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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파즈 Jun 09. 2020

새벽 4시 빨래방과 루앙프라방

에세이 #53

일요일 저녁 딸을 씻기고 샤워를 했습니다. 야근이 잦은 한 주를 보내고 오면 어김없이 딸은 저와의 목욕을 거부합니다. 엄마가 곁에서 지켜봐야 그제야 몸을 맡깁니다. 엄마와 단 한순간이라도 방식이 다르다고 느껴지면 울음을 터뜨리고 엄마에게 갑니다.  


주말 동안 온종일 시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아침에 눈뜨고 밥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산책하며 잠을 재우고 나니 한층 가까워졌는지 일요일에 함께 샤워를 하면서 물놀이까지 했습니다. 일상을 축적하는 시간이 중요함을 새삼 느꼈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습니다.


저녁 8시 전후로 소등하고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딸이 잠이 들면 저와 아내는 TV를 보며 낄낄거리기도 하고 기네스 맥주를 마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날은 바로 잠들어 새벽 4시까지 숙면을 취했습니다.

 

새벽에 잠이 깨었는데 다시 잠을 잘 수는 없고 어제저녁 가려고 했던 빨래방을 가자고 마음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신발 여섯 켤레를 담고 이어폰과 책을 한 권 챙겼습니다.


빨래방, 생경하지만 꽤 괜찮은 도시공간


뭐랄까, 생경하지만 꽤 괜찮은 도시공간이 하나 생긴 느낌이었습니다. 무인시스템이라 누구와 인사할 필요도 없고 또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공간. 무엇보다 '빨래'라는 행위가 가지는 온전함이 느껴졌습니다. 집에서 하는 빨래는 사실 1+1과 같은 취급을 받습니다. 청소기를 돌리며 세탁기를 돌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청소가 끝나는 무렵 탈수가 끝나고 빨래를 너는 것입니다.


빨래방. 말 그대로 빨래만 하는 곳입니다. 더구나 새벽녘의 고요함이 더해지니 무릇 산사에서 보내는 시간처럼 차분함이 느껴졌고 세탁기가 작동하는 소리가 백색 소음처럼 편안함을 줬습니다. 이런 감정을 어디서 느낀 적이 있는데..라는 생각이 이어지다가 딱, 떠올랐습니다.


루앙프라방, 탁발과 새벽 시장


여행은 시간과 공간을 소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정 시간, 공간을 기억을 담아내고 그걸 곱씹으며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죠. 잠깐 일상이 가득 찬 공간을 떠나는 것도 중요합니다. 지구를 여행하는 중이지만 지구 안에서 또 다른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고자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루앙프라방의 새벽은 매우 영적이고 또 매우 세속적입니다. 매일 탁발을 시작으로 경건한 새벽을 엽니다. 주황색 도포를 입은 탁발승 수백 명에게 주민들은 공양을 합니다. 인구 5만 남짓의 소도시 루앙프라방 아침 풍경이고 이 곳을 방문하는 여행객은 빠짐없이 이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500년 전과 동일한 모습으로 매일 새벽을 열고 있습니다. 탁발이 끝날 무렵 골목은 분주해집니다. 새벽 시장에서 장사를 준비하는 상인들이 식자재를 나르고 판을 벌리고 있습니다.


종교적 장면이 지나간 공간에 상인들이 등장합니다. 도시공간은 쓰임에 따라 등장인물이 변합니다. 이런 풍경은 영성을 갖추러면 재물을 멀리해야 한다는 통념이 무의미한 것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오래된 것이 주는 넉넉함, 전통이 가져오는 숙연함, 다양한 인종이 모인 역동성.. 이런 묘한 조화가 루앙프라방에서 있습니다. 영성과 재물이 공존하고 사람과 개가 호형호제하는 느낌. 그야말로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아이덴티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지나는 찰나에,


*빨래 

*루앙프라


절묘하게 라임이 맞아떨어지니 혼자 웃음이 났습니다. 빨래 종료를 알리는 알람이 울려 시계를 보니 새벽 5시가 조금 지났습니다. 건조기에 신발을 넣고 다시 기다리며 읽던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책을 읽다가 지금쯤이면 새벽녘의 어둑어둑함을 뚫고 탁발 행렬이 지나가겠구나 싶었습니다.


현대사회 신발은 사회적 상징입니다. 어떤 신발을 신는가는 때와 장소, 만나는 사람을 설명합니다. 낡음을 드러내기 위해 빈티지한 신발 한 켤레 가격은 40~50만 원입니다. 첫 출근을 기다리며 깨끗한 구두를 준비하고 부모가 자녀의 첫 신발을 준비하는 정성스러운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소년 탁발승과 공양을 준비하는 소녀


건조를 마친 여섯 켤레의 신발을 챙기며 오늘 새벽 맨발로 탁발 행렬에 서 있는 소년을 떠올립니다. 탁발승은 맨발로 거리를 걷고 있습니다. 어두운 새벽녘이 잔잔히 떠오르는 햇살과 마주하는 그 시점에 루앙프라방의 거리를 걸으며 공양을 하는 신도에게 느끼는 감정을 헤아려봅니다.


주황색 도포와 맨발로 거리를 걸으며 오늘 주어진 양식에 감사하는 마음. 그리고 그것이 매일 채워지는 공동체가 함께 공유하는 안도감이지 않을는지.

 

새벽 4시, 졸린 눈을 비비며 깨어 기도하는 마음으로 새벽 공양을 준비하는 소녀를 떠올립니다. 전날 밤에 준비한 쌀로 밥을 짓고 상하지 않게 보관한 반찬을 담아냅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가진 것이 충분하니 베푸는 마음.


새벽녘 쌀쌀한 날씨를 맞이하기 위해 스웨터를 입고 무릎을 꿇고 탁발승의 행렬을 기다립니다. 소유에 만족하며 나누기 위해. 매일 주어지는 양식에 감사하며.


하루를 살아가는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겁니다. 가진 것에 감사하고 주어진 기회에 노력하는 삶. 단순하게 살고 주변과 어울리려고 애쓰는 삶.


어둑어둑했던 새벽녘이 지난 밝은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고 고요했던 빨래방 주변으로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당분간 깨끗해진 신발을 신을 때마다 루앙프라방의 소년과 소녀가 생각날 겁니다. 베품과 감사가 매일 일어나는 공동체, 그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영성이 가득찬 새벽이 진정한 루앙프라방의 모습이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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