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걸음만 앞서가라. 딱 반걸음만.

퇴사하고 글쓰기 #10 매일매일 반걸음만.

by 토파즈

처음 직장생활을 하던 시기 최우선 과제는 커피 타기였습니다. 매일 오전 9시에 출근하는 팀장님에게 인사하고 하는 말입니다.


"팀장님, 커피 한 잔 하시겠습니까?"


그리고는 점심 먹을 때까지 거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할 말도 없고 딱히 저에게 말을 거는 분들도 없었습니다. 전화벨이 울리면 최대한 빨리 받아서 공손히 인사하고 메모를 남기고 담당자에게 연결했습니다. 당시 팀장과 옆자리 선임은 하루 동안 읽을거리를 줬었는데 일을 한다기보다 그냥 앉아있는 것이었고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어 열심히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러다 교육팀 A 선임을 도와 교육을 진행해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A 선임은 저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더 골치 아팠을 겁니다.


처음으로 맡은 업무는 '현수막 제작'이었습니다. 교육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A 선임을 도와야 하는데 A선임 입장에서 저에게 일을 시키는 것이 더 큰 일이었습니다. 일을 잘했던 A 선임은 부드럽게 저에게 현수막 제작을 요청했고 담당 업체와 현수막 사이즈, 행사개요, 톤&매너 등을 추가로 설명했습니다. 사실 제작 업체와 전화 한 통하고 시안 받고 인쇄 넣고 도착시간만 알려주면 끝인데 저한테 설명하는 게 더 번거로웠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도 A 선임은 차분하게 하기 싫은 내색 없이 친절했습니다.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현수막 업체 전화번호를 들고 몇 번을 연습했습니다. 꽤 진지했습니다. ^^; 연습한 대로 말을 하고는 메일 주소를 받아서 상세 내용을 작성해서 메일을 보내며 A 선임을 참조로 걸어서 확인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게 첫 업무였고 현수막이 무사히 도착했을 때 제가 느낀 소소한 기쁨은 표현하지 않았지만 좋았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차츰 업무가 익숙해졌고 회사 내 관계가 쌓이며 꽤 일을 즐겁게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규모 있는 행사가 있었는데 당시 행사 사회를 맡았던 담당 팀장이 집안에 상을 당해서 불가피하게 사회를 보지 못하고 그 외에 팀장들이 일정이 겹쳐서 참석이 어려웠습니다. 내심 속으로 '나한테 기회가 올건가? 혹시나 물으면 열심히 한다고 말해야지. 내가 진행했던 레크레이션이 얼마나 재미가 있었는데'라고 생각하며 세상 혼자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파트장은 어떻게 하지? 큰 일인데.라고 말하며 저를 딱 보더니 한마디 했습니다.


'빨리 역량을 키워야겠네. 이런 행사 진행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는 본인이 다른 팀장이나 선임을 섭외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우선 당일 행사에 사회자 섭외 빼고 다른 부분에서 이슈가 없도록 하라고 말하고 회의는 끝났습니다. 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그저 얼굴만 빨개졌는데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아니, 아무도 모르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얼마나 부끄럽던지. 아무도 주지 않은 김칫국을 혼자 드링킹 하며 배가 불렀습니다.


행사는 잘 끝났습니다. 아마 제가 큰 역할을 하지 않아서 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에 섭섭했습니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는데.. 나도 하면 잘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며 파트장과 커피를 한 잔 했는데 그때 당시에는 참 뜬금없는 말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저의 성향과 기질을 파악하고 이미 섭섭해하는 것까지 알고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반걸음만 앞서가라. 딱 반걸음만'


빨리 진급도 하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저는 무슨 개똥 같은 소리를 하고 있나 했습니다. 저의 넘치는 열정과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말이었습니다. 속으로 외쳤습니다. 무슨 놈의 반걸음이냐. 두 발, 세 발 앞서가겠다! 라며 억지로 경청하는 척했습니다. 무슨 놈의 자신감인지 그 당시를 생각하면 혼자 부끄럽습니다.


잘난 놈은 놓아주고 못났던 어제의 나하고 매일 샅바를 다시 잡자.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며 '반걸음만 앞서가라.'를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매일 일정하게 성장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며 거기에 더해서 반걸음 앞서가려면 얼마나 애를 써야 하는지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흔들리는 때가 있습니다. 주변에 무슨 일만 하면 두 발, 세 발 앞서가는 인간들이 꼭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다 만화가 이현세 님의 '천재와 싸워 이기는 법'을 읽었습니다. 그 글에 공감하며 괜히 싸울 군번도 못되는데 비교하며 주눅 들고 혼자 열 받고 그러지 말고 이현세 작가님 말대로 그냥 보내자. 내 곁에 머문 적도 없지만 천재랑 싸워서 어떻게 이기나? 그냥 보내주자. 잘난 놈들은 자기들끼리 싸우라고 하고 나는 못났던 어제의 나하고 샅바 싸움을 다시 하자.라고 말입니다.




[사진출처 : 도서 '반걸음만 앞서가라.' 표지 (출판사 사계절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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