 관심을 더 가져볼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세 가족이 공원에서 만나기로 한 일요일이 되었다. 오전부터 비가 오다 말다 했다. 나는 차라리 비가 내려서 약속이 취소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야속하게도 약속 시간이 되자 하늘이 맑게 개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남편을 앞장 세우고 공원으로 갔다. 아들은 친구를 보자마자 놀이터로 달려가서 신나게 놀았다. 그리고 놀이터에 남겨진 나와 남편 그리고 그 친구 엄마와 더듬더듬 안 되는 영어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분의 이름은 에블린이었다. 에블린은 내가 말할 때면 내 입모양을 보며 단어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주셨다. 그리고 나한테 말할 때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천천히 발음해 주셨다. 서로 나눈 이야기는 별 것 아닌 것들이었지만, 말하는 에블린의 눈빛이 너무 따뜻해서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누가 나의 말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해 준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감사한 일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한국어로 나눈 대화였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귀를 쫑긋 세울 수 있었을까? 서툰 영어로 하는 대화라 오히려 저절로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러자 에블린의 눈빛 너머 동그란 마음씨가 더 와닿았다.


 미국에서는 누구누구의 엄마가 아니라, 꼭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 2~3시간 서로에 대해 묻고 대답했던 것들은 결국 아이들에 대한 대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지만, 서로가 이름을 부르는 사이라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참 새롭다. 일을 하면서 아이 둘을 키우고 있는 에블린의 삶도 멋졌고, 이렇게 영어에 서툰 사람을 초대해서 마음을 나눠주는 용기에도 감탄했다.


 나는 앞으로 한국에서 한국말이 서툰 외국인을 만나게 되면 이렇게 먼저 손 내밀 수 있을까? 에블린이 나에게 했던 것처럼 따뜻한 눈빛으로 그 말을 이해해 주려고 노력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 나는 누군가의 도움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미국에서는 별 것 아닌 일상생활에도 도움이 필요해진다. 학교 선생님의 이메일 해석에도, 우편물 보내는 것에도 모두 도움을 청하고 싶어 진다. 새로운 환경에서 한 발씩 내디뎌 보려는 노력은 이래서 중요한 가 보다. 내가 도움이 필요한 입장이 되어보고, 그래서 내가 앞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입장일 때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게 되는 것.

일요일 공원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들을 기다리다가 만난 모르는 사람과 또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남편. 대단하다 정말.


 아마 오늘 아들 하교하러 가면 또 에블린을 만나게 될 것 같다. 나는 이전과 달리 먼저 인사를 건네볼 수 있을까? 먼저 말은 못 해도 눈빛을 피하지는 말자.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한 발자국씩 나아가보자, 이렇게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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