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스슈밴드, 파웰호수
그랜드캐년에서 2시간 정도 캠핑카를 타고 달려 홀스슈밴드에 도착했다. 서부 영화에서 많이 봤던 사막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강렬한 태양 아래 낮게 자란 풀들, 그래서 더 높아 보이는 하늘. 휘몰아치는 모래 바람. 스크린에서 보던 바로 그 사막 풍경이었다.
홀스슈밴드는 유명한 관광지라 사진으로 많이 봤었다. 뭐 얼마나 대단한 게 있겠냐 싶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보니 사람들이 꽤 많았다. 주차장에서 20분 정도 걸어가야 뷰포인트가 나온다 했다. 사람들을 따라 아이들과 함께 사막길을 걸었다. 우리가 여행한 게 4월이라 날씨가 많이 덥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햇빛이 따가웠다. 여름에 왔다면 아주 힘들었을 것 같다.
가는 길에 벤치가 있어서 잠시 쉬어가기도 했다. 옆에 앉은 동양인 몇 분이 아기를 보고 말을 걸어왔다. 그분들은 홀스슈밴드를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홀스슈밴드가 정말 멋있다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얼마나 대단하길래 저러시는 걸까. 사막길을 따라 걸으며 궁금증이 커졌다.
그랜드캐년처럼 홀스슈밴드도 사막 한가운데 갑자기 튀어나왔다. 망망대해 같은 사막에서 깎아지른듯한 절벽이 있고 그 아래에 푸른 호수가 있었다. 높은 하늘과 절벽, 그 아래 호수의 대비가 아름다웠다. 강한 햇빛과 서늘한 모래 바람도 대비되는 듯 어우러졌다. 절벽은 아주 가팔라 위험해 보였지만, 동시에 절벽을 이룬 바위는 오랜 세월 바람이 만들어 낸 우아한 물결 문양이었다. 온통 대비되는 것들 뿐이었다. 날 것 그대로의 자연은 반대되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신비로움이 있었다.
오랜 세월 모래가 만든 바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조각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한층 한층 누군가 손으로 빚는다 해도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야 이런 바위가 만들어지는 걸까? 내가 그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잔잔하게 불어오는 모래 바람이 바위를 깎아내리고 있었다. 잡을 수 없을 것 같은 흐르는 시간을 눈으로 보고 있자니 많은 감정들이 솟아올랐다.
나는 그 절벽 위에 서서 그랜드캐년에서와 같은 죽음과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느꼈다. 여기에서 누가 갑자기 나를 밀어 죽더라도 아무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애지중지하는 나의 몸은, 몇 천년 뒤에 한 줌의 모래가 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서 떨어져 죽더라도 소리 하나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노래 중에 옥상달빛의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라는 곡이 있다. 이 노래를 조용히 따라 부를 때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스러운 감정이 새어 나온다. 죽음이 두려운 건, 내가 사라졌을 때 남겨질 사람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 자리에 없었던 듯이, 만약 내가 사라진다면 어떨까. 그 높은 절벽 위에서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다.
아침에 일어나
곱게 정리한 이불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
아무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었어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그런 생각을
내가 사라졌으면
내가 사라진다면
처음부터
이 자리에 없었던 듯이
오늘도 어제처럼
열심히는 살고 있어
이렇게 살다 보면
내가 사라지면 안 되는
이유가 생기겠지
이렇게 살다 보면
- 옥상달빛,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엄마의 망상을 깨우는 건, 역시 생명감 넘치는 아들이다. 아들은 갑자기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에도 신나고, 나지막한 모래 언덕들도 마냥 신난다. 사막의 고운 모래도 재밌는 놀잇감이다. 안 그래도 모래바람 때문에 얼굴이 따가운데, 아들이 바닥의 모래를 헤집고 다니니 짜증이 났다. 그런데 자꾸 나보고 같이 모래성을 만들자 한다. 못 이기는 척 모래를 한 줌 손에 쥐었다. 그런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모래가 아주 따뜻했다. 아들이 아니었다면 절대 만져보지 않았을 모래이다.
홀스슈밴드에서 나와 파웰 호수 근처에 있는 캠프사이트 'wahweap RV&campground'로 이동했다. 파웰호수는 마치 바다처럼 보이는 아주 큰 해변이었다. 바다에서 할 수 있는 액티비티가 많이 있었지만 우리가 간 4월에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사람도 많지 않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캠핑카를 주차한 후 산책을 나섰다. 아들은 물과 모래만 보면 신이 나고, 남편과 나는 조용히 길을 걸었다. 여행의 중반쯤 들어서니 벌써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계속 캠핑카를 타고 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그날 밤, 아이들이 모두 잠든 밤에 다시 캠핑카 밖으로 나와봤다. 그랜드캐년 캠프사이트는 북적이는 곳이라 사진을 찍지 못했는데, 여기서 보는 밤하늘은 정말 고요했다. 점점이 작게 반짝이는 별들을 보았다. 내가 윤기 내며 정성스럽게 보내는 하루들 같았다. 별들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이어보며, 별자리로 이야기를 만들어 냈던 선조들의 마음을 생각했다. 내 하루들도 언젠가 이어질 날이 올까? 그때 어떤 이야기가 만들어질까. 하루하루를 빛내는 것도, 그걸 이어나가는 것도 내 몫일테다.
나는 그동안 방구석에 앉아 사진, 책, 영화로 세상을 배워온 것만 같다. 작은 원 안에서 나만의 세상을 만들고 그 무엇 하나 날 것 그대로 체험해 본 것이 없다. 대학시절 배낭여행도, 아르바이트도 한번 해보지 않았다. 도전 없는 삶은 안정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안정감을 느낀 적도 한번 없었다. 내가 놓치고 산 게 뭐였을까. 사진으로만 보고 만족하던 홀스슈밴드를 실제로 걷고 돌아온 날, 나는 그렇게 지난 시간과 앞으로 갈 날들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그래, 내가 이걸 보려고 여행 온 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