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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파즈 Dec 09. 2019

'언제까지 이걸 해야 하는 건가요?'

퇴사하고 글쓰기 #08


'제가 언제까지 이걸 해야 하는 건가요?'


예전 일하던 회사에 인턴 K가 당돌하게 물었던 질문입니다. 인턴 K에게 맡긴 업무는 기업의 재무제표 데이터를 엑셀로 기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연도별로 기업의 로우 데이터를 입력해서 통계 처리를 하고 그 결과를 재무적 수치로 살펴보기 위함입니다. 어느 업종의 회사가 성장하고 있는지 알 수 있고 무엇보다 각광받고 있는 기업이 진짜 성장하는 건지 빚으로 지탱하고 있는 건지 살필 수 있기 때문에 꽤 중요한 업무였습니다. 인턴 K는 지역의 최고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었습니다. 졸업 후 취직해서 잘 먹고 잘 사는 인생보다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고는 인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인턴 K 앞에는 약 500개 기업의 재무제표가 놓여있었습니다. 저는 이 업무가 인턴 K에게는 과분하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팀장은 맡겨보라는 말을 남기고는 출장을 갔습니다.



반나절 동안 엑셀 시트 서식을 재구성한 인턴 K


저는 인턴 K가 맡을 업무를 차근차근히 설명해줬습니다. 그리고는 제 업무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오후 3시쯤 물었습니다.





'양이 많죠? 어느 정도까지 했어요?'


'네, 지금 엑셀 시트를 새롭게 구성하고 있습니다.'


'엑셀 시트요? (무슨 시트를 구성하고 있다는 거지...) 잠시만 볼 수 있을까요?''


'네!'


....(잠시 침묵) '엑셀 서식이 왜 이렇게 되었어요?'


'네, 제가 볼 때 ~~ 바꾸면 가독성이 높아 추후에 제가 분석 보고서를 작성할 때도 용이하기 때문에~ 그리고 제가 만든 서식은요~~~~~~`



우선순위는 언제, 어디서나 '눈치'와 함께하는 친구다.


무슨 말을 장황하게 했는데 이미 제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인턴 K는 전년도 엑셀 시트 구성을 손보고 있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엑셀 시트의 행 높이, 열 너비 등을 조정했고 재무제표를 기입하면 결과를 볼 수 있도록 삽입해놓은 수식을 수정하고 있었습니다. 수식을 삽입해놓은 이유는 명확합니다. 성과를 증빙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할 수 있는 수치를 바로 살피기 위함입니다. 인턴 K가 앞으로 쓰게 될 분석 보고서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짜증이 폭발하려 했지만 떠나가는 멘탈을 부여잡고 이어서 말했습니다.





엑셀 시트 구성은 원안대로 돌리고 데이터를 바로 기입하세요. 데이터가 중요해요. 지금 이 엑셀 시트는 PT자료가 아니기 때문에 '효율'만 따지고 구성한 거예요. 데이터를 기입하는 것이 지금 필요한 일입니다. 그걸 K 씨가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재무제표를 살펴보세요. 숫자만 기입하는 게 아니라 기업별로 재무제표에서 드러나는 자금 흐름의 윤곽을 살펴보세요. 어떤 기업은 지금 현금이 부족할 수 있고, 어떤 기업은 고정 자산에 돈이 묶여서 당장의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어요. 또 어떤 기업은 매출이 급상승했는데 R/D 투자를 늘려서 영업이익이 낮을 수도 있어요. 그런 기업은 장기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잖아요. 나름의 가설을 설정하고 다시 한번 살펴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자판기 소리가 변한 인턴 K


인턴 K가 옆에서 두드리는 자판기의 소리가 변했습니다. 엑셀 시트를 구성하던 소리와는 전혀 다르게 아무 의미도 의욕도 없는 자판기 소리였습니다. 


직장 생활의 고단함이란 나라는 사람을 숨긴다고 숨기지만 오만가지 상황과 대화 속에서 어느 시점에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시간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자판기 소리는 업무 몰입도를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그 몰입도가 현격하게 저하되었습니다. 


인턴 K 씨는 똑똑한 친구입니다. 똑똑함이 자칫 잘못하면 건방짐으로 이어지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상세히 설명해줬습니다. 기업의 재무제표는 쉽게 볼 수 없고 한 번에 500개 기업의 재무제표를 살피면서 나름의 관점을 가지면 인턴 K가 어디 가든 숫자와 벗어날 수 없는 화이트 컬러 직종에서는 강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제 말이 의미 없는 꼰대의 잔소리가 된 것은 뭐 길게 고민하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꼰대가 저였습니다.



의미 있는 일을 찾던 인턴 K는 또 다른 의미 있는 그 무엇을 찾아 떠났다.


인턴 K는 그로부터 1주일 뒤 그만뒀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일을 제가 해야 하는가요?'라는 질문을 던진 지 24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의미 있는 일을 찾아서 들어왔던 곳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습니다.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겠다는 인턴 K의 포부는 하루 종일 엑셀에 숫자를 기입해야 하는 업무 앞에서 그 간극을 좁히지 못했습니다. 



우리 팀 막내는 1.5일 만에 인턴 K의 일을 끝냈다.


글쓰기의 시작은 첫 문장 하나를 쓰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300~400페이지 책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인턴 K가 떠나자 그 업무는 우리 팀의 막내가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엑셀 시트를 빼곡히 숫자로 기입했고 무엇보다 빨리 그 자료를 제출했습니다. 본인도 바빴을 텐데 엑셀 시트를 복사해서 별도로 재무적 성과가 높은 기업, 평균 수준으로 성장하고 있는 기업, 내년이 걱정되는 부실기업 등으로 분류해놨습니다. 비고란에는 나름의 분석 결과를 한 단어 혹은 한 문장으로 짧게 기입해놨습니다. 어차피 다들 바빠서 장황하게 펼쳐진 글은 읽지 않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인턴 K와 우리 팀 막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인턴 K는 이상과 현실 가운데 균형을 찾아 나름대로 고군분투하기를. 우리 팀 막내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지금 전화 한 통 해봐야겠습니다. 잘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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