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겨움 Jun 30. 2020

잊지못할 이별

첫사랑이었다. 다시는 없을.

첫사랑에 대한 정의가 개인마다 다를 테지만, 내게 첫사랑은 '날 처음으로 눈물 나게 한 사람'이다. 중.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남자 친구들 때문에 울었던 기억은 없었다. 좋아하지만 사랑하지는 않아서였을까? 사랑한다는 말을 유난히 아꼈던 난 술에 취해서 "왜 넌 나한테 사랑한다는 말 안 해?"라는 남자 친구들의 끈질긴 질문에도 입을 꾹 닫아버렸다.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 그리고 처음으로 모든 것을 준 사람이 생겼다. 나의 첫사랑이었다. 중학교 때 이미 여자 경험이 있다고 했던 생양아치중의 양아치였던 그 아이를 하필이면 대학교 1학년 때 만나서 나는 그 아이의 몇 번째 여자가 되었고, 그 아이는 나의 첫 번째 남자가 되었다.


헤어질 때는 여지없이 잔인해야 한다고 믿었던 20대였다. 그래서 처음 그 친구랑 헤어질 때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좋아졌어." 태어나서 너처럼 잔인한 여자는 처음 봤다며, 그 아이는 그 날로 바로 학교에 나오지 않았고 매일 밤 친구들과 술과 당구에 찌들어 살았다. 같은 과였기 때문에 당연히 욕을 먹었다. 이게 다 새로운 사람을 좋아하니까 겪어야 할 내 짐이라고 믿고 버티었다. 근데 그 아이를 만날 때 날 흔들었던 남자애가 갑자기 다른 노선을 택했다. 나를 슬슬 피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났던가, 난 내 첫사랑이 그리워졌다. 다시 만나자고 매달렸고, 내 마음을 받아준 덕에 다시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사랑놀음은 뭐가 이렇게 어설프고 복잡할까? 글을 쓰면서도 웃긴다.) 서투름이 가득했던 20대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줄 몰랐고, 자주 다투었다. 다투는 날들이 길어지자 함께 지쳐가던 나날이었다. 그 아이가 친구들을 만난다며 집에 다녀왔던 날이었다. 평소처럼 맥주집에서 치킨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뽀뽀를 하자고 했다. 이 공개된 장소에서, 왜? 난 거부했다. (지금은 난 공개된 장소에서도 뽀뽀를 잘하는데, 어릴 때는 그런 게 너무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다)


- 이게 바로 너와 나의 가장 큰 차이야.


심장을 쿡 쑤셔 넣는 말을 던지더니 그 아이는 되었다면서 치킨이나 먹자고 했다. 그 날 굳이 우리의 차이를 끄집어내고 싶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전날 밤, 그 아이가 친구들을 만난 게 아니라 전 여자 친구를 만나고 왔고, 그 여자 친구와 함께 하룻밤을 보내고 왔던 것이다. 실수라면서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했지만 용서가 되지 않았다. 잠자리에 목숨 걸었던 풋풋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더 그랬을 수도 있고, 내 처음이었던 사람이라 배신감이 컸던 것도 같다. 그 아이에 대한 정리되지 않는 마음과 난생처음으로 겪는 배신감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 난 네가 다른 남자 좋다고 했을 때도 봐줬는데, 넌 어떻게 이걸 못 봐주냐? 난 실수라니까?


그 아이가 원망을 쏟아부으며 다시 만나자고 애원해도 싫다고 했다. 그 아이는 또다시 학교를 나오지 않았고, 지난 학기 나와 헤어져 학고를 맞을 때와 마찬가지로 학고를 또 맞았다. 나는 지난 학기와 마찬가지로 또 장학금을 받았다.


- 넌 진짜 독하다.

- 응, 나 원래 독해. 몰랐냐?


그렇게 또 한 학기가 지나고, 난 '너는 내게 아무 영향도 없단다'는 걸 몸소 보여주고 싶은 복수심에 불타서 만날 때마다 "안녕?"하고 웃으며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 아이에게 연락이 왔다. 집 앞에서 잠깐 보자고 했다. 우리의 추억이 담긴 모든 물건을 박스에 들고 와서 가져가라고 했다.


- 나 볼 때마다 그렇게 헤헤 웃지 마. 진짜 짜증 나. 난 너 웃는 거 보고 싶지 않아.

- 네가 웃지 말라고 안 웃고, 웃으라고 웃고 그런 사람 아냐. 내 마음이니까 신경 쓰지 마.

- 그래? 근데 난 왜 네가 웃을 때마다 '사실은 안 괜찮다고' 보여주고 싶어 하는 거 같냐?

-...



가만히 나를 쳐다보던 그 아이는 큰 결심을 한 듯 크게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 너, 내가 너한테 처음 남자였다고 의미 부여하고 연연하고 그러지 마라. 나한테 넌 수많은 애 중 하나니까.

- 너 미쳤어? 지금 삼류 영화 찍어?

- 어. 몰랐어? 그 영화 주인공이 너야.


휘청, 어지러웠다. 이 자식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그는 어떻게 하면 나를 아프게 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맘먹고 던지는 말들은 정확하게 급소를 건드렸다.


명중이었다.


- 너 이렇게 내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가 집에 가서 울 거지? 너 늘 그러잖아. 강한 척. 세상 누구보다 약한 게.



망했다. 내 첫사랑이 처절하게 망가진 것이다. 그가 바람을 폈다는 사실보다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했다는 게 더 용서되지 않았다. 다시는 이 아이와의 좋았던 시절을 꺼내 볼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실이 분해 한 동안 잠 이루지 못했다.


남아있는 감정을 자르기 위해 혼자만 독한 척 말하는 게 얼마나 예의 없는 짓인지를 알려 준 첫사랑 덕에, 헤어짐에도 상대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는 걸 배웠다.


그렇게도 분했건만 우리는 이제 우연히 만나면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 사이, 난 그 녀석에게 진지하게 사과받았다.) 그 친구가 지금은 결혼을 했고, 와이프 되는 사람이 엄청 기가 세서 그 친구가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통쾌하다. 다 인과응보란다, 친구야.


어린 날의 사랑은 너무나 순진하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잔인해지기 쉽다. 내 첫사랑도 그랬다.

매거진의 이전글 상사에 대한 팔로우십이 부족할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