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부터 10월까지 3명의 아이와 함께 농촌유학을 감행했다. 서울을 떠나 폐교위기인 전남의 작은 학교로 '유학'을 와서 머물렀다. '농촌'이라는 단어 뒤에 붙은 '유학'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이지 않은가.
농촌유학이란?
농촌유학은 도시의 학생들이 원하는 학교에서 1년 동안 살면서 지역 학교생활과 다양한 농촌 체험을 하는 것이다. (출처: 경향신문 어느 기사 中 _ 다른 어떤 문장으로 내가 다시 정의 내리기에는 너무 여러 이야기들이 떠올라, 남이 내린 한 문장으로 대신해 본다).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작은 학교들에서 일부 시행 중이다. 우리는 곡성을 선택했다. 한 학기로 예정하고 내려왔던 유학은 자연스레 연장되어 아이들은 농촌에서 두 번째 학기를 맞이했다. 농촌유학을 가기로 했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물어왔다. 대체 왜? 농촌유학을 갔냐고? 거기에 내놓을 그럴싸한 답을 찾아본다. 정리해보고나니,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먼저 고백해 본다.
"아이들아, 나와는 다른 삶을 살거라"
모든 부모들은 자식이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기를 소망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살기를 바라는 삶의 모습이란 대부분 자신을 기준으로 한다. 즉, '나처럼은 살지 말거라' , '나보다는 잘 살아야 한다'의 연속. 나의 경우에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새로운 세상에 기꺼이 자신을 내던져 도전하는 삶'을 살기를...이었다. 늘 평범하게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에 안주하는 탓에,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다고 믿어서일까. 아이들만은 보다 넓은 세상에서 살길 바라는 마음이 컸다. 고작 그 대책 중 하나가 이 넓은 서울을 벗어나 농촌을 향하는 것이라니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지만, 어찌 됐든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을 만나게는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움!! 의 측면에서는 강한 자극이 되겠지 싶었다. 그냥 눈 떠보니 있는 곳에서 가만히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꿈틀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사실 셋째를 임신했음을 알게 된 순간부터, 아이 셋을 이곳 한국에서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남편과 꿈꾼 것은 한국을 떠나 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었다. 이 나라 저 나라를 기웃거려 보다가 비용상 너무 어려워 포기했던 때였다.'에잇, 그럼 일단은 농촌이다' 이런 마음이었다. 서울과 다른 환경에서 적응하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언젠가 한국이 아닌 곳에 나가도 적응할 수 있겠지, 뭐 그런 비약 심한 결단이었다.
갈 수 있으니까, 간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농촌유학을 떠나온 이유는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가려는 엄두조차 내보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 농촌유학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평일 점심, 집에서 남편과 간단히 점심을 먹고 나른하게 휴대폰에 온 학교 알림을 보면서부터였다.
"응? 농촌으로 유학을 가는 프로그램이 있다네?"
"가볼까?"
라는 평일 점심의 농담으로 뱉은 제안이 시간이 흐를수록 뚜렷해졌다.
여기에서 포인트는 평일 점심에 남편과 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것. 그렇다. 남편은 코로나로 인해 벌써 2 년째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다. 거주지역은 경제생활에 아주 미미한 영향을 받았다. 나 역시 소소한 일거리를 노트북으로만 해결하면 되었으므로, 당장 서울을 떠난다 해도 아쉬울 것이 없었다. 아이 셋을 나 홀로 데리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 무모한 일은 시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지역으로 이동해도 우리 돈벌이에는 문제가 없었고, 쉬지 않아도 됐다. 물론 떠나 있는 동안 비어있을 집, 통신이나 가전기기, 다시 마련해야 하는 살림살이 등 이것저것 따져보자면 신경 쓸 것은 많았지만 그래도 아예 떠나지 못하게 잡아 붙드는 것이 적었다.
농촌유학을 떠나온 사람들의 풍문을 이곳저곳에서 엿들어 본 것으로는 모두들 '올 수 있으니까 온' 사람들이었다. 엄마와 아빠 둘 다 과감하게 경제활동을 하지 않기로 선언하고 함께 떠나온 경우도 있었다. 한눈에 봐도 부유함이 보이는 사람들, 1년간 돈을 벌지 않고 쓰는 삶만 살아도 괜찮은 여건. 아니면 1년간 쉬어도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는 사람, 아니면 돌아가지 않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육아휴직을 내고 왔다는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 1년 동안 육아를 목적으로 휴직을 내도 이상하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곳은 일부 극히 일부의 회사뿐임을. 물론 아빠는 서울에 머무르고 엄마와 아이만 내려온 경우도 있었지만 그런 결단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농촌유학을 최종선택할 수 있었다.
엄마도 농촌유학이 필요했다
농촌유학은 아이들을 위한 결정이기도 했지만, '이기적'인 엄마의 선택이기도 했다. '변화'가 절실했던 시점이었다. 아이 셋 엄마로서 살아내고 있는 삶의 모습은 권태로웠다. 일상을 흔들 일은 일어나선 안되었지만,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일상은 오히려 나를 갉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아이들 틈에 껴있고 싶지 않았다. 가만, 가만, 고요 속에 담겨 있고 싶었다. 나를 깔아뭉개고 흔드는 육체의 무게가 버거웠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아등바등 되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으로 채워지고 싶었다. 농촌유학에서 가장 끌렸던 것을 꼽자면, 솔직히, 아이들이 아침 7시 50분이면 학교로 떠나서 방과 후 활동까지 꽉꽉 채워하다가 오후 5시에 돌아온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들이 농촌에서 '유학'을 하는 동안, 그 넘치는 시간 동안 나도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낯선 환경에, 고요한 자연 속에 놓인 나 역시 변화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돌아오면 모든 게 나아져 있을까.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누군가의 말처럼 그 먼 곳에서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한참을 돌아다녀도 발자국 하나 남길 수 없는 것이 여행이니까. 돌아오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과자 부스러기조차도 그 자리 그대로 놓여있는 것이 여행이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은 무조건 떠나고 싶다.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책 <아이러브유> by 이미나 中
이 글처럼 무조건 떠나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을 인정해야겠다. '일상', '반복'이 머무는 곳이 아니면 어디든 상관없었다. 여행은 너무 단기간에 그칠 것 같았고, 금방 돌아와야 할 것만 같았다. 물론, 지금은 안다. 이곳 농촌에서 머물다가 서울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떠날 때 책상 위에 높여 있던 과자 부스러기는 1년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나에겐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정작 그리 큰 변화는 없었으므로.
아이들이 없었으면 어땠을까? 가끔 나의 지금까지의 선택들을 뒤집는 선택을 했을 나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뭐 다를 것이 있었을까? 싶지만 보다 '자유롭게 떠날 수 있지 않았을까?' TV로 정규편성 된 프로그램을 챙겨보지는 않지만 유일하게 챙겨보는 프로그램들은 여행 프로그램일 정도로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해왔으니까. 톡파원25시, 부루마블, 배틀트립, 환장여행, 뭉치면 뜬다. 등 일주일내내 여행프로그램을 보며 대리만족 (그러고보니 참 많다. 나같은 사람이 참 많다는 반증이겠지) 해 왔다. 나로 치자면 떠나고 싶은 마음만 있을 뿐, 떠나기 위해 필요한 그 어떤 것도 돈도 시간도 여유도 계획도 없는 사람들의 쪽이었으니까.
지난 1년을 돌아본다. 어떤 기대는 옳은 것으로 판명됐지만 어떤 기대는 산산이 깨어졌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고, 서울에서 아이들을 키워 온 나의 삶이 농촌에 와서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앞으로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보려 한다.
하나의 브런치북으로 '농촌유학' 이야기를 묶어 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난 뒤, 이 글을 어떻게 포지셔닝해야 할지를 생각해 봤다.
농촌유학으로 아이들의 교육적 성취를 높인 열성적인 엄마로서의 교육지침서?
시골살이를 꿈꾸는 이들에게 로망을 불러일으키는 시골살이 경험서?
나는 출발할 때 무엇을 원했을까? 무엇을 얻으리라 예상했던가? 의 질문으로 다시 도돌이표처럼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도저도 아닌 그저 좌충우돌 경험담 실패담 정도 되려나? 그러나 괜찮다. 실패담도 도전해 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걸 테니까. 농촌유학에 도전한 사람도 있다고, 첫 시작은 그 정도로 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