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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파즈 Dec 23. 2019

말 한마디 듣고자 살 때도 있습니다.

에세이 #15 말 한마디 끝내 듣지 못한 50대 남자의 말 한마디


사람은 가끔 말 한마디 듣고자 살기도 합니다.



말은 내 말이든 남 말이든 위력적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은 언제나 좋았는데 방학 일기는 싫었습니다. 매일 즐겁게 놀았는데 뭐하고 놀았는지 날씨는 또 어땠는지 도대체 이게 왜 중요한지... 그래서 매번 몰아서 쓰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성실하지 않다느니, 꾸준히 무엇인가를 하지 못한다는 핀잔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후 ‘나는 끈질김이 부족한가?’라고 스스로 묻곤 했습니다. 일정 시간을 곰곰이 생각하고는 ‘나는 끈질긴 사람이다.’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 뒤로 ‘나는 끈기가 있고 무엇보다 강한 사람이다.’라고 선택하고 행동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결심하고 시작한 일이 나태해져 중단될 때 이전에는 ‘역시 나는 끈기가 없는 사람이구나!’ 하고 그만두던 것이 ‘나는 끈기가 있는 사람이니깐!’ 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규정한 말 한마디에 얽매여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의미를 스스로 규정하기 전에 많은 말을 듣습니다.



저도 이제 태어난 지 7개월 넘어가고 있는 딸을 보며 얼마나 많은 말로 규정했는지 모릅니다. 타인의 말을 과도하게 듣고 내 삶에 반영하면 나 스스로 생각하고 정의하는 '나'는 뒷전이 됩니다. 내가 언제 웃고 즐거운지 누구와 함께 있을 때 자연스러운지 어떤 일을 할 때 힘에 부쳐도 끝까지 해내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타인의 말로 인정받으면 그것으로 끝이기 때문에 내가 어떻게 끝까지 가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아시는 분은 나이 50이 넘도록 아버지를 모시고 사셨습니다. 공직에 계셨는데 몇 차례 승진의 기회가 있었고 중앙부처로 옮겨 출세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맏아들로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지역을 옮기지 않고 평생 아버지 곁을 지켰습니다. 덕분에 나머지 형제들은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덜 수 있었습니다. 몇 해 전 그분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장례를 마치고 그분이 지나가듯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습니다.



“아버지가 가시는 순간까지 ‘네 덕분이다, 네가 맏아들로 참 고생 많았다.
수고 많았다. 너무 고마웠다.’와 같은 말씀은 없으셨다.
평생 그런 따뜻한 말 한마디 들어본 적 없다...
(잠시 침묵) 너무 섭섭하다...”



섭섭하다는 말 한마디에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녹아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고 앞으로 다시는 아버지에게 그 말 한마디를 듣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주는 상실감, 아니 정확히는 상실감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한계.. 저로서는 그것을 표현하기 참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분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그 말 한마디가 뭐 그렇게 어렵다고 안 하셨을까..라는 원망도 있었음은 사실입니다. 잠시 침묵하고 입에서 툭 튀어나온 '너무 섭섭하다..'라는 말이 쉽사리 공기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 느낌이었습니다.


타인의 삶을 평가하는 것은 부질없고 무의미합니다. 누구나 맥락을 살피고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감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말 한마디 듣지 못해 마음에 한이 남은 50대 남자의 가슴속 헛헛함을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을지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화자가 사라지고 남은 말


화자가 사라지고 남은 말만큼 공허한 것이 없습니다. 그분은 앞으로 ‘네 덕분이다, 네가 참 고생 많았다, 고맙다, 수고 많았다.’와 같은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말 한마디도 한 평생 함께 살았던 아버지의 말 한마디보다 적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은 화자가 내 앞에서 적절한 때에 다가와야 의미로 남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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