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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파즈 Sep 06. 2020

왜 교회를 다니세요?

에세이 #57

 기독교 신앙인으로 30여 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만큼 올바르게 살지 못한 적도 많습니다. 이와 반대로 청춘의 한 시절을 온전히 신앙생활 안에서만 보낸 적도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언제나 중요했고 지금도 그 영역 안에서 살아가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최근 코러나 바이러스 2차 확산이 8.15 광화문 집회로부터 시작되고 그 근원지가 사랑제일교회를 비롯한 대형교회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와중에 교계의 지도자들이 내놓는 메시지를 차근히 읽어보며 두 가지 질문을 져봅니다.


 첫째, '한국 교회는 사회적 효용을 다한 것이 아닌가?'

 

교회가 문화를 주도하던 시기가 짧게 있었습니다. 한국전쟁 후 보고 듣고 즐길 것이 없었던 황에서 교회는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딱 거기까지였고 그 후로 교회가 문화를 주도한 적은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1980년대 폭발적인 전도운동과 성령 집회를 중심으로 성장을 거듭합니다. 교인이 늘어나며 대형교회가 속출했고, 이른바 '큰 목사'들이 출현했습니다.


 교회가 가진 태생적인 보수적인 성향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1960년부터 친정부 성향을 지닌 교계의 지도자들은 매주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신도들의 보수화 성향갔습니다.


 전통적인 기독교는 보수적 색채가 있습니다. 전통적 보수는 원칙은 지키고 자유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원칙을 지키고 자유를 수호하기보다 전형적으로 극단적인 정치세력에서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공동체를 지키고 서로 사랑하고 약자를 돌보는 성경말씀은 '우리 교회, 우리 사람'만을 향해서만 적용됩니다.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기독교인은 소수라는 반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한국교회의 이니셔티브를 쥐고 있으며 이는 합리적인 거버넌스 구축에 완전히 실패했다는 반증입니다.


 일본 역사 몰락의 발단은 아베가 총리가 된 순간부터 입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국민이 창출한 권력은 언제나 국민을 짓눌렀습니다. 역사는 몇 번이고 우리에게 동일한 메시지를 보내지만, 우리는 매번 쉽게 지나칩니다. 지금 일본이 보여주는 현실이 한국 교회와 닮은듯 느껴지는 것은 저만의 기시감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합리적인 거버넌스 구축에 실패하고 극단적인 정치세력으로 비치는 한국 기독교에게 감히 미래를 논할 수 있을까요? 아마 더 망가지고 바닥을 찍어야만 반등할 수 있는 모멘텀을 마련할 것으로 보입니다. 



 둘째, '딸이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냐고 물을 때 뭐라고 말해야 하나?'


 개인적 체험은 신앙의 강력한 동기이겠지만 그것으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딸에게 설명하기는 역부족입니다. 딸에게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하고 교회를 나가라는 억지를 부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엇나간 목사님과 장로님의 자녀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최근에 한 동료가 저에게 교회 다니는지 몰랐다며 물었습니다.


왜 교회에 다니세요?


저는 답했습니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다녔어요.



 어휴.. 교회를 30년 다니고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그거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정도로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왜냐하면 진짜 왜 교회를 다니냐는 궁금증이 있어서 물어본 것이 아니라 이 따위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를 왜 다니냐는 마음의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을 명확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ㅠㅠ;;)


 이것이 바로 교회가 처한 현실입니다. 합리적인 한국인의 60~70% 가까이는 언급조차 하기 싫을 정도로 교회를 혐오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력에 줄을 대고 마이크를 들고 소리치는 얼빠진 목사 한 명에게 비난을 퍼붓고 있지만 실상은 교회가 가진 완고함과 불통에 대한 답답함이 아닐는지.


 이러한 사회적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며 '교회는 꼴통집단이다.'라는 명제가 참으로 판단되는 사례가 쌓여갈수록 신앙을 전수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라는 메시지는 허무한 날의 한숨과 다를 바 없습니다.


 미래에 장성한 딸이 종교적 자유를 주장한다면.. 기독교의 한계에 대해서 언급하며 무신론을 주장한다면.. 무엇보다 작금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보며 교회에 갈 수 없다고 말한다면.. 


저는 분명히 할 말이 없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 주어진 최난이도의 숙제는 하나님을 믿는 아빠를 보며 자연스럽게 딸이 신앙을 받아들이기를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하루 올바르게 살고자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 속에 비친 교회가 어떠하든지 나에게 다가온 신앙을 가진 아빠가 좋은 사람이라면 사랑하는 딸이 교회라는 구조를 생각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먼저 기억하지 않을까요?


 나중에 나중에.. 딸이 글을 읽을 수 있는 때가 온다면 아빠가 이런 고민을 했었다는 것을 알아주기만 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고 또 더 많은 감정을 교류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휴일 저녁, 소담한 빗줄기가 차분히 내리고 딸은 하염없이 놀이에 푹 빠져 있다가 '아빠'라고 소리를 내며 저를 부릅니다. 때마침 글을 마무리 짓고 딸에게 천천히 다가갑니다. 오늘도 충분히 좋은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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