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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마 May 13. 2023

[캠핑카 여행] 4. 여행하며 자라는 아이들

엔텔로프 캐년

 캠핑카 여행 넷째 날. 우리는 점점 더 깊은 사막, 엔텔로프 캐년으로 향했다. 엔텔로프 캐년은 사막 속 작은 동굴 안 속에 숨겨져 있었다. 생각보다 위험한 곳이라 절대 혼자서는 갈 수 없다. 투어를 예약하여 전문가와 동행해야 한다. 모래 바람도 많이 부는 곳이라 어린아이들과 잘 다녀올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해보고 싶은 것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간 것이기에, 일단 가보고 안되면 돌아오자는 심정으로 출발했다.


 여행 오기 전 아들에게 엔텔로프 캐년 사진을 보여주며 신비로운 모래 동굴에 갈 것이라고 했다. 아들도 엔텔로프 캐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을 것이다. 스타워즈 영화 속 세상으로 들어가듯, 우리는 들뜨는 마음으로 엔텔로프 캐년 투어를 시작했다.


 7-8명씩 조를 이뤄서 사막을 따라 걸었다. 좁은 길과 가파른 계단을 지나가야 해서 위험하기도 했다. 같은 조 사람들 모두 잘 걷는 아들에게 칭찬해 주었다. 아들은 의외로 용감하게 계단을 오르내려 캐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허나, 문제는 의외의 곳에서 발생했다. 드디어 좁은 길을 지나 사진으로만 보던 신비로운 동굴이 나타났다. 조용하게 탄식을 뱉어내는 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빛이 내려오는 아름다운 모습과 모래를 번갈아 바라보며 모두들 사진 찍기에 바빴다. 그런데 정작 아들은 이게 다냐고, 짜증을 부리기 시작했다. 사진은 대체 왜 찍는 거냐, 빨리 움직이자, 쉬고 싶다, 계속 불만을 늘어놓는 것이다. 평생 다시 오기 힘들 곳을 하나라도 더 사진과 눈에 담고 싶어서 안달인 어른들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계속 반복된 풍경이 지루했나 보다.


 아들이 짜증을 계속 내자, 같은 조 사람들에게 눈치가 보였다. 다들 이곳에서 평생 추억을 쌓고 있는데, 아들이 그걸 방해하는 것 같았다. 우리 가족사진을 찍어주겠다고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들에게 아들이 거부하고 나쁜 말을 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타인을 배려하지는 못할 망정, 친절을 베푸는 사람에게 저런 태도를 보이다니! 타인에게 폐 끼치는 행동을 하면 화를 누르던 핀이 풀리고 만다. 다만 그 자리에서 화를 낼 순 없으니 캠핑카로 돌아가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겠다 생각했다.


 찜찜한 마음으로 캠핑카에 돌아왔다. 엄마 마음도 모르고 아들은 여전히 뾰로통 해 있었다. 자기 기분이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이 어린아이에게 어떻게 배려와 친절을 알려 줄 수 있을까. 그동안 아이에게 친절의 중요성을 알려주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그 자체로 행복한 것이다, 그 친절은 결국 너에게 돌아온다... 여러 이야기를 해도 귓등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번에는 전략을 바꿔보기로 했다.


 "엄마는 친절한 사람을 보면 참 부럽더라. 친절한 게 제일 센 거야! 사진 찍어주려고 했던 아저씨, 아줌마들은 힘이 너무 세서 자기들 사진을 찍고도 힘이 남아. 그래서 우리를 사진 찍어주려고 도와줬지."
"친절하다는 건 가진 게 많다는 뜻이지. 가진 게 많으니까 남에게 베풀 수도 있어. 나눠주더라도 남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거야."
"엄마는 미국에 와서 친절하고 싶은데 잘 안되더라. 영어도 잘 못하고 가진 게 없으니까 줄 수 있는 것도 잘 없어. 누가 나한테 한국어를 물어보면 잘 알려줄 수 있을 텐데. 아쉽다."


 누가 가장 키가 큰 지, 누가 가장 빠른 지가 초미의 관심사인 아들에게 친절한 것이 가장 강한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착한 것’, ‘좋은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아들이 ’센 것‘이라고 하자 좀 내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실제로 미국에 와서 ‘친절’과 ‘힘‘의 의미를 많이 생각한다. 여기서는 의도치 않게 나에게 이런저런 호의 베푸는 것들을 많이 받게 된다. 어린 딸아이를 안고 다니고 영어도 잘 못하니, 저절로 도움을 부르는 모양새 일테다. 유모차를 끌면서 동시에 무거운 문을 여닫으려고 할 때, 뒤에서 쓱 나타난 손이 문을 잡아줄 때가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들에게서 친절과 동시에 여유로운 힘을 느낀다.


 가끔 의심스러울 정도로, 처음 보는 나에게 친절한 사람도 있다. 절대 나에게 어떤 의도가 있어서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심을 하게

된다. 나는 지금 내 앞길도 제대로 걸어가지 못하는 약자이고, 이방인이고, 타자라는 의식이 있어서 이다.


 그럴 땐 예쁜 구두를 신고 또각또각 앞만 보고 걸어가던 서울에서의 내 모습이 그리워진다. 결혼하기 전, 나는 7cm 이상 높은 구두만 신고  누가 말을 걸어도 쌩하게 지나가 버리는 그런 아가씨였다. 그 시절이 가끔 떠오르는 건 그때 내가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힘’ 때문일까.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 힘을 과시하고 싶었지, 나눌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철없는 아가씨였다.


 아이에게 친절이 센 거라고 알려준 그날, 우리는 마지막 목적지인 자이언캐년으로 향했다. 그곳은 캠프사이트가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주차하고 보니 캠핑카도 기울어서 화장실 물이 새기 시작했다. 내가 아기띠로 둘째 아이를 안고 남편과 낑낑대고 있자, 갑자기 어떤 아저씨 두 분이 나타나 차 평행 맞추는 걸 도와주셨다. 올 가을 한국으로 여행 갈 계획이 있다던 그분들과 대화를 하며 또 한 번 친절의 힘을 배웠다.


 그 모습을 보던 아들이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감사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한국에 여행 가면 써야 하니 한국어도 알려주겠다며, 한국어와 영어로 고맙다는 말을 썼다. 자이언캐년에서 떠나는 마지막 날, 그

편지를 L과 Tom에게 건네주며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잊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진에

담긴 엔텔로프 캐년의 멋진 모습 보다, 그때

우리가 배웠던 친절의 의미가 더 깊이 새겨질 것이다.






+ 얼마 전, 집에 놀러 온 친구에게 하나 남은 구슬을 절대 양보하지 못하던 아들. 구슬이 하나밖에 없어서 이건 나눠줄 수 없다고 했다. 두 개만 있어도 나눠줄 텐데 한 개라서 절대 안 된단다. 친절하다는 건 가진 게 많다는 의미라는 말의 의미가 잘못 입력된 것 같다. 하나만 있어도 나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내가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걸까..?


+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 생명력 가득했던 자이언 캐년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왼쪽에 보이는 모래 바위 틈 안에 엔텔로프 캐년이 있다.
모래 층층이 뜨거운 햇살이 만드는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처음엔 분명 신났던 아들.
하늘 위에서 해가 쏟아지면, 미지의 세계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카메라만 대면 작품 같았던 곳!
물이 지나간 자리가 이렇게 아름답다.
같이 사진 찍자 해도 절대 안오던 아들. 모래만 가지고 놀았다.
아들 없는 가족 사진.
아들 없는 가족사진2. 아들은 뒤에 숨었다.
아들이 쓴 편지. 이렇게 써줘서 내가 더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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