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수 없지만,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우리 언니는 미인이다. 아빠를 닮아서 피부가 하얗고 눈은 똘망똘망하고 코도 입술도 예쁘게 생겼다. 나와는 다르게 조용하고 수줍음이 많았는데 호탕하게 웃기보다는 살며시 웃는 편이고, 살짝 튀어나온 앞니를 감추기 위해 손으로 자주 입을 가리곤 했다. 내 기억 속 언니는 울고 있거나 무표정인데 조각난 기억들이 단편적이라 그런 게 아닌가도 싶다. 함께 웃었던 날들이 더 많았던 것도 같은데.
언니의 어머니이자 나를 키워주셨던 어머니가 아빠와 이혼을 하시기 전까지 내 삶의 큰 부분은 언니였다. 또래 여느 자매가 그러듯, 어린 난 3살 터울의 언니의 모든 것을 다 따라 하고 온종일 붙어 다녔다. 언니가 나를 조금이라도 서운하게 만든다? 재잘거림의 대명사였던 나는 말로 제압했다. 말싸움을 하면 끝에 우는 건 언니였으니까. 조잘조잘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떠들어 대는 걸 이길 재간이 있었을까? 수없이 약 올리고 댐벼도 언니는 단 한 번도 “넌 내 친동생이 아니야”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키워주셨던 엄마와 비교하기엔 죄송스럽지만, 엄마는 내게 ‘넌 아빠 딸이야’라는 그 당시 7-8살인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셨었다. 어른이었던 어머니보다 더 성숙하게 나를 지켜줬던 것이 언니였던 것이다.
사춘기가 오자 언니는 ‘날라리’가 되었다. 당시 ‘날라리’라는 단어는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청소년에게 붙일 수 있는 꼬리표였는데, 바로 언니였다. 싱크로율 100%! 중학생이면서 노랗게 탈색했고, 무려.. 남자 친구들을 만나고 다녔다. 언니의 탈선(?)으로 집안의 고성 데시벨은 +1이 되었다. 날라리 언니를 바로잡기 위해서 가장 편리한 방식인 ‘매’를 들기 시작했는데, 오빠와 아빠의 어마어마한 구타 속에서도 언니는 다음 날 보란 듯이 또 하지 말라는 짓을 하고, 가출을 했다. 그렇게 일관스럽게 탈선하는 언니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언니는 살고 싶어서, 숨통이 틔의고 싶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무지한 우리 식구들은 아무도 듣지 못했던 것이다.
키워주셨던 어머니가 “겨움아, 넌 내 자식이 아니야”선언하고 나만 집에 두고 떠난 후엔 언니를 가장 많이 그리워했다. 그때 고등학생이었던 언니는 손편지를 종종 보내줬다. 그중 아직도 기억하는 구절이 있다.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던 언니의 진짜 마음이 엿보였던 말.
겨움이 또래의 애들이 지나가면 겨움이 생각을 많이 해. 겨움이도 언니 생각할까?
성인이 되어서 언니와 연락을 하고, 키워주셨던 어머니에게 첫 월급으로 선물을 사다 드렸다. 남들보다 2배의 가족이 있는 행복한 사람으로 잠시 살 수 있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이다. 아빠가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후, 모든 것은 달라졌다. 믿음이 없었기에, 언니와 오빠가 나라는 사람을 정확하게 몰랐기에 벌어진 대참사였다고 생각한다. (아빠의 재산을 나의 엄마로부터 지키기 위함이라는 명목으로) 키워주셨던 어머니가 아빠와 몰래 혼인 신고를 하고 언니와 큰오빠가 증인으로 서명을 하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던 날, ‘언니의 동생으로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언니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곳은 대전 가정 고등 법원이었다. 혼인무효소송 중에 증거라고 내놓은 서류와 녹음파일에 서로에게 질릴 대로 질려있었던 찰나였다. 언니는 언니의 어머니의 곁에서, 나는 나의 엄마 옆에 붙은 채로 지나치면서 눈을 마주쳤다. 최대한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무진장 노력했었는데, 아직까지도 그때의 분위기와 공기가 이토록 생생하단 것은 나 역시 깊게 베였던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만큼 언니에게도 그 순간이 아픔이 되었었을까? 우린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었다고 언니는 생각했을까? 다른 배에서 나온 두 자식이 어떻게 평생 오붓한 자매로 살 수 있었냐고,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거라고?
쓰던 립스틱 색이 예쁘다면서 내 것을 하나 더 챙겨주고, 일하는 커피숍에 가면 “ 내 동생이야”라고 수줍게 웃으면서 주변에 나를 소개하던 언니가 있었다. 그때의 언니도 내게 진심이었다. 이렇게 틀어져버린 건 다 언니 탓이라고 원망하고 미워했던 적도 있었지만, 7년이 지난 지금 내 감정은 ‘안쓰러움’이다. 아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나와 아빠를 속이는 게 최선이라고 믿었을 그때의 언니에 대한 안쓰러움, 동생인 나를 오롯이 믿을 수 없었던 언니의 얇은 믿음에 대한 안쓰러움, 결국은 이렇게 돼 버린 관계에 대한 안쓰러움.
이제는 그것이 언니의 엄마를 위하고 아빠를 진심으로 위했던 것이라고 언니가 말한다면 믿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언니는 나와 다른 사람이니까.
언니가 곧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평생 결혼 안 할 줄 알았는데 용기를 냈구나’,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두 단어 속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불행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렸을 가정환경 속에서 자랐고, 혼자가 된 어머니 곁에서 오랫동안 딸의 역할을 했고, 이혼한 작은 오빠의 아기를 마치 자신의 자식처럼 오랫동안 키웠고, 고등학교 학비를 받으러 찾아갔을 때 매정하게 내친 아빠여도 드실 반찬을 지금까지도 갖다주고 있는 사람. 그것이 내가 아는 언니다.
오랫동안 연애한 그분이 언니의 아픔을 옆에서 지켜봐 준 만큼 따스한 가정을 함께 만들 수 있는 넉넉하고 품이 깊은 사람이길 바란다. 언니의 상처와 아픔들이 그 관계 속에서 눈 녹듯이 녹고, 멋진 가정을 이뤘으면 좋겠다.
“니도 정씨 집안사람인데 결혼식에 와야지” 친척들은 전화로 말한다. 후… 그놈의 정씨 집안, 그놈의 가족 타령. 초대받지 못한 결혼식에 동생이랍시고 나타나면 신부가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들을 보지 못하는 어른들 때문에 한숨이 깊게 나온다. (정녕 최선입니까? 생각을 하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고추잠자리가 잎사귀에 살포시 앉아 있을 10월의 어느 날을 그려본다. 아름다운 신부로 서 있을 그 순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행복이 언니의 품 안으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무표정, 슬픈 표정의 언니가 아니라 약간은 튀어나온 앞니를 사람들 앞에 훤히 보이면서 환하게 웃고 있는 신부이길 바란다. 상처를 딛고 용기를 내서 자신만의 가정을 이룬 언니의 새로운 발걸음, 그 발자국마다 꽃이 피어나길!
진심을 다해 바래본다. 이 순간 만큼은 동생으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