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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소리 Oct 17. 2023

귤밭 어르신의 빨강 오디오

우리 집 돌마당 너머에는 자그마한 텃밭이 있다. 돌마당에서 예닐곱 계단을 내려가면 돌담에 둘러싸인 아늑한 텃밭이 나온다. 남편이 육지에 가고 난 후 텃밭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지냈다. 긴긴 장마를 보내고 나니 텃밭에는 억센 풀들이 무럭무럭 자라났고, 밭에서 자라난 이름 모를 덩굴들이 우리 집 돌마당까지 잔뜩 올라왔다. 식물도 관심을 듬뿍 주어야 잘 자라는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던 덩굴들이 이렇게나 씩씩하게 자라났다. 때로는 무관심이 약이 되기도 한다던데, 그 말이 영 틀리지는 않은가 보다. 마당에 빨래를 널 때조차도 텃밭의 무성한 풀들이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덩굴들이 빨래 건조대까지 올라오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이거 뭐 한 시간이면 다 끝나. 여기보다 몇 십배 넓은 밭도 풀 다 베는데 이거는 일도 아니지"

"네? 이걸요? 한 시간에요?"

"지금 같이 해 볼 거?"

"네네네네! 같이 해 주시면 너무 좋죠!"


텃밭 너머에는 조그마한 귤밭이 있다. 귤밭 어르신은 매일같이 귤 창고를 드나들며 귤밭을 관리하신다. 텃밭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 어르신께 인사를 드리며 여쭈었더니 어르신께서 흔쾌히 텃밭 정리를 함께 하자고 말씀하셨다.


한 시간이면 끝난다는 말씀은 농담이라 생각했다. 풀이 어마어마하게 자라서 발을 어디부터 내디뎌야 할지 모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르신께서는 긴팔 티셔츠와 긴바지를 입고 장갑을 끼고 오라고 말씀하셨다. 집으로 들어와서 긴팔티셔츠와 두꺼운 바지를 입고 목장갑을 꼈다. 기미걱정에(이미 많이 생겼다) 창 넓은 모자까지 푹 눌러썼다. 다시 텃밭으로 나갔다.








어디선가 임창정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까는 분명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 어르신께서 낫과 함께 세상 힙한 오디오를 가지고 나오셨다. 돌담 위에 앉아 있는 빨강 오디오가 너무나 정겨웠다. 어르신도 임창정 노래를 들으시는구나 생각하며 노래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따스한 햇살과 정겨운 돌담과 그 위에 올려진 세상 힙한 빨강오디오. 한참 노래를 듣고 있는데 테이프가 늘어진 소리가 난다. 테이프를 넣어서 듣는 오디오는 아닌 것 같은데. 건전지가 다 됐나 싶어 어르신께 여쭈었다.


"어르신 이거 건전지 다 됐나 봐요. 노래가 막 엄청 느리게 나오는데요."

"가만 놔둬."


어르신은 대수롭지 않게 가만 놔두라고만 하셨다. 가만 놔뒀다. 조금 있으니 노래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굵직하고 느려진 목소리를 듣고도 늘 있는 일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풀을 베고 계시는 어르신의 모습과, 쉬지 않고 지저귀는 새소리와, 낫을 들고 어르신과 함께 풀을 베고 있는 상황이 뭔가 따스해서 웃음이 나왔다.


임창정 노래가 끝났다. 이번엔 어떤 노래가 나올까 싶어 빨강 오디오에 저절로 귀 기울여졌다.  예상을 뛰어넘는 어르신의 선곡에 흠칫 놀랐다. 임창정 곡 다음이 이미자 선생님 곡일 줄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이미자 선생님 노래가 끝났다. 다음 곡이 궁금했다. 낫으로 열심히 벤 풀이 오디오 앞에 높게 쌓이자 어르신은 세상 힙한 빨강 오디오를 어느새 늙은 호박 옆으로 옮겨 놓으셨다. 돌담과 늙은 호박과 빨강 오디오.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가 없다. 그나저나 이번엔 어떤 곡일까.



어르신의 선곡은 종잡을 수가 없다. 이번엔 가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겠다. 어디서 많이 들어는 봤는데. 오디오의 사용법도 노래 선곡을 누가 한 건지도 궁금했다. 오디오 우측상단의 생수통 뚜껑처럼 보이는 저것은 오디오의 볼륨을 조절하는 장치인 걸까. 게다가 오디오에 있는 숫자버튼은 뭘 하는 데 쓰는 걸까.


어르신의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풀을 베다 보니, 어르신 말씀대로 한 시간 정도만에 텃밭이 멀끔해졌다. 어르신의 말씀은 농담이 아니었다. 길다랗게 자란 풀들이 베어져 어느새 한쪽 귀퉁이에 높다랗게 쌓였다.









어르신께 어떻게 사례를 할까 고민하다가, 7만 원을 주고 잔디 풀을 깎았다는 옆집 이웃의 말이 떠올라 수고비 이야기를 꺼냈다. 제집 귤밭도 외국인 노동자 써서 관리하는데 남의 집 텃밭 관리하고 돈 받았다고 동네에 소문나면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닌다며 호탕하게 웃으셨다. 마음으로 도와주신 어르신께 수고비 얘기를 꺼낸 게 뭔가 죄송해서 나도 웃었다. 시원한 거 마실 거나 한잔 가져오라는 어르신의 말씀에 마음을 담뿍 담은 얼음 동동 매실차를 내어드렸다.


 



텃밭이 멀끔해졌다. 내년 봄에는 밭 갈아서 뭐라도 심어 보라며 집에 씨앗 많으니까 심을 거면 얘기하라고 말씀하시는 귤밭 어르신. 어르신의 무심한 따뜻함과 세상 힙한 빨강오디오 덕분에 어스름 해질녘의 가을바람이 차갑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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