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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Apr 27. 2023

[캠핑카 여행] 2. 그랜드캐년에서 일출을 보다

 남편은 욕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아이 둘 키우고, 예민한 부인과 함께 사느라 정작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잊고 사는 아저씨. 그런 남편이 이번 여행 일정표를 보다가 문득, 이렇게 말했다.


그랜드캐년에서 일출을 볼 수 있을까?


 어떤 걸 하자, 해야겠다는 마침표로 끝나는 문장이 아니라, 물음표로 자기 의견을 말하는 남자. 이런 그의 작은 소망을 꼭 같이 이뤄보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랜드캐년으로 출발하는 날 아침, 캠핑카에서 맞이하는 첫날 아침 무척 설레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코 끝을 스쳤다. 밖에서는 새소리가 들렸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새벽 해가 동틀 때부터 작은 숲 속 친구들이 캠핑카로 모여들었다. 재밌는 울음소리를 내는 새가 종종걸음을 치며 돌아다니고, 토끼가 겁도 없이 텐트 근처까지 뛰어 들어온다.


저 멀리, 잘 안 보이지만 토끼.


 둘째 딸은 어김없이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첫째 아들은 캠핑카 안에서 이불을 둘러싸곤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그러다 동생과 같이 눕고 싶다며, 혼자 잘 노는 동생을 굳이 침대에 눕혀 한참을 부비적거렸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매라 좋은 점은 동생에게 질투가 없고 그저 귀여워한다는 것이다. 캠핑카 여행을 다니니, 한 공간에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된 게 좋았다. 여유롭게 아침 시간을 보내고 그랜드캐년으로 출발했다.


동생이 귀여워서 못살겠다는 몸부림을 치는 아들. 둘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 힘들지만 둘 잘 낳았다는 생각이 든


 두 시간 반 정도 차를 타고 달려 그랜드캐년 비지터 센터 근처의 ‘Trailer Village RV park' 캠핑장에 도착했다.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 사람들이 많았다. 차 간 간격도 좁아서 번잡한 느낌이었다. 차를 주차하고 바로 그랜드캐년으로 향했다. 비지터센터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10분 정도면 그랜드캐년으로 갈 수 있다. 주차장에서 사막으로 이어진 길을 걷다가 보니, 갑자기 엄청난 규모의 절벽이 튀어나왔다.


 난생처음 보는 규모의 장관에 헉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국이었다면 철조망이 아주 촘촘하게 쳐져 있었을 텐데, 그랜드캐년은 안전장치를 최소한으로 해두었다. 미국에서는 이런 안전장치들이 오히려 자연경관을 해친다고 생각한다. 안전장치 없이 절벽 가까이에 서 있으니, 누군가 뒤에 서있을 것만 같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절벽 아래에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 죽음이 절로 상상되었다.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지면 그냥 점이 되겠구나 싶었다. 죽음을 떠올린 순간, 아름답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죽음과 아름다움은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어딘가에 내 물음에 대한 해답을 담은 책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들은 가파른 절벽을 보고 놀란 듯했다. 무서워서 근처에도 가지도 못했다. 평생 오기 힘들 이곳에서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찍지 못하는 나는 애가 탔다. 하지만 억지로 절벽 가까이 데려올 수도 없지 않겠는가. 조금 기다려줬다니 아들은 조금씩 발을 뗄 수 있게 되었다. 집에 돌아갈 쯤에는 작은 바위 위에 올라 멋진 포즈를 취해 주기도 했다.

처음엔 무서웠지만 조금 지나니 괜찮아졌지? 우리 그랜드캐년에서도 그랬었잖아.


 앞으로 아이가 또 무서워하는 상황이 오면 써먹을 수 있는 멘트 하나가 생겼다 생각했다. 이렇게 우리 가족들의 이야기보따리가 채워지고, 아이와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생겨 좋았다.



  그날 오후 그랜드 캐년에서 내려와, 내일 아침 해 뜰 때 다시 와보자 했다. 이렇게 멋진 광경을 불타오르는 아침에 보면 또 어떨까? 아이들이 과연 잘 일어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남편의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해서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처럼 일찍 일어났다. 캠핑 사이트의 새벽 공기가 찼다. 과연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 있을까. 감기라도 걸리면 어떡하나. 포기할까 몇 번이나 망설였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남편도 일찍 일어났다. 표정을 보니 당장 그랜드캐년에 가고 싶은 얼굴이다. 그 얼굴을 외면하지 못했다.


 남편은 아들을 업고, 나는 딸을 안고 캠핑카 밖으로 나섰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이지만 추운 새벽에 걸으니, 거리가 배로 느껴졌다. 아들은 계속 춥다고 짜증을 내고 남편은 아들을 달래 가며 버스에 태웠다. 다행히 셔틀버스가 바로 왔다. 일출 시간도 딱 맞을 것 같았다.


  우리는 셔틀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그랜드캐년으로 달려갔다. 차갑던 공기, 두근거리던 마음이 아직도 기억난다. 절벽 위로 솟아오르는 붉은 기운. 일출을 기다리는 모두가 조용했다. 담요를 둘러싸고 바위에 기대앉아있던 젊은 커플, 카메라 셔터를 연신 누르고 있던 백인 아저씨, 그리고 아이를 한 명씩 달고 추위에 떨고 있는 우리. 떠오른 해와 한순간에 물들어 버린 하늘도 멋졌지만, 그 고요한 기다림의 시간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날씨는 춥다 못해 눈까지 내렸다. 낮에는 그렇게 더웠는데 새벽에 눈이 내리다니, 정말 알다가도 모를 대자연의 날씨이다. 아들이 너무 추워하자 남편은 재킷을 하나씩 벗어줬다. 하나 남아있던 패딩까지 벗어 얼굴까지 다 덮어 둘러줬다. 나중에는 자기 맨 살에 아들 얼굴과 손을 넣어 온기로 데워줬다. 매서운 바람이 불 때, 내 안에 있는 온기를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 있는 사람. 힘든 순간에도 끝까지 나누려는 그 모습을 보고, 아, 내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게 이런 남편의 모습 때문이었지 새삼 떠올랐다.

 


 그랜드캐년에서 내려와 캠핑사이트로 다시 걸어갔다. 해가 떠오르니 날씨도 조금씩 따뜻해져서 어느새 눈도 그치고 아들도 아빠 등에서 내려왔다. 아들은 나중에 기억할까? 그 추웠던 날에 아빠가 옷을 벗어주고, 등을 내어 업어줬다는 사실을. 그랜드캐년에서 본 일출은 잊어도 되니, 그 아빠의 온기만큼은 오래도록 기억해 주면 좋겠다. 이런 가족들의 따뜻한 시간들이 모여 아들의 가슴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기를.




+덧.

그랜드캐년에서 나와 홀스슈밴드로 가는 길.

우연히 차에서 내려 만난 풍경.

마침 스타워즈 옷을 입고 있던 아들과 다스몰 피겨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랜드캐년의 절벽을 지나, 이제 앞으로 평탄한 사막이 계속 이어진다.

정말 타투인 같은, 홀슈슈밴드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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