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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웃음소리 Jan 06. 2023

긴긴밤 후유증

직원 : 쇼가 진행되는 동안 동물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11세 : 엄마 저 사람이 동물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근데 사실 저렇게 동물한테 쇼 시키는 게 제일 해 끼치는 행동 아니야?  






긴긴밤을 읽고 많이 울었다. 사실은 초등학생 아이가 긴긴밤 정도의 책을 읽어낸다면 OK라는 말을 듣고는 계속 벼르고 있던 차였다. 우리 아들도 과연 이 책을 읽을 수 있을까 궁금한 마음에 도서관에서 빌려왔던 거다. 하루도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는 아이인데 글밥이 영 오르지 않아 고민 중이기도 했다.


아이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면서 책이 궁금한 척 발연기를 하며 책을 쳤다. 그렇게 한 장 두 장 읽기 시작한 책을 눈물 콧물 쭉쭉 짜내며 진심으로 끝까지 읽어내었다.


내가 휴지로 코까지 흥 풀어가며 꺼이꺼이 울면서 책을 보고 있으니 동생과 놀고 있던 큰아이가 도대체 무슨 책인데 그러느냐며 크게 관심을 보인다. 발연기할 때는 관심 없던 아이가 진짜 책에 빠져들어 있는 나를 보더니 궁금해한다. 알고 보면 아이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더 잘 구분해내는 것 같다.


나에게 다가와 글밥을 보더니 아이가 한 발짝 물러선다.  이때다 싶어 그날 저녁 침대에 누워 긴긴밤을 읽어주었다. 아이의 글밥을 고민하면서도, 사실은 내가 힘들어서 그 정도 길이의 책을 한 번에 다 읽어준 적은 없었다. 읽어주려 하다가도 꾸벅꾸벅 졸며 잠꼬대를 하기 일쑤였다. 그날은  마음먹고 읽어주었다.


책을 읽어 주며 또 울었다. 큰아이는 내가 우니까 계속 집중한다. 궁금한지 중간중간 뒷페이지를 넘겨보기도 하고, 설마 또 죽는 거냐며 뒷 내용을 스스로 떠올려보기도 한다. 둘째는 책에 관심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형과 엄마가 단 둘이 얘기하는 게 싫은지 바지런히 대화에 참여하며 내 목소리를 듣다가 스르르 잠이 든다.


큰아들은 끝까지 들었다. 마지막까지 읽어낸 후 맨 뒷장의 그림을 보고 큰아들과 나는 한참을 그 페이지에 멈춰있었다. 본인은 엄마처럼 감성적이 아니라며, 코까지 풀어대며 엉엉 우는 나와 선을 긋던 아들이었다. 마침내 바다에 도착해 펭귄 무리 속에서 웃으며 뒤를 돌아보고 있는 주인공 얼굴이 너무 가슴 찡하지 않느냐는 나의 말에 선심 쓰듯 "그건 좀 그러네" 하고 대답한다.


 뒷장 그림 속 펭귄이 웃고 있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는 사실을 한참 뒤늦게 알게 된 나는 도서관에서 다시 긴긴밤을 빌려왔다. 아들과 함께 맨 뒷장 그림 속 눈물을 글썽이며 웃고 있는 펭귄을 다시 보았다.


어느 학교에 다녀온 아들이 학교 도서관에서 긴긴밤을 다시 읽었다고 무심한 듯 얘기한다. 나는 또 호들갑을 떨며 어쩜 그랬느냐고 물개박수를 쳤다, 그 순간 막내가 갑자기 빠진 이를 한껏 드러내며 나에게 안긴다. 내가 이 빠진 게 너무 귀엽다고 보여달라고 할 때는 입을 꾹 다물더니, 형에게 물개박수를 치고 있으니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이를 드러내며 나에게 안기었다. 막내는 다르다.






아쿠아플라넷에 다녀왔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이가 학교에서 긴긴밤을 읽고 난 며칠 후였다. 쇼를 보기 전 아들이 무심한 듯 건넨 말을 들으며 우리 아들이 긴긴밤을 통해 많은 생각을 했구나 싶었다. 아쿠아리움 모퉁이 좁은 공간에서 뒤뚱거리는 펭귄을 보며, 알을 품던 치쿠와 두렵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던 마지막 페이지속 주인공 펭귄을 떠올려보았다.


아들의 글밥이 왜 안 오르는지 걱정이 많던 엄마였는데, 은 책을 읽는 중에도 눈에 보이는 글밥 대신 눈에 안 보이는 마음은 자라고 있었구나 싶어 마음이 몽글해졌다. 

(그럼에도, 글밥은 올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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