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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소리 Jul 29. 2023

삼식씨는 그렇게 영식씨가 되었다.

My Best Friend!

"자기 잘 가!"

"응 얼른 들어가!"



제주 공항 국내선에서 인사를 나누던 삼식씨와 나는 애틋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10년 넘게 서로 닮아가며 이제는 개그코드도 잘 맞고 (일방적인)대화도 많이 나누고 꽤 사이좋게 지내는 편이지만, 나에게 다정하지는 않았던 삼식씨인데. 결혼 후 처음으로 넘치게 애틋한 눈빛을 발사했다.


남편은 7월 11일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제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 찾아보려 했는데. 렇다 할 공부도, 힘찬 도전도, 뼈아픈 실패도 없이 결국 그냥 돌아가게 되었다. 물론 해보지 않았던 일을 경험했고, 할 수 있겠다고 느껴지는 일의 범위가 넓어졌으니 얻은 것이 많다. 하지만 살짝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학교생활에 잘 적응한 아이들을 학기 중에 전학시키는 것이 마음에 걸려 결국 남편 먼저 가 있기로 했다. 남편의 길쭉이 애착인형인 TV리모컨과, 남편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남편의 베스트프랜드 소라색 소파와, 집에서 10년 넘게 입고 있는 목 늘어난 검은색 GUESS 티셔츠와, 구멍 난 바지를 집에 덩그러니 남겨둔 채. 삼식씨는 그렇게 일식씨도 이식씨도 아니고 갑자기 영식씨가 되어버렸다.


당연히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콧구멍을 벌렁이는 (평생을 무뚝뚝했던) 남편을 보자 내 눈에도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모두가 설레는 제주공항에서, 국제선도 아닌 국내선에서 청승맞게 눈물을 훔치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콧구멍을 두어 번 벌렁이고는 끝내 뒤돌아보지 않고 가버린 삼식씨. 한 번 뒤돌아봐 주길 바랐는데, 손 흔들어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벌건 눈으로 뒤를 볼 수가 없어 앞만 보고 가방을 검색대 위에 올려놓았던가보다.


무뚝뚝하지만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훔치고 코를 훌쩍이는, 알고 보면 여린 삼식씨. 더 이상 못 다니겠다던 곳으로 결국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하필 커다란 등산 가방을 한쪽 어깨에 툭 걸쳐 메고 걸어 들어가는 삼식씨가 안쓰러웠다. 캐리어를 끌었으면 안쓰러움이 덜했으려나.








삼식씨는 떠나기 며칠 전부터 나름의 준비를 했다. 커피 내리는 법을 동영상으로 남겨 주었고,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성산일출봉에 갔을 때는 표를 직접 한번 끊어보라고 권했다. 당시엔 지금 누굴 바보로 아느냐며 웃어넘겼지만, 삼식씨가 어떤 마음으로 며칠을 보냈을지 헤아려보니 코끝이 찡했다.


과속방지턱을 지나갈 때면 어김없이 앞으로 고꾸라져버리는(고쳐야지 하면서 몇 달을 그러고 다녔다.) 내 차 내비게이션 지지대를 쿠팡에서 주문해 단단히 고정시켜 주었고, 꺼진 줄도 모르고 데코로 달고만 다녔던 블랙박스를 제대로 작동되게 손봐주었다.


야간 근무가 잦아서 낮에 집에 있을 때가 많았던 식이씨. 그러고 보면 우리는 늘 함께했다. 전업주부인데도 아들 친구 엄마와 왕래를 거의 하지 않고 지냈던 나. 아이가 연결되어 있어 미묘하게 불편한 감정들을 느낀 날이면, 내 마음속에 내 아이보다 아이 친구 엄마가 더 오래 머무르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내 아이만 보는 것을 선택했었다. 그럼에도 외로운 줄 모르고 그럭저럭 살아온 이유는 식이씨가 늘 나와 함께 해서였나 보다. 병원에도, 마트에도, 식당에도, 뒷산에도, 아웃렛에도, 다이소에도, 불금 치맥타임을 가질 때도 늘 티격태격 함께 했다. 그러는 사이 식이씨는 나의 베스트프랜드가 되어 있었다.


텅 빈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식이씨는 걱정과 달리 생각보다는 회사에 잘 다니는 중이다. 무얼 먹었는지 사진을 찍어 보내고, 시시때때로 전화를 한다. 연애 때도 하지 않던 행동을 하는 영식씨. 삼식씨에서 영식씨로 바뀌더니 갑자기 딴사람이 되었다.


마트에 가서 카트를 직접 끄는 것이 어색하고, 겨터파크 폭발하며 운전할 일이 많아져 정신없고 진땀 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영식씨의 새로운 모습이 기분 좋다. 각자의 하루를 주도적으로 설계하며 나도 자라고 영식씨도 자라는 중이다.








영상통화를 하다가 공항에서 봤던 식이씨의 뒷모습이 떠올라 목구멍에 뭔가가 불쑥 올라왔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작 비행기 시간 거리에 남편을 보내고는, 남자친구를 멀리 타국으로 떠나보낸 드라마 속 여주인공에 빙의되어 애틋한 마음 가득 안고 영상통화를 하던 나. 영상통화 화면에 본인의 얼굴을 들이미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사춘기를 맞이한) 큰아들의 한마디에, 나는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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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래 진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엄마가 좀 과했지? 며칠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조금 기다려 봐. 백만 년 만에 느끼는 연애감정 며칠만 즐겨보자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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