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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겨움 Dec 29. 2019

나는 '정'씨, 내 동생은 '이'씨

성이 다른 동생이라고 특별한 건 없다.


처음 동생을 만났던 날은 여전히 생생하다. 8살이었던 동생은 양갈래로 머리를 땋아 예쁜 머리끈으로 질끈 묶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서희야, 인사해. 네 언니야.”


엄마가 나를 소개하자 8살 서희는 꾸벅 머리를 숙여 인사하곤 뚫어지게 나를 쳐다봤다. 그 날부터 여동생과 나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평생 막내로 자라 온 내게 동생은 오랜 숙원사업이었다. 그런 내게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동생이 생긴 것이다. 신이 났지만 그 신남은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 엄마는 나를 사랑해.”

“우리 엄마가 언니 오래.”


서희는 말 끝마다 ‘우리 엄마’를 강조했다. 외동딸로 컸던 그녀였다. 엄마가 이혼을 하면서 강제로 떨어져서 친가에서 자라다가 엄마랑 이제 겨우 같이 살게 되었구나 하고 왔더니 웬 여자아이(나)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녀에게 난 경쟁 상대였다.

엄마의 사랑을 나눠가지려고 하는 경쟁자.


그러나 나 역시 태어나서 처음 만난 내 진짜 엄마였다. 양보할 수 없었다. 묘한 긴장감이 그녀와 나 사이에 한참을 흘렀다.


동생이 초등학생이고 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나는 치졸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동생을 대했다. 내 말을 듣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면 갑자기 짐을 쌌다. 늦은 밤. 엄마와 아빠는 일을 하느라 집에 없었다. 짐을 갑자기 싸기 시작하면 동생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무서움이 많았던 내 동생은 집에 혼자 있는 걸 세상 최고로 싫어했다.


".. 어디 가?" 동생이 조심스럽게 물으면 "친구네 집 갈려고. 네가 너무 말 안 들어서 너랑 못 있겠어."라고 차갑게 답했다. 문지방에서 서서 동생은 한참을 쳐다보다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동생이 아무리 울어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언니 잘못했어요. 가지 마요." 동생의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이 나와야만 짐 싸는 걸 멈추고 안아줬다. 두고두고 이때의 나를 탓한다. 성숙하지 못했던 난 동생을 공포스러운 상황에 놓이도록 한 후 내가 원하는 말을 하게끔 했다. 그건 아빠가 우릴 대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이런 것 말고도 어린 내가 동생에게 했던 못되 쳐먹은 행동이 많다. 그럼에도 서희는 여전히 내가 항상 자신에게 잘해주고 선을 넘지 않았던 언니로 기억한다. 몇 번이나 고해하는 마음으로 반성했지만 동생은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며 내 사과를 들어주지도 않는다. 정말 기억을 못 하는 건지, 기억나지 않는 척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함께 크면서 싸우고 울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시간과 시절이 흐른 후에서야 서로를 자매로 인정하고, 엄마를 나눌 수 있었다.  


성이 다른 자매와 살고 있다는 건 복잡한 가정사를 드러내는 직격탄이다. 이건 서희와 내가 평생 가지고 가야 할 숙제이기도 하다. 이혼보다는 좀 더 깊고, 어려운 숙제다.  


“성이 다른 게 어때서? 난 상관 안 해.”


고등학생이 된 그녀가 어느 날 선언했다. (솔직히 말해서, 난 내 동생이 나보다 더 쿨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한참 어리지만 나보다 현명하다.)


“나도 상관 안 해.”


우리는 같이 웃었다. 웃지 못한 유일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굳이 그렇다고 드러낼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편하자고 동생의 성을 마음대로 바꿔서 사람들에게 소개할 순 없었다. 사람들이 감히 묻지는 못했지만, 우리 둘의 성이 다른 것을 쉽게 인지할 수 있다. SNS로 서로의 사진에 댓글을 달거나, 가족관계 증명서를 뽑아서 제출할 때, 동생 보험을 문의하면서 이름을 넣을 때 등. 눈치만 조금 있다면 우리의 성이 다르다는 것을 들킬 수 있는 순간은 참으로 많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살기로 마음먹었다.

성이 다르다고 내 동생이 아닌 것도 아니고, 성이 같아야만 내 동생인 것도 아니니까. 엄마로 연결된 우리는 누구보다 끈끈하다.



서희는 고집 센 남동생 같은 여동생이다.

바나나를 사다 주면 비닐봉지를 까서 먹기 귀찮다고 먹지 않는 귀차니즘의 대명사이며, 용돈을 줄 때만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자본주의적 태도까지 지니고 있다.


“서희야. 이번 주에 만날래?”

“(귀찮듯이) 흠.. 왜?”

“그냥~ 보고 싶으니까.”

“(여전히 귀찮은 듯) 나도 보고 싶긴 한데.. 그럼 언니가 올 거야?”

“언니가 사는 근처에 고깃집 맛있는 데 있어서 고기 사줄라고 했는데. 그럼 다음에 먹을까?”

“아니!!!! 내가 갈래. 고기 고기 고기!!!!”  


절레절레....

동생들은 고개를 좌우로 젓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성이 다른 내 동생도 예외는 아니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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